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좋아하는 창비시선 26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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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깊이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中>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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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01-14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늦은 사랑


김사인


내 하늘 한켠에 오래 머물다
새 하나
떠난다

힘없이 구부려 모았을
붉은 발가락들
흰 이마

세상 떠난 이가 남기고 간
단정한 글씨 같다

하늘이 휑뎅그렁 비었구나

뒤축 무너진 헌 구두나 끌고
나는 또 쓸데없이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늙어가겠지

이리스 2008-01-14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여기 헌구두가 나오네요. ^^;;

다락방 2008-01-14 23:16   좋아요 0 | URL
네. 헌구두를 진하게 표시할까 하다가, 그러지 않아도 알아차리시겠지 싶어 그냥 두었는데요. 헤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