하와이에 영화찍으러 간 녀석, 계속 메신저에서 엇갈리더니만 오늘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미친듯 마감하다 말고 잠시 숨돌리며 가루 녹차로 목을 축이던 오후 여섯시 무렵이었다.
영화 촬영 스케줄이 늘어지는 탓에 녀석은 영화 찍다 말고 홀연히 뉴욕으로 납시어 쏘다니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또 자동차 횡단 여행을 하고, 그러더니 다시 지금은 하와이에 돌아와서는.. 한국 들어와서 패션 쪽에 뭔가 해보려고 알아보는 모양이다.
처음 봤던 때가 19살, 이라 그런가? 내 눈에 늘 어리게만 보였던 녀석이 이제는 제법 남자 티가 나는 것 같다. 외국 나가서 힘들게 촬영도 하고 여행 다녀보더니 철이 들긴 든 모양이다. 남자고 여자고 간에 긴 여행을 해봐야 사람이 좀 사람다워지느게 아닌가 싶다.
낯선 곳에 달랑 홀몸으로 떨어져 온몸으로 부딪혀 모든 문제를 혼자 헤쳐나가 보기도 하고 각종 스릴 만점의 위험천만한 상황도 겪어봐야 성장하는 법이다.
이야기라면 근 1년 만에 제대로 나눈것인데, 녀석은 연달아 세번쯤 이렇게 말했다.
여전하네..
1년 안에 사람이 변하는 것도 쉬운건 아니다. 라고 답했다.
이따금, 여전하네.. 라는 말이 아주 기분 좋을 때가 있다. 어떤 공집합을 가진 이들이 시간을 사이에 두고 잠시 각자 다른 방향을 보고 서 있다가 다시 마주했을 때가 아마 그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하와이라면 예전에 갔을때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곳이라 내 남은 인생에서 다시 갈일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확실히 그 지역 자체에 대한 악감정은 없다.
그리고 어느 휴양지나 마찬가지지만 알려지지 않은, 살짝 비껴나간 어느 특별한 지역을 발견했을 때 여행지의 매력은 두배가 되기도 한다. 부치고, 이고 지고 들고올 짐만 해도 산더미라고 푸념하는 녀석에게 육포 조각 하나라도 안들고 돌아오면 안만나 주겠노라고 엄포를 놓았다.
마음 속 한켠으로는 녀석 안에 나에 대한 애증이 여전히 남아 있어 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딱, 긴장할만큼만. 아주 기분 좋을만큼의 긴장.
이왕 타지 생활 해봤고 여행도 시작해봤으니(이전의 녀석 해외 여행 경험은 전무다) 유럽도 좀 가보라고 일렀더니 안그래도 한국 돌아와서 일 좀 정리하다 겨울에는 유럽 배낭여행 가기로 했다고 한다. 사실 미국쪽이나 유럽은 물과 기름처럼 아무리 섞어놔도 서로 다른게 확연히 보니까, 아마 여행의 느낌도 확연이 다를 것이다.
이번에 녀석을 만나면 와인을 과하게 마시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