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이란, 외롭지 않았던 적이 있는 자만이 두려워하는 감정이라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 P52

펀칭볼은 승민의 눈높이에 있었다. 눈앞에 있었다. 크기는 어린애 머리만 했다. 나는 펀칭볼의 의미를 해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해석하지 않는다고 의미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달력을 보지 않아도 세월은 간다. 그 새삼스러운 진리를 승민이 일깨워주었다. - P225

난 꼭지가 돌아버렸어. 꺼지라고 밀쳐내고, 세상을 다 태워버리고 나도 타버릴 거라고 악을 썼어.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이렇게 될 거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내게 하늘을 나는 법을 가르쳐줬느냐고, 차라리 몰랐으면 좋지 않았느냐고 울부짖었어. 그러긴 했지만 사실은 잘 알고 있었어. 대장이 내게 비행을 가르친 이유가 뭔지. 세상에는 불놀이보다 더 근사한 일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거야. 어떻게든 실명 시기를 늦춰주고 싶었을 거야. 그래서 도시락 통을 들고 코렐을 잡으러 다녔을 거야. 자기랑 피 한 방울 안 섞인 놈을 위해서. - P285

불쑥 불편한 마음이 앞에 나섰다. 벼랑 끝에 몰린 주제에 존재 운운하는 허풍쟁이가 아니꼬워서. 허풍쟁이를 아니꼬워하는 내가 초라해서.
"난 잘 모르겠다. 너로 존재하는 순간이 남은 인생과 맞바꿀 만큼 대단한 건지."
"넌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삶은? 죽음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숨을 아끼라는 충고 한번 했다고 해서 인류가 수천 년을 고민해온 거창한 두통거리에 대한 해답을 요구하다니. 그것도 한꺼번에 세 가지나.
"난 순간과 인생을 맞바꾸려는 게 아냐. 내 시간 속에 나로 존재하는 것, 그게 나한테는 삶이야. 나는 살고 싶어. 살고 싶어서, 죽는 게 무서워서, 살려고 애쓰고 있어. 그뿐이야." - P286

우울한 세탁부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물었다.
"그런데 미스 리 선생님은 왜 안 가?"
나? 어리둥절했다. 당황스러웠다. 이 남자는 왜 내가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나로선 그런 일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내겐 도망쳐서 도달해야 할 만큼 절실한 세상이 없었다.
"나한테 공부도 가르쳐주고, 승민이 탈출하는 거 도와주다 번번이 궁지에 몰리면서, 자기한테는 왜 아무것도 안 해?"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웃으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무안했다.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오지랖만 넓은 놈이라고 하는 것 같아서.
"나 미스 리 선생님 좋아해. 정말로. 주제넘은 말이지만 선생님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짠하고. 그러면서도 참 이상스러웠어. 이런 사람이 이런 데서 왜 이러고 사나. 그래서 원주에 시험 치러 갈 때 최기훈 선생한테 물어봤어. 미스 리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병이냐고. 도망치는 병이라고 그러대. 그땐 최 선생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 그저 무식한 놈 소견으로 그러고 말았지. 자꾸 병원에서 도망쳐서 아버지가 이 산골짝에 가둔 거구나. 내가 거꾸로 생각했다는 걸, 이제 확실히 알겠어."
우울한 세탁부의 다음 말은 통렬하게 가슴을 찔렀다.
"세상에서 도망치는 병이야. 자기한테서도 도망치는 병이고. 그렇지?" - P290

"종일 창가에 서서 무슨 생각을 하세요?"라고 묻는 간호대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로뎀 병원에서였다. 내 옆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대신 대답했다.
"꿈을 꿔요. 창문은 통로죠. 희망은 아편이고요."
해석하면 이런 말이었다.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퇴원을 꿈꾸고, 퇴원하는 날부터 퇴원을 꿈꿀 수 있는 병원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사람들이 병원 규칙에 열심히 순응하는 것은 퇴원, 혹은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갈망의 궁극에는 삶의 복원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를 얻어 세상에 돌아가면 희망 대신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세상 속에서 이룰 것이 없다는 진실. 그리하여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꿈꾸던 희망이 세상 속 진실보다 달콤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기억의 땅으로 남을 뿐이다. 옛날, 옛날, 내가 한때 그쪽에 살았을 때 일인데.......
나도 그 허망한 악순환을 수없이 거듭해왔다. 그 사이 저쪽과 이쪽을 연결하던 다리는 너덜너덜하게 닳아 외줄이 돼 있었다. 그걸 딛고 다시 저쪽으로 건너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대로 죽을 때까지 이쪽에서 지내는 것도 싫었다. 그저 벼랑 끝에서 닳아빠진 외줄을 만지작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 놔버릴 미래의 어느 날을 두려워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누가 그랬던가. 물에 빠진 자의 눈에는 일생이 지나간다고. 우울한 세탁부는 나를 물에 빠뜨렸다. 스물다섯 해가 눈앞을 지나갔다. 기억들이 끝없이 흘러가고 되돌아왔다. 세월 저편에서 건너온 소년이 뜻 모를 말을 되풀이했다.
"내 탓이 아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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