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중 내가 가장 '나'에 가까운 시간은 아무래도 욕조안에 있을 때가 아닐까 싶다. 물을 받는 동안 방안을 어슬렁거리며 30분 가량의 독서에 적합한 책을 골라든다. 그리고 음료수 혹은 와인을 준비해서 샤워 가운만 걸친채 욕실 문을 여는 그 순간 기분 좋은 설레임에 휩싸인다.
책을 읽다가 가끔은 생각에 빠진다. 그건 책의 내용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고 아닌 것이기도 하다. 이럴땐 녹음기가 필요한건가 싶게 생각한 걸 남겨놓고 싶다가도 그 순간의 흥을 깨기 싫어 몸은 놀리지 않고 순전히 머리속과 마음만 분주하게 내버려 둔다. 그 편이 자연스럽다.
욕실의 크기에 비해 과도하게 큰 거울에 묻은 얼룩들을 보며 저걸 다 닦아내야지 생각하다가 문득 닦아내는 것의 순서를 놓고 보면 먼저 닦아야 할 건 저 거울이 아니라 다른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삶의 얼룩이 너무 오래도록 방치되어 이제는 마치 얼룩이 외투라도 된 것 같은데 그걸 닦을 생각은 안하고 욕실 거울에 묻은 작고 희미한 얼룩이나 신경을 쓴다.
안다. 닦아내기 시작하기로 마음 먹으면 얼룩 아래 피부가 벌건 생살을 드러내고 있을것 같은 두려움이 먹구름처럼 밀려온다는 것을. 어쩌면 사실 얼룩이 그대로 눌러붙어서 이제는 그것이 내 일부처럼 여겨져 구태여 닦아내야 하는가 싶어 그런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닦는다고 지워지리란 보장도 없으니 포기해버리자는 생각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전에는 돈으로 해결하지 않았던 부분을 돈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경우에 직면하곤 한다. 그건 주름살이 늘거나 흰머리가 나는 육체를 보며 느끼는 생경함이나 서글픔과는 다른, 치명적이고 치욕적인 감정이다.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각질들이 배수구를 타고 사라지고, 나는 욕조에 그 잔여물이 혹여 남았을까 싶어 수압을 세게 해놓고 샤워기를 욕조 곳곳에 대고 문질러 댄다. 生의 각질을 제거하는 일도 이처럼 단순하고 명료하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그것이 이처럼 반복적인 행위라 하더라도 푸념할 일이 없을텐데. 그러나 生의 각질은 생살과 구별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각질대신 생살이 떨어져 나가는 끔찍한 일도 생기기 때문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철수세미로 문질러 하얗게 되겠다는 꿈을 가진 검은 피부도 아니거늘, 보드라운 스펀지로 살살 문질러 보는 일 조차도 왜 이렇게 주저하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이만 먹은게 아니라 겁도 그 만큼 먹어서 좀처럼 움직여볼 낌새도 안 보인다. 가엾구나.
내 몸에 난 흉터를 가만히 보다가 손으로 만져본다. 이 흉터가 생기고 나서 꼭 10년이 지났다. 몸에 난 흉터는 이제 더 이상 나를 아릿하게 하지 않는다. 이 흉터는 문신 같은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아릿함은 사라졌지만 기억만은 또렷하게 남아있다.
또, 일요일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