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나도 알 수 없는 일이야. 나오코도 모를 거야. 그건 두 사람이 앞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결정할 일이 아닐까 싶어. 그렇잖아? 설령 무슨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지. 서로를 잘 이해한다면. 그 일이 옳은지 아닌지는 그다음에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 P204

나는 거의 얼굴도 들지 않고 하루하루를 흘려보낼 따름이었다. 내 눈에 비친 것은 무한히 이어지는 수렁뿐이었다. 오른발을 내딛고 왼발을 들어 올리고 다시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확신도 없었다. 다만 어디로든 가지 않을 수 없으니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따름이었다. - P461

만약에 반대로 미도리가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어딘가로 이사를 가 버린 채 삼 주나 연락하지 않았더라면 난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나는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것도 꽤 깊은 상처를. 왜냐하면 우리는 연인은 아니었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그 이상으로 친밀하게 서로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그것도 소중한 상대의 마음에 모르는 새 상처를 주었다니,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 P473

"인생이란 비스킷 깡통이라 생각하면 돼."
나는 몇 번 고개를 젓고 미도리 얼굴을 보았다. "내 머리가 나쁘기 때문일 테지만, 때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갈 때가 있어."
"비스킷 깡통에는 여러 종류 비스킷이 있는데 좋아하는 것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먹어 치우면 나중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는 거야. 나는 괴로운 일이 있으면 늘 그런 생각을 해. 지금 이걸 해 두면 나중에는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깡통이라고."
"그거 철학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정말이야. 나는 경험적으로 배웠어." 미도리는 말했다. - P488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해서는 안 돼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고, 그 애정이 성실하다면 누구도 미궁 속에 버려지지 않아요. 자신감을 가져요.
내 충고는 아주 간단해요. 먼저, 당신이 미도리라는 사람에게 강하게 이끌린다면,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거예요. 그 사랑이 순조롭게 잘 이루어질지 아니면 잘 이루어지지 않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에요. 사랑이란 원래가 그런 거니까. 사랑에 빠지면 거기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죠. 난 그렇게 생각해요. 그것도 성실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까 해요. - P520

날씨 좋은 날 노를 저어 호수로 나아가 하늘도 푸르고 호수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고뇌하지 마요. 가만 내버려 두어도 흘러가야 할 곳으로 자연스럽게 흐러갈 것이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야 할 때는 상처를 주게 되는 법이니. 좀 잘난 체를 할게요. 와타나베도 인생의 그런 모습을 이제 슬슬 배울 때가 되었어요. 당신은 때로 인생을 너무 자기 방식에만 맞추려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정신 병원에 들어가는 게 싫다면 마음을 조금 열고 그냥 흐름에 몸을 맡겨요. 나처럼 무력하고 불완전한 여자도 때로는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멋진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거든요. 정말이에요, 이거! 그러니 더 많이많이 행복해져요.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요.
물론 나는 당신과 나오코가 해피 엔딩을 맞지 못했다는 게 애석해요. 그러나 뭐가 옳은지 그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그 누구의 눈길도 의식하지 말고, 이러면 행복해질 것 같다 싶으면 그 기회를 잡고 행복해져요. 경험적으로 볼 때 그런 기회란 인생에 두 번 아니면 세 번밖에 없고, 그것을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돼요. - P522

그것은 분명 진실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키워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는 오로지 홀로 그 밤의 파도 소리를 듣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루하루 그것만 붙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위스키 몇 병을 비우고 빵을 씹고 수통의 물을 마시고 머리카락에 모래를 묻히며 배낭을 맨 채 초가을 해안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었다. - P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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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란, 외롭지 않았던 적이 있는 자만이 두려워하는 감정이라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 P52

펀칭볼은 승민의 눈높이에 있었다. 눈앞에 있었다. 크기는 어린애 머리만 했다. 나는 펀칭볼의 의미를 해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해석하지 않는다고 의미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달력을 보지 않아도 세월은 간다. 그 새삼스러운 진리를 승민이 일깨워주었다. - P225

난 꼭지가 돌아버렸어. 꺼지라고 밀쳐내고, 세상을 다 태워버리고 나도 타버릴 거라고 악을 썼어.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이렇게 될 거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내게 하늘을 나는 법을 가르쳐줬느냐고, 차라리 몰랐으면 좋지 않았느냐고 울부짖었어. 그러긴 했지만 사실은 잘 알고 있었어. 대장이 내게 비행을 가르친 이유가 뭔지. 세상에는 불놀이보다 더 근사한 일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거야. 어떻게든 실명 시기를 늦춰주고 싶었을 거야. 그래서 도시락 통을 들고 코렐을 잡으러 다녔을 거야. 자기랑 피 한 방울 안 섞인 놈을 위해서. - P285

불쑥 불편한 마음이 앞에 나섰다. 벼랑 끝에 몰린 주제에 존재 운운하는 허풍쟁이가 아니꼬워서. 허풍쟁이를 아니꼬워하는 내가 초라해서.
"난 잘 모르겠다. 너로 존재하는 순간이 남은 인생과 맞바꿀 만큼 대단한 건지."
"넌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삶은? 죽음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숨을 아끼라는 충고 한번 했다고 해서 인류가 수천 년을 고민해온 거창한 두통거리에 대한 해답을 요구하다니. 그것도 한꺼번에 세 가지나.
"난 순간과 인생을 맞바꾸려는 게 아냐. 내 시간 속에 나로 존재하는 것, 그게 나한테는 삶이야. 나는 살고 싶어. 살고 싶어서, 죽는 게 무서워서, 살려고 애쓰고 있어. 그뿐이야." - P286

우울한 세탁부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물었다.
"그런데 미스 리 선생님은 왜 안 가?"
나? 어리둥절했다. 당황스러웠다. 이 남자는 왜 내가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나로선 그런 일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내겐 도망쳐서 도달해야 할 만큼 절실한 세상이 없었다.
"나한테 공부도 가르쳐주고, 승민이 탈출하는 거 도와주다 번번이 궁지에 몰리면서, 자기한테는 왜 아무것도 안 해?"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웃으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무안했다.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오지랖만 넓은 놈이라고 하는 것 같아서.
"나 미스 리 선생님 좋아해. 정말로. 주제넘은 말이지만 선생님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짠하고. 그러면서도 참 이상스러웠어. 이런 사람이 이런 데서 왜 이러고 사나. 그래서 원주에 시험 치러 갈 때 최기훈 선생한테 물어봤어. 미스 리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병이냐고. 도망치는 병이라고 그러대. 그땐 최 선생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 그저 무식한 놈 소견으로 그러고 말았지. 자꾸 병원에서 도망쳐서 아버지가 이 산골짝에 가둔 거구나. 내가 거꾸로 생각했다는 걸, 이제 확실히 알겠어."
우울한 세탁부의 다음 말은 통렬하게 가슴을 찔렀다.
"세상에서 도망치는 병이야. 자기한테서도 도망치는 병이고. 그렇지?" - P290

"종일 창가에 서서 무슨 생각을 하세요?"라고 묻는 간호대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로뎀 병원에서였다. 내 옆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대신 대답했다.
"꿈을 꿔요. 창문은 통로죠. 희망은 아편이고요."
해석하면 이런 말이었다.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퇴원을 꿈꾸고, 퇴원하는 날부터 퇴원을 꿈꿀 수 있는 병원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사람들이 병원 규칙에 열심히 순응하는 것은 퇴원, 혹은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갈망의 궁극에는 삶의 복원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를 얻어 세상에 돌아가면 희망 대신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세상 속에서 이룰 것이 없다는 진실. 그리하여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꿈꾸던 희망이 세상 속 진실보다 달콤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기억의 땅으로 남을 뿐이다. 옛날, 옛날, 내가 한때 그쪽에 살았을 때 일인데.......
나도 그 허망한 악순환을 수없이 거듭해왔다. 그 사이 저쪽과 이쪽을 연결하던 다리는 너덜너덜하게 닳아 외줄이 돼 있었다. 그걸 딛고 다시 저쪽으로 건너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대로 죽을 때까지 이쪽에서 지내는 것도 싫었다. 그저 벼랑 끝에서 닳아빠진 외줄을 만지작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 놔버릴 미래의 어느 날을 두려워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누가 그랬던가. 물에 빠진 자의 눈에는 일생이 지나간다고. 우울한 세탁부는 나를 물에 빠뜨렸다. 스물다섯 해가 눈앞을 지나갔다. 기억들이 끝없이 흘러가고 되돌아왔다. 세월 저편에서 건너온 소년이 뜻 모를 말을 되풀이했다.
"내 탓이 아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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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를,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산다는 그런 상실감이 없다면, 명상이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꼭 찾아야만 한다는 절박감, 바로 그것이 내가 사는 이유라는 그런 절박감이 없다면, 명상이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느 순간엔가 그 잃어버린 것을 내가 다시 되찾게 되리라는 믿음, 그래서 내 삶이 부끄럽지 않게 되리라는 그런 희망이 없다면, 명상이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1)

1) 명상의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은 불교가 깨달음의 세 조건으로 드는 마음가짐, 즉 大疑心, 大憤心, 大信心과 다를 바가 없다. 내가 뭔가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내 모든 이 근본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그런 마음이 대의심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나의 무지가 운명으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게 끝없는 절망이고 분노이어야 한다. 석가는 진리를 깨달아 해탈하였는데,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다‘라고 말했는데, 왜 나는 아니란 말인가? 도대체 순임금은 누구이고, 나는 누구란 말인가? 이것이 대분심이다. 그러면서 그것이 좌절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명상의 길로 나아갈 수있기 위해서는 나도 노력하면 궁극적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있으리라는 믿음, 진리는 구하는 자에게는 감추어져 있지 않으리라는 그런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대신심이다. 성인의 말씀을 진리로 받들어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도 성인처럼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깨달아 알지 못하는 한 의심할 수밖에 없지만, 노력하고 노력하면 언젠간 알게 되리라는 믿음, 의심을 벗으리라는 믿음을 갖는것이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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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명은 연예계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한국인이면 일상의 현상으로 시민권을 얻었다. 신문 기사만이 아니다. 학계에서는 벌써 그 역사를 따지는 연구까지 하고있다. 태명에 관한 최초의 학술 논문으로 알려진 강희숙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처음 태명이 등장한 것은 2001년에서 2007년 사이로 추정된다.

예상대로 궁금해하던 것들이 맞춤 뉴스처럼 올라와 있는 블로그 하나가 눈에 띈다. 나는 한때 "손가락으로 검색하지 말고 머리로 사색하라"고 젊은이들을 향해 큰소리친 적 있지만 이제는 거꾸로다. "사색하려면 검색하라"다. 먼 외국에 사는 한 한국인 여성이 내가 태명에 대해 생각하지도 못한 이야기들로 나의 뇌를 발화시켰으니 말이다.

성경 주해를 보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 당시의 목자들은 양 하나하나에 이름을 지어주고 한 마리씩 불러 초원으로 인도한 모양이다. 이미 그것은 양 떼가 아니라 한 마리, 한 마리가 존재하는 양들인 게다. 그것을 모르면 왜 예수님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놓아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다고 했는지 영원히 그 이유를 모를 것이다.

관세음보살과 관음보살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세상 세 자가 빠져 있다. 당나라의 태종 이세민의 이름을 피휘해 관세음에서 세상 ‘세자를 생략, ‘관음‘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외할머니 배 속에서부터 어머니의 난소에는 훗날 내가 될 난자의 세포가 들어 있다. 외할머니의 기억이 내 몸뚱이에 새겨진다는 이야기다. 몸의 생김새만이 아니라 내 감정까지도 유전된다. 우리가 부모에게 받은 DNA 가운데 얼굴, 키, 피부색 같은 외형과 관련된 것은 겨우 2퍼센트밖에 안 된다고 한다. 지금까지 정크(쓰레기)로 불려왔던 98퍼센트가 실은 감정이나 행동 그리고 성질과 연관된 것들이라는 것이 최근 들어 밝혀졌다. 그렇게 부모와 그 부모들의 기억, 감정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만든다. 기억이 몸을 바꾸고, 몸을 통해 기억이 전해진다는 이야기다.
엘리베이터나 비행기 안과 같은 밀폐된 공간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폐쇄공포증에 걸린 여성을 치료하기 위해 가족의 이력을 캐던 중 조부모와 고모가 아우슈비츠에서 질식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트라우마 유전이 실재한다는 증거를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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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

모양이 삼각형이고 날카로운 것은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선천적으로 알고 있다는 뜻이다. 놀랍게도 뱀의 머리가 삼각형인 경우 대개 독사였다. 그림에서 뱀의 머리를 동그랗게 하고 치아도 둥글게 하면 아이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동물에 대한 무서운 경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동물 그림이나 삼각형의 이모티콘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류의 오랜 진화 경험을 통해서 유전자에 내재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고 보면 어린이 만화나 캐릭터의 주인공인 뽀로로, 곰돌이 푸는 모두 동글동글한 모양을 하고 있다.

클라라는 슈만이 죽은 1856년부터 40년 동안 슈만과 브람스의 작품을 연주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 곁에서 브람스는 클라라와 슈만의 자식들을 돌보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클라라는 브람스의 사랑을 완곡하게 거절하고 슈만의 아내로 살길 원했다. 1896년 클라라가 세상을 떠난 뒤 브람스도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슈만은 평생 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창작활동이 적었던 우울증 시기에 나왔다. 다작을 하는 시기에는 기분이 들떠 있었고 그런 기분이 작품에도 반영된 듯하다. 클라라로 인해 슈만의 감정 기복이 창의적인 영감으로 바뀌어 슈만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결국 실패에 대한 불안을 줄이려면 평소 자신의 긴장을 증가시킬 만한 문제를 일으키는 행동을 삼가는 것이 좋다.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불안이 자신의 일에도 영향을 주는데, 예민한 사람에게는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과 심한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좋고 가정 내에서도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자신이 하는 일이 모두 성공할 수는 없다. 야구 선수들도 3할이면 유명한 선수가 되고 유명 골프 선수도 실수를 한다. 성공률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수를 해도 다음에 타석에 서거나 퍼팅을 할 때 영향을 받지 않도록 마음의 훈련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사람의 표정이나 말투는 그 당시의 컨디션과 관련이 높습니다. 예를 들어 어제 잠을 못 잤거나 일이 많아서 피곤하면 사람들은 표정이 굳어지고 말투가 퉁명스러워지기도 합니다. 은경씨는 이런 사람을 만나면 그의 표정이나 말투가 자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며 ‘나를 싫어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과도하게 관심을 받으려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린 생각보다 타인에게 관심이 크지 않고 자기 자신을 더 많이 생각합니다. 내가 하는 말의 내용도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세요. 한 달만 지나면 상대방도 나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만났던 기억, 익숙해지는 느낌만 남지요.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은 앞서 말한 네 가지를 반대로 돌려놓으면 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아서 전문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핵심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데 있습니다. 일찍 자는 것과 일찍 일어나는 것 중에서는 일찍 일어나는 게 더 중요합니다. 늘 오전 7시에 일어나려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요?
새벽 2, 3시에 자도 7시에 일어나는 겁니다. 오전에 같은 시각에 일어나면 밤에 자는 시간이 빨라지고 야식 습관도 줄어듭니다. 오전 7시에 일어나면 8시부터 30분가량 햇볕을 쬐며 산책해보세요. 빛이 아침잠을 깨우고 몸에 리듬을 만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는 주로 여러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만나면 편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재미있는 관계를 만들어보는 겁니다. 그들은 나와 취미가 같을 수도 있고 같은 학교를 다니는 학생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세요. 너무 심각한 대화를 할 필요도 없고 그저 얼굴 익히고 편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인간관계가 잘 형성되면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동안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사람은 부모이고 이는 성철씨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만날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마치 상류의 모난 돌이 강을 타고 내려와 동글동글해지는 것처럼 다양한 사람의 영향으로 생각과 태도가 부드러워집니다.
부드럽고 유연한 태도를 갖게 되면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친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정말 넓고 많은 사람이 다양하게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지요.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그때가 되면 저절로 주어집니다. 내가 가진 현재의 환경에서는 답이 없더라도 수많은 사람과 연결되면서 자신에게 맞는 도전을 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 대화를 할 때 메신저로 대화한다고 생각하고 해 보면 도움이 된다. 메신저 대화가 편한 이유는 내용 이외에 비언어적 내용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내용을 전화통화로 하면 무척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더 거북한 것은 음성, 표정, 말투 등 여러 가지를 동시에 신경 써야 하기 때문이다.
매우 예민한 사람은 다른 쪽 감각을 더 발달시키는 편이 좋다. 이를테면 대화하는 사람의 상태를 배려하는 데 감각을 집중하면 좋다. 대화하는 중에 상대방의 표정이 좋지 않다면 ‘나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오늘 무슨 힘든 일이 있어서 피곤한가보다‘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숙취가 있나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뇌는 자주 쓰는 부위의 연결성이 강화되기 때문에 계속 노력하면 효과를 발휘한다. 대화할 때 그 사람의 눈치를 많이 보는 것보다는 배려하는 자세를 취하면 예민성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민한 사람은 불편한 이들을 꺼리기 때문에 흔히 대인관계가 협소하다. 하지만 고립되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사람을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만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만남을 가짐으로써 우리 몸이 너무 예민해져 이상이 생기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베일런트가 이야기한 건강한 노화를 예견하는 일곱 가지 주요한 행복의 조건 가운데 성숙한 방어기제, 교육,
안정된 결혼생활, 금연, 금주, 운동, 알맞은 체중이 예민한 사람에게는 더 중요하다. 예민한 사람은 자기애적 방어기제나 미성숙한 방어기제, 신경증적 방어기제를 자신도 모르게 사용해서 대인관계와 가족관계에 문제를 일으키고 또 다시 예민한 상황에 처하는 악순환을 겪기 쉽다.
베일런트에 의하면 50대 이후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47세 무렵까지 만들어 놓은 인간관계라고 했다. 우리에게 일어났던 과거의 불행한 일들이 우리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노력을 통해서 미래를 바꿔나갈 수 있다.
내가 어떤 방어기제를 자주 쓰고 있는지 잘 생각해보자. 예민한 사람은 자기 주변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통제‘하며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지 않은 채 남 탓을 하면서 ‘합리화‘하곤 한다. 불안할 때마다 배우자와 아이들에게 화를 내기도 하는 ‘전치‘를 하고 불안한 이유를 잘 생각하지 못한 채 ‘억압‘하는 일이 많다.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혼자 지내면서 자신의 문제를 ‘고립‘시켜 누구나 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편안하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숙한 방어기제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모든 것을 자신이 다 조절할 수 없고 각자 스스로 하도록 자율성을 주고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고 바꾸고 변화하려 애써야 한다. 화가 나는 것이 다른 사람의 탓보다는 자신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내면을 점검하며 직접적으로 부딪치지 않는 여유와 유머를 가져야 한다.
혼자 지내기보다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예민성을 승화시켜야 한다. 자신의 예민성을 관리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실천에 옮겨보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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