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시간을 내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걸 보면 이 부유한 청년 실업가는 나쁜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 P106

레온의 인생에는, 아니 자신의 인생에 대한 그의 이야기 속에는 비열한 사람도 없었고, 음모를 꾸미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배신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적어도 한 가지씩은 좋은 면을 가지고 있다는 레온의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그것이 모든 인간이 존재한다는 경이로운 사실의 이유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는 친구들이 했던 재미있는 농담을 기억해내어 들려주곤 했다. 레온이 하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서 너그러워지곤 했다. 레온에게는 모든 사람이 적어도 ‘좋은 사람‘이거나 ‘괜찮은 친구‘였고, 겉과 속이 다르다고 비판받는 사람은 없었따. 어느 한 친구가 속을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거나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느껴지면 레온은 시간을 두고 그 친구를 지켜보며 오래 생각한 끝에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마땅한 이유를 찾아내곤 했다. 문학과 정치, 과학과 종교가 지루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세계에는 이런 것들이 차지할 자리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심각하게 논쟁을 벌이는 주제라 해도 그의 세계에는 발을 붙이지 못했다. 그는 법학을 전공했지만 그 학문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외롭거나 지루해하거나 풀이 죽어 있는 그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의 침착함은 욕심 없는 마음과 더불어 그 끝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고, 그는 사람들이 다 자기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의 온화함은 용인할 수 있는 정도일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위로해주기까지 했다. - P155

바로 이거야. 기쁨에 가까운 느낌을 갖게 된 건 자기 내면의 힘 덕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결국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 밖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무심코 하는 말과 행동이 우리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가르쳐 주기도 한다. - P170

심지어 계속해서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 역시 관심이 있어야 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치밀하게 거짓말을 했다면, 그는 그녀에게 상당히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거짓말은 그들의 결혼생활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증거였다. - P214

푸대접받던 아이는 이제 푸대접받는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에밀리는 그렇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내성이 생긴 덕분이다. - P214

그녀는 가족들과 의절했다고 했다. 부모님과 오빠, 여동생과는 다시는 만나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 P289

레온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아무하고나 어울리는 줏대없는 바보였어. - P296

브리오니는 그의 무죄 입증을 도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비쳐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그애 자신을 위한 것이었으며, 양심상 도저히 견디기 어려워지자 자신의 범죄에 대해 면죄부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그가 고마워해야 할까? - P322

그러나 그가 눈치채지 못한 어떤 신호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브리오니는 삼 년 동안 그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비밀스레 키워오면서 환상이라는 자양분을 주고, 상상을 통해 아름답게 꾸며온 것이 분명했다. 자기 생각 속에 빠져 사는 애였으니까. 그러므로 그때 강가에서의 그 한 장면이 삼 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애를 지탱해준 것이 분명했다. - P328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편지는 그녀의 아픈 곳을 찌르고 있었다. 소녀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에게 끔찍한 불행을 가져다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 정말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그녀는 보잘것없는 글재주로 하찮은 소설 하나 써냄으로써 그 사실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 소설을 잡지사에 보냄으로써 허영심을 만족시키려 했던 것 아닐까? 빛과 돌과 물에 대한 장황한 묘사, 세 명의 관점으로 나뉜 서술방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끝없이 계속되는 고요, 그 어떤 것도 그녀의 비겁함을 숨길 수는 없다. 그녀는 정말로 남을 모방한 소위 현대적 글쓰기 양식 뒤에 숨어서 의식의 흐름ㅡ그것도 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ㅡ속에 죄책감을 익사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의 소설에 없는 것은 그녀의 삶에도 없었다. 그녀가 삶에서 정면으로 부딪치기 싫어했던 것은 소설에서도 빠져 있었다. 진정한 소설이 되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소설의 척추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척추, 인생의 척추였다. - P448

사람들은 그가 사회에 좋은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며 그의 공적을 칭찬해주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평생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건지도 모른다. 별다른 생각 없이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왔을지도 모르지만. - P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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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를 돌보는 시간 없이 늘 다른 사람만 챙기는 일상이 반복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마음챙김 강사 샤론 샐즈버그는 자기돌봄이나 자기 자비의 필요성은 망각한 채 다른 사람에게만 지나치게 관대할 경우 우리 마음속에 분노와 억울한 감정이 쌓인다고 지적한다. 샤론은 타인에 대한 관대함의 목적과 의도를 잘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화가 나는 감정을 품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건 진정한 관용이 아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주기만 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돌보며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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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11-20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을 아끼고 사랑합시다.^^

베텔게우스 2021-11-20 13:58   좋아요 0 | URL
마음챙김 명상이 늘 자기 자비와 자기 연민을 강조하는데, 너무 빨리 변하고 쉽게 지치게 하는 세상에서 꼭 필요한 자세인 것 같습니다..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 밀레니얼 세대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정지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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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릴 문장이 거의 없다.


 세상은 어느덧 선의를 주고받는 공간보다는 선의를 돈으로 구매하는 곳이 되었다. 그렇기에 ‘선의 상실‘이라는 말이 그토록 내 머릿속을 따라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타인의 순수한 선의를 믿을 수 없는 세계에 산다. 모든 선의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나 계산이 있을 거라 어렵지 않게 짐작한다. 결국 ‘더 큰 이익‘을 위해 행하는 ‘계산적 선의‘라는 자본주의적 논리를 벗어난 선의를 좀처럼 상상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이발비를 지불하고 여느 때처럼 선 의상실 앞을 지나다, 문득 내가 삶 전체를 통해서 진실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순수한 선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근본적으로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집요하게 묻다보면 그 종착지에는 어떤 종류의 ‘행복‘이 있다. 그 행복은 타인들을 지배하는 것도, 타인들로부터 찬사를 얻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타인들과 순수한 선의를 주고받는 어떤 미래, 그런 선의로 가득한 삶을 꿈꾸며 사는 건 아닐까? 진심을 다해 누군가에게 선의를 전하고, 또 그로부터 선의를 받는 것으로 가득한 세상이야말로 유토피아가 아닐까? 나아가 사랑에서 늘 하는 고민 역시 이 사람이 정말로 순수한 선의로 나를 대하는지를 알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저 순수한 선의를 주고받는 삶이란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 P237

늘상 보던 거리가 어느 순간 낯설게 보였던 것은 나 역시 한 명의 젊은이로서 익숙하게 된 그런 삶의 방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부지런히 다녔던 거리 어디에도 나의 역사는 머물 곳이 없다. 이 낯선 도시에 내가 새겨진 곳은 그나마 내가 몸담았던 누추하고 허름한 골목들이다. 나는 복고지향적 감수성을 가진 사람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처럼 늘 새롭고 세련된 것에 매혹되는 소비사회의 현대인이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되돌아보는 삶에서, 종종 마주하는 기억들에서, 자주 내가 삶에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무엇이 내 삶을 내 삶이게 하고 나를 나이게 하는지 이해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해답이나 진리를 알 리 없지만, 그 단서가 내가 잃어가는 것들이나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에 새겨져 있을 거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 P243

 늘 바라는 게 있었다면 삶을 정확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을 정확하게 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많은 순간들이 무엇을 보는지도 모른 채, 무엇을 위하는지도 모른 채 흘러간다. 나는 내가 사는 거리를, 또한 내가 살게 될 거리를 보다 정확하게 응시하며 나아가고 싶다. 이 거리에 무엇이 있고, 또 앞으로의 거리에 무엇이 있을지를 알고 싶다.이곳이든 저곳이든 내가 있는 곳에서 보는 것이 그저 화려하고 달콤한 이미지만은 아니기를 바란다. 오히려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그러나 우리 삶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깊고 오래된 선의를 보고 싶다. 흩어지거나 사라지지도, 소비되거나 소모되지도 않는 삶의 선의를 말이다. - P244

세상에 사람은 넘쳐난다. 그 모든 이들이 관심과 사랑, 선의를 갈구한다. 그들은 일말의 인정과 사랑을 얻고자, 삶을 지탱하게 해줄 선의를 붙잡고자 분투한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자 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만들고자 한다. 삶이란 때론 한없이 복잡한 듯하지만 어떻게 보면 한없이 단순하다. 사람들은 그저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하기 위해, 그로부터 한 줌의 행복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간다. 삶이 복잡해지는 건 단지 지금 내 곁에 그 한 줌의 선의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랑조차 손해와 이익의 계산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계산이란 당최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일까? 선의 대신 계산이 자리 잡은 삶, 그러한 사회가 정말로 더 행복한 삶이고 더 발전된 사회일까? - P247

진실이란 단순하다. 삶의 정답이라는 것도 그리 어려운 게 아닐 수 있다. 우리는 그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강물 같은 선의를 서로에게 보낼 수 없어서, 그토록 단순한 삶을 살 수 없어서 인생에 복잡한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행복의 조건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많아진다. 땅바닥을 지나가는 개미 행렬이나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화지 한 장, 슈퍼마켓에서 파는 아이스크림 하나면 행복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을 뒤로하고, 온갖 부가적인 결핍들이 더해진다. 내가 속한 공간이 불만스럽고, 소비하지 못한 것이 아쉽고, 미디어에서 비추는 각종 화려한 이미지들이 쉴 새 없이 나를 괴롭힌다. 우리의 삶은 무언가를 이루어가고 쌓아가는 과정 같지만, 실은 더 많은 결핍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그 결핍의 홍수 속에서, 누가 더 자신을 가까스로 유지하는가 하는 경쟁이다. - P248

정신없이 삶을 살아가다보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을 얻으려 이렇게 발버둥치는지 의아할 때가 있다. 다들 열심히 머리를 굴려 인생을 고민한다지만, 사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는 일일 것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그저 지금 나 자신에 대한,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선의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극복해야 할 것은 선의를 미루고 있는 현재일 뿐이다. 나를 채우는 온갖 변명거리를, 악마의 속삭임 같은 언어의 함정을, 복잡한 논리를 만드는 데 열중하는 관념을 극복하고 마음을 앞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 P249

한 사회에 만연한 ‘감정‘은 그 사회의 내적인 문제들을 드러내는 징후다. 우리 사회를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감정적 표현 중 단연 ‘분노‘가 으뜸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내부가 균열되고 왜곡되어 더 이상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어졌음을 의미한다. 도지어 주니어의 《나는 왜 너를 미워하는가 Why We Hate》에 따르면,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분노는 "생존과 번식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한 공격 또는 도피를 나타내는 원초적인 감정"이다. 우리는 삶의 한계상황이나 위기상황에서 분노를 느낀다.
우리를 둘러싼 삶의 조건들, 즉 사회환경이 우리를 온전히 지탱해줄 수 없다고 느낄 때 분노는 만연해진다. 원초적 본능으로서 분노는 우리 내부의 균열 속에서 나타난다. 진화심리학적 전제에서 생존과 생존에 대한 위협은 가장 큰 대립 요소이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내면에서 발생할 때 우리는 분노를 느낀다. 이러한 동물적 본능은 현대사회에 이르러 정신 내부의 분열로 이어지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당위‘와 ‘사실‘의 분열이다. 친구가 약속을 어겼을 때, 연인이 나를 배신했을 때, 내가 원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 내면은 당위와 사실의 균열에 처하게 된다. 실현되어야만 한다고 믿는 관념이 그렇지 않은 현실 속에서 표류하며 분노를 일으킨다. 부정당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정신이 무너지며 발생하는 253 것이 분노다.
이러한 분노는 크게 세 가지 방향을 찾게 된다. 연인에게 배신당한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면, 첫째는 나를 배신한 애인을 계속 증오하는 것이다. 증오란 어떤 것에 지속적으로 집착하며 느끼는 부정적 감정으로, 분노가 특정 대상에 고정된 것이다. 둘째는 새로운 관념을 세움으로써 분노를 잠재우는 것이다. 애인이 나를 배신하긴 했지만 알고 보면 나 자신의 오래된 잘못이 원인이 되었다는 식으로 후회의 관념을 구축하는 것이다. 셋째는 또 다른 정당한 관념을 통해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이다. 이때 정당한 관념이란, 애인은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사랑할 만한 존재가 아니고 내게는 더 좋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확신 같은 것이다. 세 번째 경우처럼 분노가 정당성과 결합한다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확실한 변화와 갱신의 기회를 제공한다. - P252

"옳음과 친절함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친절함을 택하라."
 올바르기란 쉽다. 하지만 친절하기는 어렵다. 올바름은 언제나 정해진 기준에 따라 자신의 행동과 삶을 맞추면 달성된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올바름의 기준을 부단히도 고쳐온 과정이자 올바름이라는 폭력 아래 무수한 타자들을 굴복시켜온 시간이기도 하다. ‘올바른 것을 행한다‘는 명분 아래, 그에 대한 손쉬운 복종 아래, 눈앞의 타인에 공감하고 그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사라졌다. 그 올바름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부드러운 마음, 타인을 있는 그대로 만나는 순간 편견과 차별 없이 일어나는 공명은 늘 올바름 앞에 힘을 잃는다.
 친절은 상대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순간에 대한 묘사다. 달리 말해 환대는 타인을 향한 내 안의 ‘올바름의 기준‘이 무너진 폐허에서 피어오른다. 진정으로 친절하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무너져 있어야 하고, 열려 있어야 한다. 내 안에 쌓아 올린 편견의 성벽을 따라 타인을 만나는 게 아니라 매순간 살아 있는 채로, 매번 새로운 영혼으로, 갓 알에서 태어난 어린 새의 마음으로 타인을 대해야 한다. 친절 안에서 가치의 기준은 매번 새롭게 탄생한다. 내가 환대한 자, 내가 사랑하는 자, 나와 시선과 육성을 있는 그대로 마주한 자가 새로운 기준이 된다. 그래서 친절은 역동성의 다른 이름이고 새로움의 징표이며 어려운 일이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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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도성제(道聖諦)
‘도(道)‘란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중도(中道)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양극단(兩極端)을 떠난 중간의 길이다. 즉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반대로 극단적인 고행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적당한 상태의 길‘을 말한다.
「소나경(Sona經​)」은 중도를 거문고 줄의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거문고 줄은 지나치게 팽팽해도 그와 반대로 지나치게 느슨해도 좋은 소리를 낼 수 없다. 거문고가 가장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그 줄이 적당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도 극단적인 고행이나 지나친 쾌락적인 행을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팔정도(八正道)이다.
① 정견(正見) : 바른 견해이다. 4성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즉 고의 발생과 고의 소멸, 그리고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바르게 아는 것이다.
② 정사(正思) : 바른 생각, 즉 바른 마음가짐이다. 구체적으로는 탐욕스러운 생각, 성내는 생각, 해치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온화한 마음, 자비스러운 마음, 청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③ 정어(正語) : 바른 말이다. 거짓말[妄語], 이간시키는 말[兩舌], 욕하는 말[惡口], 꾸며대는 말[綺語]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말, 성실한 말,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이다.
④ 정업(正業) : 바른 행위이다. 살생(殺生), 도둑질[偸盜], 음란한 짓[邪淫]을 하지 않고 다른 존재들의 목숨을 구해 주고 보시(布施)하고 청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⑤ 정명(正命) : 바른 생활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다. 특히 출가 수행자의 경우에는 재가신도의 바른 신앙에서 우러나는 보시를 받아 생활하는 것이다.
⑥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이다. 이미 생긴 선(善)은 더욱 자라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노력하고 이미 생긴 악(惡)은 끊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⑦ 정념(正念) : 바른 기억이다. 자기 자신이나 그 주변의 것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기억해서 반성하고 바른 의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⑧ 정정(正定) : 바른 정신집중 또는 정신통일이다.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는 것[心一境性]을 말한다. 정(定, samadhi)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禪, dhyana)이기 때문에 때로는 2가지를 합해서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8정도는 그 순서대로 실천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견을 닦아야 정사가 생기게 되고 정사를 닦아야 정어를 할 수 있게 된다. 나머지 항목[支]들도 마찬가지다. 8정도의 마지막 목표는 정정(正定)이다. 8항목 가운데서 앞의 7항목은 모두 정정에 이르기 위한 준비 단계이다. 정정을 닦아 지혜(prajna)를 얻게 되고, 지혜를 가짐으로써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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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 12장 통합, 지혜를 만드는 유기체적 과정(353~399p)
후안 파스쿠알 리온Juan Pascual-Leone, 요크대 심리학과

언젠가 피아제는 그의 스승 클라파레드Claparede가 다음과 같은 의지의 역설을 제기한 바 있다고 말했다. 나쁜 습관을 극복하고 동기의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의 유혹을 통제하기 위해 의지가 작동한다. 하지만 정작 가장 필요할 때는 의지가 약하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는 의지가 강한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역설은 의지가 적용되는 정신적 혁명의 성격과 그것이 야기하는 학습효과로 설명될 수 있다. 동기의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에서 주체의 고차집행 체계는 잘 발달해 있지 않기 때문에 주체의 의지는 약하게 나타난다. 집행처리 동안(도형 12.1 참조)에는 의지의 결심이 견고했다가도 첫 행위 처리 단계에서, 다시 말해 유혹적인 일상 경험의 냉엄한 현실에 부딪히자마자 의지가 좌절되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유혹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럴 때면 죄책감 같은 부정적인 정서가 생기곤 하며 주체는 미래를 예견하는 계획에 몰두하고 자신의 실패에 대한 사후 재조사를 통해 자기 통제를 하려고 한다. 이런 재조사는 주체가 이런 종류의 의지 행동에 적합한 고차집행 체계를 조금씩 획득해갈 수 있는 실제 집행학습 상황이다. 이와 관련된 기법들은 오늘날 인지치료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집행학습 수단을 통해 중요한 고차집행 체제와 대처 전략이 발달함에 따라 이 의지 활동은 마침내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고차집행 체계와 대처 전략이 의지를 필요로 하는 비슷한 다른 상황에까지 확장되어 일단 자동화되면 주체는 매우 강한 의지를 발휘해 원하는 방향으로 행위를 단호하게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제 의지 활동(다시 말해 정신적 에너지와 차단능력을 갖추게 된 역동적 또는 창조적 종합)은 훨씬 덜 필요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새로 자동화된 고차집행체계 전략들이 정신적 에너지나 차단 용량을 많이 소모하지 않고도 유혹적인 상황의 혼란과 방해를 회피하거나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370

의지의 또 다른 역설은 스키너Skinner가 본의 아니게 언급한 것이다. 스키너는 개인의 마음이 그 사람의 학습 경험에 의해 매우 강력하게 조건화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으며 따라서 의지란 환상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역설인 까닭은 끊임없이 복잡하게 발전하는 문화와 결정되지 않은 인류의 역사, 경험적으로 관찰 가능한 인간의 창조성과 실존적 선택 등에 비추어 볼 때 자유와 의지는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역설은 앞 절에서 간단히 언급한 의지종합 모형 안에서 해결될 수 있다. 이 해결이 가능한 까닭은 스키너의 주장이 상황의 막대한 힘만을, 즉 행위 도식의 선택과 관련된 정신적 처리의 얕은 수준의 힘만을, 다시 말해 스턴버그가 수행 요소라고 부르는 처리과정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이서Neisser가 전주의 처리preattentive processing라고 부르는 자동적인 정신 처리 수준의 추동력이다. 나는 이것을 자동행위 처리라고 불렀으며 정서 처리, 집행 처리, 노력을 수반하는 행위 처리와 구별하였다(도형 12.1 참조). 이 모형에 따르면 상황(더 정확히 말해 자동행위 단서)은 주체가 노력을 기울여 정신적 에너지와 정신적 차단메커니즘을 이용해 이것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주체의 과거 경험에 부합하는 행동을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스키너의 의지 역설을 풀 수 있는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해결의 열쇠는 주체가 고차집행 체계와 집행 수준의 처리를 이용해 동기의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을 포기하고 주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발달하도록 부추기는 다른 환경으로 옮겨 가기로 결심할 수 있음을 인식하는 데 있다. 이렇게 환경을 바꾸려는, 그래서 주체와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제하려는 주체의 결심은 현대 성격이론들에서도 인정하는 가능성이다. 이런 결심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주체가 의지의 유기체적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 P371

이 글은 철학과 심리학 문헌을 바탕으로 지혜에 독특한 발달적 측면들을 분석하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는 창조성, 지능, 지혜를 비교하였다. 전체적인 결론은 이것들이 마음의 서로 다른 산물이라는 것이다. 지혜는 인지뿐만 아니라 정서와 성격도 포함하는 전체라는 점에서 다른 두 범주와 구별된다. 지혜는 의지의 발달에 힘입어 점점 더 높은 수준의 정서적 자기 통제가 출현함과 함께, 그리고 이것을 통해 성격의 변증법적 통합이 진전됨과 함께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통합은 다시 자아 중심적 특성들의 약화로 이어지고 이것은 타인, 자기, 세계, 자연에 대해 똑같이 강한 관심을 보이고 더 큰 공감적 이해와 직관을 얻게 되는 기초로 작용한다. 이것은 지혜의 서술적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볼 때 지혜는 인간이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함으로써 그러나 소수만이 도달하는 점근적 상태라 하겠다. - P399

이 과정에서 유기체는 단순히 경험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기계가 아니라 경험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존재다. 인간은 능동적 유기체로서 환경을 해석하고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면서 경험을 구성하고 또 재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아마추어 이론가처럼 작업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위에 맞게 자신의 이론을 계속 수정하는 반면에,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현실에 대한 기존 이론이 아무리 불만족스럽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사회 현실에 대한 특정 가정들을 견지하면서 이것들을 다양한 영역에 효과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자신의 경험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타인에게 문제해결을 위한 조언을 주며 사회제도를 가꾸어가고 경험의 의미와 연속성을 찾아가는 아마추어 이론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P401

필자의 해석틀에 따르면 상대주의적 사고는 지식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성격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다. 지식은 관찰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모든 관찰자가 정확히 똑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모순은 지식에 본질적인 것이다. 게다가 특정 맥락이 다른 맥락보다 더 타당한 지식을 낳는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모순은 화해될 수 없는 것이다. 끊임없이 변하는 맥락에 따라 관점도 바뀌기 때문에 지식은 끊임없는 유동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과거의 맥락과 현재의 맥락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대주의적 사고는 짜임새가 엉망이고 예측 불가능한 사태의 본성에 대한 인식을 촉진할 것이다.
상대주의적 사고는 소년기와 청년기에 발달한다는 가설이 있는데, 이것은 페리가 진리의 의미를 묻는 대학생들의 특징으로 제시한 극단적 다양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는 데 상대주의적 사고가 지니는 장점은 개인의 욕구와 우선순위가 서로 충돌할 때조차 이것들을 고려할 수 있게 해주고 문제가 되는 사태의 주변상황을 고려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상대주의적 사고는 다양성을 허용한다. 반면에 상대주의적 사고의 한계는 연속성의 구성이나 선택과 참여를 어렵게 하여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모순의 통합을 가능케 하는 사고 형태를 발전시키는 것은 적응적 가치를 지닐 것이다. 그리고 변증법적 사고가 바로 이런 해결책을 제공한다. - P415

필자의 해석틀에 따르면 변증법적 사고는 유기체론의 근본 은유에서 비롯하며 모든 지식이 통합되어 있다는 인식을 포함한다. 이것은 발달의 측면에서 상대주의적 사고를 계승한다고 볼 수 있다. 변증법적 ‘아마추어 이론‘에서 지식은 모순과 모순 해결의 상호작용을 통해 점점 더 통합된 형태로 발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개인의 사고는 모든 사태의 상호 작용적 성격을 변증법적으로 깨달음으로써 가변적인 것들의 상호 의존을 현실의 근본 특성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고양식의 전조는 상대주의에 빠진 것으로 페리가 특징지은 대학생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라보비 비에프가 말하는 자율적 수준의 사고와도 유사한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것이 중년기 무렵에 발달한다는 가설을 제시했으며,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발달과정에 대한 증거가 존재한다.
상대주의적 사고와 변증법적 사고는 지식이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다는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 두 사고는 짜임새가 엉망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합하다. 지혜와 관련된 판단은 일반적으로 짜임새가 엉망인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간주된다. 때문에 미첨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것이 지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오늘날 대다수 심리학 이론들에서 지혜의 개념은 상대주의적 또는 변증법적 사고의 몇몇 측면들을 포함하고 있다.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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