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지진 만큼 강렬한 이별의 방식
[국민일보 2006-04-02 15:56]

오로지 육체적 열정만 남은 연인이라면 지진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본 열도로의 여행을 자제해야 될지도 모른다. 지축을 흔드는 미진이 두 사람의 들뜬 열기 사이를 파고들어 돌이킬 길 없는 균열을 만들어낼 수 있으므로.

1985년 첫 소설 '욕조'로 일약 세계적 작가로 떠오른 후기 누보로망의 기수 장 필립 투생(49). 그가 10년간의 침묵을 깨고 펴낸 '사랑하기'(현대문학)는 지진과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 갈라지는 사건을 병립시켜 두 균열이 서로 공명하고 증폭되는 과정을 그린 사랑의 심리극이다.

소설 무대는 도쿄. 패션 디자이너인 마리와 애인인 나는 패션쇼를 위해 일본으로 간다. 마리는 내게 묻는다. "왜 내게 키스하지 않는거죠?" 나는 혼란스럽다. 나는 마리에게 키스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물론 키스하겠다는 말도 한 적이 없다.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누군들 처음으로 입술이 부드럽게 스치는 이 순간을 뒤로 늦추고 첫 키스 이전의 감미로운 순간을 마냥 연장하고 싶지 않겠는가?" 이 독백에서 알 수 있듯 나는 입술과 입술이 닿기 직전,육체를 뛰어넘는 어떤 성찰의 진가를 알고 있는 형이상학적 낭만주의자다. 그러나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경미한 지진이 일었고 나는 직감적으로 이 지진이 마리와의 사랑을 어긋내버릴 거라고 예감한다. "엘리베이터 안도 텅 비어 있었는데,우리는 투명한 상자 안에 나란히 서서 침묵을 지켰으며 울음을 그치지 않는 마리는 검은 가죽 코트와 털 스웨터를 한쪽 팔에 든 채,혹시 우리 심장 박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세한 지진이 끝난 뒤 천천히 부동자세를 취하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는 한밤중에 팩스가 왔다는 연락을 받고 호텔 프런트 데스크로 내려갔다가 담당자가 없어 바람을 쐬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간다. 나는 도쿄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꼭 원시 자연같다고 생각한다. 다시 데스크로 내려간 나는 팩스를 찾아 읽고 있는 마리와 마주친 뒤 함께 도쿄의 밤거리를 활보한다. 두 사람 사이의 불길한 징후를 증명하듯 택시기사로부터 승차 거부를 당하고 서로 다투는 순간,다시 지진이 일어난다. 대피 장소로 피신한 마리는 지진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육체의 합일에서 찾으려는 듯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접근시키며 흐느낀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마음의 충동,내 손과 내 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싼 내 팔,육체와 육체가 맞닿은 데에서 비롯되는 충동이었다. 내가 몰랐을까,그런 것을? 그러나 내가 그 순간 그녀에게 얼마나 키스하고 싶었는지는 하느님도 아실 테고 처음 키스했을 때보다 영원히 헤어지는 그 순간에 더욱더 키스를 하고 싶었다."

투생이 일본에 장기 체류했던 기억을 되살려 쓴 이 작품은 육체적 충동과 욕망의 변주곡으로 산화되고 마는 사랑의 심리를 미시적으로 포착함으로써 미니멀리즘 미학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았다.

 

 

 

 

 

정철훈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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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4-03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쩐지. 이 작가,, 일본에서 장기 체류했었구나. 지진과 사랑 그리고 이별의 병립이라.. 흥미롭다. 보관함에~

해적오리 2006-04-03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관함에 일단..

이리스 2006-04-03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나리님 / ^.^

비로그인 2006-04-03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욕조'라는 소설을 정말 십 년 전에 읽었었는데 그 뒤로 정말 아무 것도 쓰지 않았군요. 저는 혹여나 작가가 무언가 썼지만 한국에는 들어오지 않은 줄 알았더랬습니다. 지금 읽는 책들을 다 읽으면, 읽어야 겠어요. 이 작가의 책이라면 100퍼센트 보장합니다.

이리스 2006-04-03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드님 / 아, 그렇군요. 그러면 보관함에 있을 기간을 줄여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