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영문학의 숨은 공로자를 ‘그대로 못두죠’
[헤럴드 생생뉴스 2006-04-25 08:32]

‘지하철 정거장에서’로 유명한 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유능한 편집자이기도 했다. 그가 무명시절의 제임스 조이스를 발굴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율리시스’를 만날 수 없을 거다. ‘황무지’의 엘리어트도 에즈라 파운드와 함께 작업했다. 에즈라 파운드의 삶 속에 당시 문학가들의 동향이 흐른다. 출판사 ‘열린책들’이 출판 편집 총서 세번째 책으로 내놓은 ‘그대로 두기’는 20세기 영국 출판계 최고의 편집자 다이애나 애실의 자서전이다. 애실이 출판 편집자로 활동한 반세기의 삶 곳곳에는 당시 손꼽히는 영미권 작가들의 예술과 인생이 그대로 박혀있다. 에즈라 파운드처럼. 게다가 당시 지성들의 성격도 살짝 공개된다.

‘달려라 토끼’의 저자 존 업다이크의 대부분 저작이 애실의 손을 거쳤다. 애실은 업다이크를 “절대 스타 행세를 하지 않았고 한 번도 우울해 한 적이 없는 완벽한 저자”라고 소개한다. 필립 로스의 처녀작이자 대표작 ‘콜럼버스여 안녕’도 애실과 합작품이다. 초기작 두 권을 내고 애실의 안드레 도이치 출판사를 떠나긴 했지만.

노먼 메일러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소개했다. 메일러의 첫 작품인 전쟁소설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는 런던의 유명 출판사 여섯 군데에서 퇴짜 맞고 애실에게까지 흘러왔다. 소설은 탁월했으나 문제는 작품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속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의 분위기는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완고한 문학담당 기자는 출간 반대 기사를 1면에 쓰고 법무장관은 출간 금지를 고려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다행히 장관이 출간을 허가해 애실과 출판사는 노먼 메일러의 이후 작품을 독점하는 성과를 거뒀다.

책 제목 ‘그대로 두기’는 편집자가 교정지에서 삭제하려 했다 되살리고 싶은 부분을 표시하는 용어다. 저자는 “축적한 경험의 일부를 고스란히 되살리려는, 즉 ‘그대로 두기’ 하려는 목적”이라고 자서전 출판의 이유를 밝혔다. 애실이 활동했을 당시엔 유명했으나 지금은 잊혀진 작가들,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지 않은 작가들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아 일반 독자에게는 이 책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전후 50년간 영미권 문학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일독할 만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다이애나 애실의 ‘50년 편집자 인생’은 넓고도 깊다.

이고운 기자(ccat@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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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4-25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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