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7-8 지배적 소수자의 야만에 대한 조사를 끝내기에 앞서, 근대 서유럽 세계에도 이러한 사회적 현상의 징후가 인정되는지 어떤지 생각해 보자. 얼핏 생각하면 서유럽 사회는 전세계를 그 촉수 안에 끌어안고 있으며, 이미 서유럽을 야만화할 정도의 규모를 지닌 외적 프롤레타리아는 남겨져 있지 않다는 사실에 의하여 벌써 이 문제에는 최후의 회답이 주어져 있는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유럽 인은 오늘날 서유럽 사회의 ‘신세계‘인 북아메리카 한가운데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저지대 지방 출신으로서 프로테스탄트적 서유럽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전통을 지니면서 사는데, 그들은 이미 유럽의 ‘켈트 외곽 지대‘에서 유배 생활을 끝마친 뒤 애팔래치아 산맥의 미개척지에서 고립 생활을 보냄으로써 분명 심하게 야만화된 상태로 광범한 지역에 다수의 인간이 퍼져 있다는 사실은 서유럽인을 몹시 당황케 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아메리카 변경민이 야만화된 결과에 대하여 이 문제의 권위자인 아메리카의 한 역사학자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아메리카의 식민에 있어서, 우리는 어떻게 하여 유럽의 생활이 이 대륙에 들어왔는지, 또 아메리카가 그 생활을 어떤 방식으로 바꾸어 발전시켰으며 반대로 유럽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우리의 초기 역사는 유럽에서 온 씨앗이 아메리카의 환경 속에서 발전해 가는 과정의 연구이다. ······변경 지역은 아메리카화가 가장 빠르고도 효과적으로 행하여지는 선이다. 황야는 식민지 개척자를 지배한다. 최초에 개척자가 변경 지역에 오는 때, 그는 복장·생업·도구에 있어서도, 여행 방법이며 사물을 생각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완전히 유럽 인임을 발견한다. 그런데 황야는 그를 철도 차량에서 끌어내려 자작나무 통나무배에다 태운다. 문명인의 의복을 벗기고 수렵용 셔츠에 모카신을 신게 한다. 황야는 그에게 체로키족과 이로쿼이족의 작은 통나무집에서 살게 하고, 인디언식의 울타리를 주위에 두르게 한다. 이윽고 그가 옥수수(인디언 콘)를 심어, 끝이 뾰족한 막대기로 가꾸게 한다. 또한 정통적인 인디언 방식에 따라 함성을 지르며 머리 가죽을 사냥하게 한다. 요컨대 처음 무렵의 변경 지역에서는 환경이 인간에게 너무나 강렬하다. ······ 그는 황야를 조금씩 변형시켜 간다. 그러나 결과는 자기자신도 절대로 본래의 유럽 인은 아니다. ······ 사실 이리하여 산출되는 것은 새로운 아메리카적 산물이다." - P567

571-2 언어 혼란의 전설은 이렇게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가 최대의 장해로 간주되고 있는 점에서 진실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전례 없는 사회적 위기를 앞두고 사회적 행동을 통일하는 데 언어 혼란이 최대한으로 방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의 혼란과 사회적 마비와의 관련은 위에 확실히 기록되어 있는 역사상의 몇 가지 현저한 예로써 입증할 수 있다.
현대 서유럽 사회에서는 이러한 언어의 다양성이, 1914~18년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멸망한 도나우 합스부르크 왕국의 치명적인 약점의 하나였다. 또한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유능함을 발휘했던 오스만 파디샤의 노예 세대조차도, 이 제도가 성숙기에 이르렀던 1651년에 바벨의 저주가 투르크 궁전 안에서 술탄의 근신들 위에 내려져 궁정 혁명의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을 완전히 무능한 상태로 빠뜨렸던 사실이 인정된다. 소년들은 매우 흥분한 나머지 그들이 인위적으로 배워 익힌 오스만어를 잊어버렸다. "놀라 이상하게 여기는 목격자의 귀를 울린 음향은 가지가지 소리와 언어의······떠들썩함이었다. 어떤 자는 그루지야 어, 어떤 자는 알바니아 어·보스니아 어·민그렐어·투르크어·이탈리아 어 등등 제각기 편리한 말로 소리쳤다." 오스만의 역사에 일어난 이 사건은 <사도행전> 제2장에 기록되어 있는 ‘성령 강림‘이라는 저 중대한 사건에 비하면 매우 사소한 일이다.
성서의 이 장면에서 나오는 말은 이야기하는 사람으로서는 미지의 여러 가지 언어, 즉 그때까지 자기 나라말인 아람어 이외의 언어를 한 번도 말한 적이 없고 들은 적도 배운 적도 없는 갈릴리 인으로서는 생소한 미지의 여러 언어였다. 그들이 돌연 그러한 방언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신이 내린 기적적인 능력 때문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 수수께끼의 한 구절은 이제까지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지만, 지금 여기서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점에 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도 행전>의 필자가, 여러 언어를 말하는 능력이야말로 새로이 계시된 ‘고등 종교‘에 온 인류를 귀의시키는 중대한 임무를 짊어진 사도들이 우선 첫째로 그 타고난 능력을 높여서 달성해야만 되는 필수 조건이라고 그 견해를 밝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도들이 태어났던 사회는 오늘날의 서유럽 세계에 비해 훨씬 ‘언어 혼란‘이 적었다. 갈릴리 인의 모국어인 아람어는 북쪽으로는 아마누스 산, 동쪽으로는 자그로스 산맥, 서쪽은 나일 강까지의 범위에서밖에 통용되지 못했지만, <사도행전>에 쓰여져 있는 그리스 어를 사용하면 그리스도교 전도자는 바다 건너 로마까지, 아니 더욱더 그 앞까지 가르침을 전할 수가 있었다. - P571

577-8 종교에 있어서의 통합주의(일부)
종교 분야에서는 통합주의, 즉 의식·제신·신앙의 혼합이라는 것이 사회 해체기에 있어 영혼의 분열에서 생기는 내면적인 혼효 의식의 외면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현상은 확신있게 사회 해체의 징후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성장기 문명의 역사에서는 일견 종교적 통합주의처럼 여겨지는 현상이 나타나더라도 잘 살펴보면 겉보기뿐인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헤시오도토스나 그 밖의 고대 시인들이 기울인 노력에 의하여 수많은 도시 국가의 지방적 신화가 정리 통합되어 헬라스 전체에 공통되는 하나의 체계로 완성되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신들의 이름을 이리저리 주물럭거렸을 뿐 실제로 거기에 대응하는 다른 제식의 융합이나 여러 가지 종교적 감정의 혼합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또한 라틴 민족의 신들이 여러 올림포스의 신들과 동일시된ㅡ주피터는 제우스, 주노는 헤라라는 식으로ㅡ것도 요컨대 원시적인 라틴 민족의 애니미즘(정령 숭배)이 그리스 민족의 신인동형론에 의하여 대체된 것뿐이다.
또 한 가지는, 이들과 종류를 달리하는 신들의 이름을 동일시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해체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또한 확실히 혼효 의식을 입증하는 것인데, 잘 살펴보면 실은 진정한 종교적 현상이 아니라, 단순히 종교의 가면을 쓴 정치적 현상임을 알 수 있다. 해체기의 사회가 일찍이 성장기 동안 분화함으로써, 그리고 서로 다른 지방 국가 상호간의 정보 전쟁의 결과 정치 면에서 강제적으로 통일됨으로써, 서로 다른 지방신의 명칭이 동일시되는 것이 그것이다. 예컨대 수메르 사회의 역사 말기에 니푸르 주신(벨)의 엔릴은 바빌로니아의 마르두크에 병탄되었으며, 그 바빌로니아의 마르두크 벨은 다시 잠시 동안 카르베라는 이름을 바꾸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형태로 기념된 ‘팜믹시아(범혼합)‘는 전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었다. 전자의 변화는 바빌로니아 왕조의 무력에 의하여 수메르 사회의 세계 국가가 재흥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며, 후자의 변화는 세계 국가의 캇시족(인도 메갈리아주 민족)의 무장들에게 전복당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 P577

578-9 헬라스 사회의 해체기에서 포세이도니오스(기원전 135~51) 시대는, 그때까지 활발하고 신랄한 논쟁을 벌이는 것을 좋아한 철학의 여러 유파가 단 하나 에피쿠로스파만을 예외로 하고 나머지 모두 일치하여 상호 간의 차이점보다는 오히려 공통점에 주목하여 그것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첫 100년이나 200년에는 마침내 에피쿠로스파를 제외한 헬라스 세계의 모든 철학자가 어느 파이건 간에 거의 동일한 절충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철학에서 이러한 혼효 경향은 중국 사회의 해체 역사에 있어 그 대응하는 시기에 나타나고 있다. 기원전 2세기라면 한 제국의 첫 100년에 해당하는 시기인데, 그 무렵 역시 제일 먼저 궁정에서 인기가 있었던 도교의 뒤를 이어 대체된 유교의 특색도 절충주의였다.
대립하는 철학 상호 간의 절충주의 현상은, 대립하는 ‘고등 종교‘ 상호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시리아 문명 세계에서도 솔로몬 왕(기원전 960~922. 고대 헤브라이 왕국의 제3대왕. 예루살렘 출생) 시대 이후 이스라엘의 야훼 숭배와 이웃 시리아 제민족의 여러 지방적 주신과의 사이에 현저한 ‘접근‘의 경향을 볼 수 있는데, 이 연대는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솔로몬 왕의 사망이 시리아 사회 쇠퇴의 조짐이 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P578

580-1 내적 프롤레타리아의 고등 종교가 지배적 소수자와 마주칠 경우 그 고등 종교는 적응 과정에서 지배적 소수자의 예술 양식 중 외면적인 형식을 채용함으로써 지배적 소수자의 주의를 끌어 예비적인 단계에 머무는 수가 있다. 이를테면 헬라스 세계의 해체기에 그리스도교와 경쟁하여 패배한 모든 고등 종교들은 그들 신의 시각적 표현을 헬라스 사회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형태로 고침으로써 헬라스 사회 안의 전도 활동을 성공으로 촉진시키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순히 외면뿐만이 아니고 내면적으로도 헬레니즘화하는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나타낸 종교는 하나도 없었다. 자기의 교리를 헬라스 사회의 철학 용어를 빌어 표현하는 데까지 간 것은 그리스도교뿐이었다.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본래 그 창조적 본질이 시리아로부터 유래되었던 이 종교가 사상적으로 헬레니즘화하는 운명은 아람 어가 아닌 아티카 어 ‘코이네‘가 ‘신약 전서‘의 언어로서 채용되었을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학자의 용어로 사용되어 온 이 언어의 어휘 자체가 이미 다분히 철학적 함축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관 복음서(<요한복음>에 대하여 ‘마태‘ ‘마가‘ ‘누가‘의 세 복음서를 말함)의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간주되고 있는데, 이런 신앙은 제4복음서(‘요한‘)의 본문에서도 지켜져 있을 뿐더러 한층 더 심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제4복음서의 서언에 보면 구세주는 하느님의 창조적인 로고스(신학에서는 하느님의 말씀, 철학에서는 이성을 뜻함)라고 하는 사상이 쓰여 있다. 따라서 뚜렷이 언명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암묵리에 하느님의 아들과 하느님의 로고스는 똑같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로고스로서의 아들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지혜 및 목적과 동일시되고, 아들로서의 로고스는 아버지의 인격과 대응하는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서 실재화되어 있다. 로고스의 철학이 갑자기 종교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철학 용어를 빌려 종교를 전도하는 방법은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에서 이어받은 유산의 하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민이자 그리스도 교도였던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가 2세기 후에 거둘 수 있도록 풍부한 수확의 종자를 뿌린 사람은 역시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이었다. 그리고 제4복음서의 필자가 육체화된 하느님과 동일시하고 있는 하느님의 로고스 사상을 얻은 것 역시 아마 같은 철학자로부터였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선구자가 된 이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학자는 그리스 어라는 문호를 통하여 그리스 철학의 길로 들어간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곳에 사는 유대인이 「성서」를 이방인의 말로 번역한다는 모독적인 행위를 감히 해야 했을만큼 헤브라이 어는 물론 아람 어까지도 죄다 잊어버리고, 아티카 어인 ‘코이네‘를 자기들의 말로 삼고 있었던 마을에 필론이 살며 철학을 하였다는 것은 분명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교 자체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이 그리스도교 철학의 아버지가 된 유대인은 고립된 존재였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서 플라톤 철학을 끌어내려고 한 그의 능숙한 노력도 유대교로서는 아무 쓸모없는 곡예에 지나지 않았다. - P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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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7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붕괴할 시기까지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던 여성 학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나중에 신플라톤학파의 비조로 불리는 철학자 히파티아였다. 그녀는 철학자인 동시에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였다. 어느 시대에서든 평생에 걸쳐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낼 수 있는 학자라면 그는 보통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는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히파티아야말로 이러한 범주에 드는 인물로서 370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여자가 하나의 소유물로 간주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파티아는 달랐다. 남성 지배 사회에서 그녀는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거침없이 활동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뭇 남성의 구혼을 모두 거절했다. 히파티아가 살던 당시의 알렉산드리아는 이미 오랫동안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이미 멸망의 그림자가 알렉산드리아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노예 제도가 고대 문명의 생기를 완전히 죽여 놓은 상태였으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기독교가 이교도들의 영향과 문화를 뿌리째 뽑아내려고 하던 중이었다. 히파티아는 막강한 이 세력들의 진앙에서 완강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당연히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인 키릴루스가 그녀를 혐오할 만했다. 그녀가 로마 총독과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이 혐오의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쨰 이유는 히파티아가 바로 이교도 과학과 학문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과학과 학문을 이교도의 사상이라고 폄훼했으니 키릴루스의 혐오감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히파티아는 자신에게 밀어닥치는 개인적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자기의 주장을 가르치고 글로 발표했다. 그녀는 자신의 일터로 가다가 키릴루스 교구 소속의 광신 폭도들이 놓은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이때가 415년이었다. 폭도들은 그녀를 마차에서 끌어내려 옷을 벗기고 전복 껍데기로 만든 무기로 그녀의 살을 뼈에서 발라낸 다음, 남은 시신과 그녀의 저술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이렇게 해서 그녀의 이름은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져 오랫동안 잊혀졌지만 키릴루스는 나중에 성인의 반열에 올려졌다. - P666

667-8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한때 영화도 이제는 하나의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히파티아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서 도서관에 남아 있던 마지막 책들마저 모두 파괴됐다. 인류 문명은 잘못된 뇌수술 때문에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총체적인 망각 속으로 빠져 들었다. 인류의 위대한 발견과 사상 그리고 지식 추구의 열정이 모두 어디론가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 손실을 어떻게 숫자로 계량할 수 있겠는가? 파괴된 작품 중에는 작품의 제목만이라도 감질나게 알려진 운 좋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제목도 저자도 알려지지 않은 채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소포클레스가 썼다는 희곡 작품이 이 도서관에 123점이나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 단지 일곱 편만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일곱 편 중 하나가 「오이디푸스 왕」이다. 이 도서관에는 아이스킬로스나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도 소포클레스의 경우와 비슷할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비유를 하나 들어 보자.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작가가 「햄릿」, 「맥베스」, 「줄리우스 카이사르」, 「리어 왕」, 「로미오와 줄리엣」 등을 썼고 이 작품들이 당대에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의 현존 작품은 「코리올라노스」와 「겨울 이야기」 단 두 편이라면 얼마나 답답하고 애석한 일이겠는가? - P667

674-5 사람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살아간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나 자신이 속한 사회와 조금이라도 다른 성격의 사회를 믿을 수 없는 기괴한 존재로 간주하며 심히 혐오하고는 한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방outlandish‘이나 ‘외계alien‘라는 표현의 부정적 뉘앙스는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잘 드러내 준다. 그렇지만 각기 다른 문명들이 보여 주는 문화와 유적의 다양성은 ‘인간으로 되어 감‘의 다른 방식들을 우리에게 시사할 뿐이다. 외계 문명인에게는 인류 사회의 차이가 유사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일 것이다. 어쩌면 코스모스에는 지능을 갖춘 존재의 밀도가 예상외로 매우 높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윈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인간은 지구 이외의 다른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 지구에만 있다. 인간은 지구라고 불리는 이 자그마한 행성에서만 사는 존재이다. 우리는 희귀종인 동시에 멸종 위기종이다. 우주적 시각에서 볼 때 우리 하나하나는 모두 귀중하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너와 다른 생각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를 죽인다거나 미워해서야 되겠는가? 절대로 안 된다. 왜냐하면 수천억 개나 되는 수많은 은하들 중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P674

675-6 오늘날 우리는 인류도 더 큰 집단의 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과 가까운 가족에게, 다음에는 사냥과 채집 활동을 자기와 같이 하는 이들에게만 충성을 바치며 살아왔다. 그러다가 충성의 대상을 자기가 속한 마을에서, 부족으로, 그리고 도시 국가에서, 국가의 순으로 점차 넓혀 갔다. 사랑할 대상의 범주를 계속해서 넓혀 왔다는 이야기이다. 충성의 대상은 오늘날 초강대국이라 불리는 조직으로까지 확대됐다. 초강대국은 문화와 인종적 배경을 달리 하는 사람들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어느 정도 함꼐 노력할 수 있는 사회이다. 우리는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인간화의 과정과 인격 함양을 경험하게 된다. 현대는 충성의 대상을 인류 전체와 지구 전체로 확대해야 할 시대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의 생물 종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설명한 우리 생각을 싫어하는 자들이 통치하는 나라도 지구상에는 많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를 배반자, 충성심이 없는 비애국자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이야기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부유한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들에게 자신들의 부를 나눠 줘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과연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서, 나와 좀 다른 맥락에서 한 이야기지만 H. G. 웰스의 주장대로, 인류가 우주를 얻느냐 아니면 공멸의 나락으로 빠지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 P675

676-7 돌이켜 생각하면 철저하게 모순되는 선택이 이루어진 셈이다. 행성에 탐사선을 보내는 데 쓰이는 로켓과 똑같은 로켓 추진체가 핵탄두를 적국으로 날려 보내는 데에도 쓰인다. 로켓 추진뿐 아니다. 바이킹과 보이저 탐사선에 전력을 공급하는 방사능 에너지도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알아낸 바로 그 기술에 힘입어 마련된 것이다. 모순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륙 간 탄도 미사일을 유도하고 추적하거나 또는 적의 미사일 공격에서 자국을 보호하는 데 쓰이는 전파 기술과 레이더 기술이 행성 탐사용 인공 위성을 유도하고 제어하는 데 그대로 쓰일 뿐 아니라, 외계 문명으로부터의 신호를 검출하는 데에도 아주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 기술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을 파괴한다면 별과 행성의 탐사는 그것으로 끝장이다. 그 반대의 상황도 물론 가능하다. 행성과 항성의 탐사가 계속될수록 인류 우월주의는 뿌리째 흔들리고 말 것이다. 그 대가로서 우리는 우주적 시야를 갖게 될 것이다. 우주 탐사는 지구에 사는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에너지를 죽음과 파괴가 아니라 삶을 위해서 이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지구와 지구인을 이해하는 동시에 외계 생명을 찾는 데 써야 한다. 그것이 유인 탐사이든 무인 탐사이든 간에 우리의 우주 탐험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바로 그 기술과 바로 그 조직력 덕분에 가능하다는 점을 우리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우주 탐험도 전쟁에서 요구되는 바와 똑같은 수준의 전 국민적 각오와 용기를 각자에게 요구한다. 전 지구 규모의 핵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진정한 의미의 군축 시대가 온다면, 그때 비로소 인류의 우주 탐험 노력이 강대국들의 방대한 군수 산업을 흠결 없는 평화의 산업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전쟁 준비 과정에서 얻는 것들을 코스모스의 탐사 준비에서도 비교적 수월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P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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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9-50 그래도 우리는 결정론적 철학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것만으로 자신에 가득 차고도 훌륭히 성공할 수 있는 활동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이 된다고 추론해도 좋을까? 아니,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되리라는 신앙 때문에 이와 같이 커다란 자신과 자극을 부여받은 예정설의 신봉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들 자신의 의사가 신의 의사나 자연의 법칙 또는 필연의 계율과 합치함으로써, 처음부터 틀림없이 승리를 거두기로 되어 있다는 대담한 가정을 세웠던 것 같다. 칼뱅주의자의 여호와는 그 선민을 옹호하는 신이고, 마르크스주의자의 역사적 필연은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실현하는 수단인 비인격적인 힘이다. 이와 같은 가정은 전쟁의 역사가 가르치듯이, 사기(士氣)의 원천의 하나인 필승의 신념을 주었고, 따라서 머리부터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고 예상했던 결과를 달성하기 때문에 역시 옳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라는 말이 베르길리우스가 「아에네이스」 속에 그린 보트 경주에서 승리를 거둔 성공의 비결이었다. 요컨대 필연을 유력한 동맹자라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유력한 동맹자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가정은 물론 하나의 ‘휴브리스‘(과거를 우상화함으로써 빠지는 오만)ㅡ그것도 가장 교만한 휴브리스의 행위여서 결국은 믿었던 사실이 논리에 의해 무참하게도 부정당하는 쓰라림을 맛보아야 한다. - P549

551 표류 의식은 수동적인 감정이지만 그것과 한 쌍을 이루면서도 정반대의 능동적 감정인 것이 죄의식인데, 그것은 도덕적 패배의 자각에 대한 또 하나의 다른 반응이다. 그 본질이나 정신에 있어서 죄의식과 표류 의식은 두드러진 대립을 보인다. 표류 의식이 마약 역할을 하여 표류자의 힘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외적 환경 속에 깃들어 있다고 여겨지는 악을 묵인하는 태도를 영혼 속에다 몰래 주입하는 데 비해, 죄의식은 자극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죄를 범한 인간에 대하여 악은 결국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것이므로, 신의 목적을 수행하고 신의 은총을 받을 생각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의 의사에 따라 제어할 수 있음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저 크리스챤(「천로역정」의 주인공)이 얼마 동안 바르작거렸던 ‘절망의 늪‘과 그를 ‘저 멀리 보이는 좁은 문‘을 향해 달리게 한 최초의 충동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굉장한 차이가 있다. - P551

554-5 죄의식은 분명히 근대 서유럽의 허약하고 왜소한 인간들에게 가장 익숙한 감정이다. 거의 강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의식은 우리가 이어받은 ‘고등 종교‘의 가장 주요한 특색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침은 멸시를 낳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이 경우 너무나 지나치기 때문에 요즈음에는 멸시 정도가 아니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같이 보인다. 그리고 근대 서유럽 세계의 기풍과 정반대인 기원전 6세기 헬라스 세계의 기풍을 대조해 보면 인간성 안에 있는 어떤 비뚤어진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야만적인 여러 신밖에 몰랐고, 빈약하고 시원치 않은 종교적 유산을 받아 그 생애를 시작한 헬라스 사회는 자기의 정신적 빈곤을 자각하고 오르피즘이라는 형태로 다른 몇 개의 문명이 선행 문명으로부터 이어받은 ‘고등 종교‘와 같은 종류의 종교를 만들어 내어 그것으로 공허감을 메우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오르페우스교의 의식과 교리의 성격상 죄의식이, 6세기 경의 헬라스 인이 우선 그 정상적인 배출구를 찾아내기 위해 열중한 것 같은 울적한 종교적 감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서유럽 사회는 헬라스 사회와는 대조적으로 ‘고등 종교‘의 비호를 받아 세계 교회라는 번데기 속에서 성장하여 풍부한 유산을 이어받은 문명의 하나이다. 그리고 서유럽 인은 아마도 항상 그리스도교 유산을 이을 권리를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가끔 그 가치를 얕보아 거의 그것을 내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이후 헬레니즘(그리스 문화, 그리스 정신) 예찬이 서유럽 사회의 세속적 문화에 있어 대단히 유력한 구성 요소가 되었고 여러 방면에서 풍부한 성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이 헬레니즘 예찬이 육성되어 살아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헬레니즘이 근대 서유럽 사회의 모든 장점과 재능을 구비하고 있는데다가, 서유럽 인이 오늘날 열심히 그리스도교에서 이어받은 정신적 전통으로부터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죄의식에서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태어났던 때부터 헬레니즘을 지극히 멋있는 해방된 생활 태도라고 여지껏 여겨왔기 때문이다. 최근에 출현한 여러 프로테스탄트파가 천국의 개념을 보존하면서 지옥의 개념은 말없이 버렸고 악마의 개념을 풍자가와 희극 작가에게 양도해 버린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 P554

555-6 오늘날 헬레니즘은 자연과학 예찬 때문에 궁지에 몰려 있으며, 이런 사실로 죄의식의 회복 가능성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사회개량가와 자선사업가는 빈민 계급의 죄를 외면적 환경에 기인한 불운으로 간주하기 쉽다. "어쨌든 그 사람은 빈민굴에서 태어났으니 별 수 없지 않습니까?" 또 정신분석가도 마찬가지로 환자의 죄를 정신적 콤플렉스나 노이로제 등의 내면적 환경에 기인하는 불운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짙다. 즉 죄를 설명하되 죄를 병으로 치고 발뺌하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선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새뮤얼 버틀러의 「에리휜」 속에 나오는 철학자들인데, 독자들도 기억하듯 불행한 노스니보어는 공금 횡령이라는 병에 걸렸기 때문에 단골 ‘교정사(straightener)ㅡ의사‘를 불러야 했다.
근대 서유럽 인은 ‘아테(만용)‘라는 보복을 받기 전에 ‘휴브리스(과거 생각에서 오는 오만)‘를 회개하고 그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으로서는 뭐라고 예측할 수 없지만 우리는 현대의 정신 새왈을 바라보고, 어떡하든 지금까지 짓누르는 일에만 온통 기울여 오던 정신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는 희망을 품을 만한 징조를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 P555

565-7 예민한 사람들의 정체성 찾기
4세기 중간 무렵에 로마군에 복무 중인 게르만인 병사들이 고유의 게르만 이름을 그대로 보존하는 새로운 관습이 시작된다. 급속히 일어난 듯한 이런 습관의 변화는 그때까지 무조건 로마 인의 흉내를 내는 데 만족을 느끼고 있던 야만인 ‘병사들‘의 영혼 속에 돌연 자부심과 자신감이 대두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새로운 야만족의 문화적 개성 주장에 대해, 로마인 측에서는 야만인을 배척하는 대항 수단을 쓰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마침 그 무렵부터 로마군에 복무 중인 야만인은 황제가 주는 최고 영예인 집정관직에 임명되기 시작했다.
야만인은 이와 같이 로마의 사회적 계급에서도 가장 높은 단계로 올라간 데 비해, 로마 인 자신들은 그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가령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비속광이라기보다 야만광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도착적 취향에 골몰하여 야만인 풍의 의복을 걸치고 야만인의 야외 경기에 빠져들었다. 그러고 나서 100년 뒤에는 지배에 복종하지 않는 야만인 대장이 독립적으로 이끄는 전투 단체에 로마 인이 입대하게 된다. 예를 들면 507년에 부이에에서 서고트족과 프랑크족이 서로 갈리아 지방을 점유하려고 싸웠을 때, 서고트족의 전사자 중에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의 손자가 전투에 가담했다. 조부 대에는 아직 이럭저럭 교양 있는 고전 문인의 생활을 보냈던 데 비하면 대단한 변화였다.
6세기 초엽 로마 속령 주민의 자손이 ‘퓌러(지도자)‘의 명령에 응하여 팔팔하고 힘찬 전투 태도를 보인 점에서, 이 시대로부터 과거 몇 세기 동안이나 전쟁놀이를 가장 큰 삶의 보람으로 여겨 온 야만족 자손보다 활기가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이 무렵에는 이미 양자 모두가 세련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문화적으로 대등한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우리는 앞에서 4세기 무렵부터 야만족 출신의 로마군이 야만족일 때의 이름을 그대로 보존하는 관습이 시작되었던 일을 서술한 바 있는데, 그 다음 세기에는 갈리아 지방에서 반대로 순수한 로마 인이 게르만 이름을 짓는 경향의 가장 초기적인 예가 나타나서, 이 관습은 8세기 말엽 이전에 이미 보편적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샤를마뉴 시대의 갈리아 주민은 선조가 누구이든 너 나 할 것 없이 득의양양하게 게르만 이름을 따서 지었다.
이로써 로마 죄국 쇠망의 역사와 그와 유사한 중국 문명 세계의 야만화 역사ㅡ그 중요한 연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로마에 비하여 200년이 앞서 있다ㅡ를 비교하여 보면, 중국 문명의 경우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사회에 세계 국가의 여러 후계 국가를 건설한 야만족은 그 야만스러운 소지를 감추고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올바른 형태의 중국 이름을 채용했다. 일견 하찮아 보이는 이 점에 있어 관습의 차이를 극복한 중국 사회의 세계 국가가, 그에 대응하는 샤를마뉴에 의하여 초청된 로마 제국의 ‘망령‘보다 훨씬 효과적인 형태로 재흥되었던 사실 사이에 연관을 찾아내는 일은 반드시 전혀 근거 없는 망상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P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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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50 여러 가지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과학자와 고급 기술 인력의 거의 반이 무기 생산과 관련된 직종에서 전일제 또는 시간제로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대량 살상용 무기를 개발하고 생산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최상의 임금을 받고 여러 가지의 특권을 즐기며 떄로는 해당 분야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까지 누린다. 그런데다가 이 회사들의 고용 구조가 종업원들로 하여금 책임감을 전혀 느끼지 않도록 짜여져 있다. 이 점이 무기 개발이 지속될 수 있는 하나의 비결이라면 비결이라고 하겠다. 군수 산업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구)소련에서도 무기 개발이 그렇게 터무니없이 긴 세월 동안 지속될 수 있었다. 무기 개발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익명이 보장되고 철저히 외부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들 중에서 군사 영역만이 그 조직이 가진 특수한 비밀성 때문에 시민의 감시가 미치기 가장 어려운 성역으로 남아 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통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시민들이 그들의 숨어서 하는 활동을 멈추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군수 산업체들은 종사자들에게 타 분야에 비해 월등한 보상을 주고 서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으스스한 결속으로 끼리끼리 끌어안고 산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인류 생존에 반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떠밀리어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 P649

652-3 전세계적 규모의 핵전쟁이 일어난 적이 아직 없다는 사실을 통계적으로 전면 핵전쟁이 결코 일어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전면 핵전쟁은 단 한 번밖에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한 번으로 모든 게 끝이 난다. 그때 가서 통계 분석을 다시 해 봤자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P652

654-6 포유동물들은 서로 코를 비비고 끌어안고 애무하고 입을 맞추고 얼싸안고 서로 쓰다듬으며 자식을 사랑하는 등의 특별한 행동 양식을 보인다. 그런데 파충류에게서는 이런 행동을 찾아볼 수 없다. 우리 머릿속에서 R-영역과 변연계가 휴전 상태의 불안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아직도 종종 태곳적 범죄 행위를 저지르고는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포유동물의 어미와 새끼의 관계를 보자. 어미가 새끼에게 보이는 애정 표현은 포유동물의 본성을 자극하여 변연계의 활동을 도울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접촉을 통한 애정 표현이 결여된 상황에서는 파충류의 행동 양식이 권장될 것이다. 이러한 추리를 가능케 하는 증거가 있다. 해리 할로와 마거릿 할로 부부가 수행한 원숭이 실험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동료 원숭이를 바라볼 수 있고 그들의 냄새와 소리도 맡고 들을 수 있지만, 피부 접촉은 금지된 우리에 가둬 키운 원숭이들은 우울하고 자폐적이며 자기 파괴적 성향을 보였으며 여러 가지 비정상적 행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로 보호 시설에서 육체적 접촉 없이 자란 어린이들에게도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성향의 행동을 볼 수 있다. 피부 접촉의 단절에서 겪게 되는 애정 결핍은 사람에게 깊은 고통을 안겨 준다. - P654

656-7 신경심리학자 제임스 프레스콧이 산업화 이전 단계에 있는 400여 개의 사회를 선정하여 그 문화들을 상호 비교하는 통계 분석 연구를 수행한 적이 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유아기에 피부 접촉을 통한 애정 표현이 발달된 문화일수록 폭력을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록 피부 접촉 문화가 발달하지 않는 사회에서 자란 어린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성생활이 크게 제약받지 않는 사회에서는 이들 역시 성인이 됐을 때 폭력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프레스콧의 주장에 따르면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사회들은 주로 육체적 쾌락을 박탈당한 사람들로 구성된다고 한다. 인생의 결정적 두 단계인 유아기 또는 성인기 중에서 어느 한 시기에라도 피부 접촉을 통한 사랑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폭력 성향으로 기울게 된다는 것이다. 피부 접촉을 권장하는 사회에서는 절도라든가 광신적인 종교 조직 등을 볼 수 없고, 부의 지나친 과시로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위도 잘 보이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아 체벌이 성행하는 사회에서는 노예 제도, 잦은 살인 고문, 심지어는 원수의 수족을 절단하는 행위 등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여성 학대가 극심하고, 하나 또는 여러 가지의 초자연적 존재가 개인의 일상을 간섭한다고 철저히 믿는다.
인간 행위에 대한 오늘날의 이해는 피부 접촉의 많고 적음이 어떻게 폭력성의 발현과 그런 상관관계를 갖게 됐는지 아직 속 시원하게 설명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그렇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프레스콧의 연구 결과는 둘 사이에 뚜렷한 상관관계가 존재함을 증언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유아기에 피부 접촉이 빈번하고 결혼 전에 성관계가 인정되는 사회가 폭력 성향의 사회가 될 상대 빈도는 2퍼센트이다. 이러한 빈도의 발생이 우연의 소산일 확률은 1:125,000이다. 나는 아직 이와 같이 정확한 예측을 가능케 하는 표현 변수를 본 적이 없다." 사람은 어렸을 때는 피부 접촉에 목말라 하고 다 자라서는 성적 접촉을 갈망하게 마련인 모양이다. 아이들이 그렇게 목말라 하는 피부 접촉을 누리면서 자랄 수 있다면, 그들은 공격성, 지역성, 지나친 의식 행위,사회 계층 간의 갈등 등에서 초래되는 인간의 야만성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도 자라는 과정에서 앞에서 열거한 야만성을 경험하게 되겠지만, 그들이 이룩하는 사회는 파충류의 두뇌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일 것이다. 프레스콧의 연구 결과가 옳다면 핵무기와 피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연구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어린이 학대, 성생활의 심한 억압 등은 인류의 평화를 해치는 죄악이다. 인류의 미래에 공헌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신의 아이를 자주 껴안아 주라. - P656

664-6 현대 과학의 씨앗이 이미 알렉산드리아에서 뿌려졌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 씨앗이 깊게 뿌리를 내려 큰 나무로 일찍 성장할 수 없었을까? 왜 서구 문화는 그 후 1,000년이나 지속된 암흑 시대라는 혼수상태에 빠져들게 됐을까? 암흑시대는 콜럼버스,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그들의 동시대인들에 의해서 결국 최후를 맞는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미 이룩했던 것들이 이 무렵에 와서 재발견되고는 했다. 앞에서 던진 질문에 나는 간단히 답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히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융성하던 전 시기를 통하여 과학자들이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주장이나 가정에 도전했다는 기록이 단 한 건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별의 영구 불변성은 의심했지만, 노예 제도의 정당성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과학적 발견과 과학 지식은 일부 기득권층만의 소유물로 남아 있었다. 그 위대한 도서관 안에서 벌어지던 새로운 발견들이 일반 대중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새로운 발견은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아무도 발견의 내용과 의미를 대중에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연구 결과가 대중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했다. 기계와 증기 공학의 발견들은 오로지 무기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데 이용되거나, 아니면 왕의 흥미를 자극하고 미신을 부추기는 데에 쓰였을 뿐이다. 과학자들은 기계가 언젠가는 사람을 노예의 상태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유일한 예외가 아르키메데스였다.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머무는 동안에 물 나사water screw를 발명했는데, 이것은 아직도 이집트에서 경작지에 물을 대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아르키메데스도 기계 장치가 과학 자체의 위대성에 비하여 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대에 이루어진 위대한 업적들의 거의 대부분이 실제로 응용되지 못하고 잊혀졌다. 이렇게 됨으로써 과학은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지 못했다. 지적 발전의 정체, 비관주의의 확산, 신비주의에의 비참한 굴복 등에 길항할 수 있었던 그 어떤 기제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폭도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불을 지르고 소장품과 장서를 약탈해 갔지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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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4 예를 들어 서유럽적인 학과를 가르치는 기술을 습득한 교사와 서유럽적인 형식에 따라 행정 사무를 수행하는 방법을 습득한 관리, 프랑스식 공공법 절차에 따라 나폴레옹 법전의 재탕을 적용하는 요령을 습득한 법률가가 그들이다.
인텔리겐차가 존재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단순히 2개의 문명이 접촉했을 뿐 아니라, 두 개의 문명 가운데 한 쪽이 다른 쪽의 내적 프롤레타리아 안에 흡수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추론해도 틀림이 없다.
그와 동시에 인텔리겐차의 생활에 역력히 나타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그것은 인텔리겐차는 나면서부터 불행하다는 사실이다.
이 연락 장교 계급은 자기를 낳은 양친이 속하는 종족의 어느 쪽에서도 따돌림을 받는 혼혈아의 운명적인 불행을 맛보아야 한다. 인텔리겐차가 자국민으로부터 소외당하고 멸시당하는 것은 인텔리겐차의 존재 자체가 치욕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인텔리겐차가 있었다는 사실이, 그 문명 사회는 비위를 맞추어야 하고 싫어도 피할 수 없는 사회였음을 상기시키는 실마리가 된다. 바리새 인은 로마의 세리와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젤당(로마의 지배에 반항한 열광적 유대교도)은 헤롯 당원 로마파(친 로마파의 유대인)와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그런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상기하게 된다.
이처럼 인텔리겐차는 본국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동시에 그 풍습과 기술을 그처럼 힘들여 재치있게 외교 관계를 득한 바로 상대국으로부터도 존경받지 못했다. 저 역사적인 인도와 영국과의 초기 관계에서 영국령의 인도 당국이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양성한 힌두교의 인텔리겐차는 언제나 영국인의 조소의 대상이 된 게 그 좋은 예이다. ‘영국적 교육을 받은 인도인‘인 ‘바부‘가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면 할 수록 인도인이 볼 때 유럽 인, 특히 영국인인 ‘사히부‘들은 한층 더 심술궂게, 아무래도 지울 수 없는 잘못된 영어의 미묘한 부조화를 웃음거리로 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웃음은 설령 별로 악의가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인텔리겐차는 이중으로 우리가 정의한 프롤레타리아에 합치한다. 그들은 하나의 사회가 아닌 두 가지 사회 ‘안에‘ 있으면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그 역사의 처음 단계에서는 두 가지 사회 체제의 쌍방에서 없어서는 안 될 기관으로 느낌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위로마저 빼앗기고 만다. 왜냐하면 인적 자원 자체가 상품화된 곳에서는 공급을 수요에 맞추는 것은 거의 당연한 일로서 때가 되면 인텔리겐차는 생산 과잉과 실업으로 고민하게 되기 때문이다.
표토르 대제는 많은 러시아 관리를 필요로 했고, 동인도회사가 많은 수의 서기를, 메메트 알리도 일정 수의 이집트 인 방적공과 조선공을 필요로 했다. 그렇게 되면 도공들이 인간 점토를 빚어 그들을 제조하기 시작한다. 인텔리겐차 제조의 과정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시작하기보다 그만두는 것이 어렵다.
왜냐하면 이 연락 장교 계급은 그들이 봉사해서 이익 얻은 사람들에게서조차 경멸받지만, 그 직업의 단점은 그 일원이 되는 자격을 갖춘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인텔리겐차가 무척 경기가 좋아 보이기 때문에 상쇄된다. 지망자의 수가 고용의 기회와 전혀 균형이 잡히지 않게 증가하여 일자리를 얻은 최초의 인텔리겐차 주위에는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인생에서 퇴보한데다가 세상에서 소외당한 지적 프롤레타리아의 무리가 우글거리게 된다. 소수의 러시아 관리에 무수한 ‘허무주의자‘가 합치고, 소수의 하급 서기에 무수한 ‘실의에 빠진 학사‘들이 무리를 짓는다.
인텔리겐차의 고뇌는 이전보다 이후의 상태에서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다. 사실 우리는 인텔리겐차가 운명적으로 짊어지고 있는 불행은 시간의 산술 급수적 진행에 대해 기하 급수적 비율로 증대한다고 하는 하나의 사회적 ‘법칙‘을 세워도 좋을 정도이다.
17세기 말경부터 모습을 나타내는 러시아의 인텔리겐차는 이미 1917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볼셰비키 혁명 때에 쌓인 원한을 뱉어 내었다. 18세기 후반부터 모습을 나타내는 벵골의 인텔리겐차는 오늘날 인텔리겐차의 출현이 50년 내지 1백년쯤 뒤진 영국령 인도의 다른 지방에서는 아직 볼 수 없는 혁명적인 과격함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사회적 잡초가 번식하는 것은 본래 그것이 발생한 땅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 그것은 반 서유럽화한 주변의 나라들 뿐 아니라, 서유럽 세계의 한가운데까지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중등 교육과 대학 교육까지 받았으면서 훈련된 능력의 적당한 배출구를 얻지 못한 하층 중산 계급이 20세기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당과 독일의 국가사회당(나치스)의 주축이 되었다. - P482

491-3 그뿐 아니라, 설령 우리가 드디어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배신의 과정은 몹시 시간이 걸리고 힘드는 일이다. 앞으로 아무리 우리가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도 그 과정을 희망대로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뭐니 뭐니 해도 지금부터 1천 2백 년 이상이나 전에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회가 교회의 태내에서 가냘픈 갓난아이로서 탄생한 이래 우리와 우리의 조상이 그 안에서 태어나 성장해 온 전통을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데카르트·볼테르·마르크스·마키야벨리·홉스·무솔리니·히틀러 등이 우리 서유럽 사회 생활을 비그리스도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왔으나 그들의 청소나 소독은 단지 부분적인 효과를 올린 데 불과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스도교의 바이러스 내지는 만능약이 서유럽 사회의 혈액 속에 들어 있는ㅡ그것이 저 불가결의 액체(혈액을 말함) 바로 그 자체의 별칭이 아닌 한ㅡ서유럽 사회의 정신 구조에서 완전히 제거되고 헬라스 사회처럼 순수한 이교 사회가 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우리의 조직 안에 있는 그리스도교적 요소는 단순히 모든 곳에 편재해 있을 뿐 아니라, 프로테우스처럼 자유자재로 변신한다. 그의 장기의 하나는 그것을 박멸하기 위해 쓰이는 강력한 살균제 그 자체 속에 자기의 본질을 농후하게 숨어들게 함으로써 절멸을 면하는 점이다.
우리는 이미 반그리스도교적 근대 서유럽 철학의 반그리스도교적 적용을 지향하는 공산주의 속에도 그리스도교적 요소가 들어가 있음을 지적했다.
현대의 반서유럽적인 온건주의의 예언자들인 톨스토이나 간디도 그들의 사상이 그리스도교에서 자극을 얻은 것임을 결코 숨기려 하지 않았다.
상속권을 박탈당하고 서유럽 사회의 내적 프롤레타리아에 편입되는 시련을 겪은 여러 집단 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꼴을 당한 것은 노예로서 미국에 보내져 온 미개의 아프리카 흑인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기원전 최후의 2세기 동안에 다른 모든 지중해 연안 제국에서 로마 시대의 이탈리아에 끌어모아져 온 노예 이민과 닮은 것임을 알았다. 또한 미국에 끌려온 아프리카인 농원 노예는 이탈리아에 끌려온 오리엔트 인 농원 노예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가해지는 거대한 사회적 도전에 종교적 응전으로 대처했음을 살펴보았다.
이처럼 양자 사이에는 유사점이 인정되나 중대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이집트와 시리아와 아나톨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끌려온 노예 이민은 자기네들이 가져온 종교 안에서 위안을 찾았으나, 북아메리카의 아프리카 인 노예는 그들 주인의 세습 종교 안에서 위안을 얻었다.
이 차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부분적으로는 분명히 이 두 경우 각 노예의 사회적 전력(前歷)의 차이에 의해 설명이 된다. 로마 시대의 이탈리아 농원 노예는 주로 역사가 길고 교양이 깊은 오리엔트 주민 출신자였다. 따라서 그 자손들이 그들의 문화적 전통에 집착할 것은 당연히 예기되는 바이지만, 이에 반해 아프리카 흑인들의 선조 전래의 종교는ㅡ그들 문화의 다른 어느 요소도 마찬가지지만ㅡ도저히 그들의 주인인 백인들의 우월한 문명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 못 되었다.
이 차이점이 바로 서로 다른 결과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이 되지만, 그러나 그 차이를 완전하게 설명하려고 한다면, 이번에는 양쪽 주인의 문화적 차이도 고려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
로마 시대의 이탈리아에서 오리엔트 인 노예는 그들의 주인인 로마 인이 종교적 진공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실제로 그들 자신의 종교적 유산 이외에는 달리 종교적 위안을 얻을 것이 없었다. 그들의 경우 값비싼 진주는 노예의 유산 속에 있었지 주인의 유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서유럽 사회의 경우 세속적인 부와 권세는 물론이거니와 정신적 재보 또한 노예를 혹사하는 지배적 소수자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정신적 재보를 소유하는 것과 그것을 남에게 나눠 준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점차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노예 소유자의 손이, 같은 인간을 노예로 한다는 모독 행위로 그 신성한 정신적 양식을 더럽혀오기는 했지만 그것을 원시적 이교를 신봉하는 그들의 희생자에게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 한층 더 놀라운 현상으로 생각된다. 노예를 혹사하는 복음 전도자는 도대체 어떻게 하여 그처럼 지독한 학대를 가하여 정신적으로 떠난 노예의 마음을 어떻게 감동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그러한 상황에서도 개종자가 생겨났다면 확실히 그리스도교는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생명력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종교란 이 지상에서 인간의 영혼 이외에는 거처를 갖지 않으므로 서유럽의 신이교 세계(그리스도의 신앙을 잃고 이교의 상태로 돌아간 세계)에도 아직 여기저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아마도 성중에는 50명의 의로운 자가 있을지라도"
사실 미국의 노예 전도를 보면 어디까지나 신앙을 버리지 않는 그리스도교도 몇 사람이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흑인 노예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실은 한 손에 성서를 들고 한 손에 매를 든 농원의 노예 감독의 전도 사업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존 G. 피라든지 페터 로스 클라베르 같은 사람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된 일이다.
그것은 노예가 주인의 종교로 개종한다고 하는 기적으로부터 생긴 결과로서, 내적 프롤레타리아와 지배적 소수자 사이에 항상 볼 수 있는 분열이 서유럽 사회의 사회 체제에서는 지배적 소수자가 포기하려고 해 온 그리스도교에 의해 치유되어 가고 있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더구나 미국 흑인의 개종은 근년의 그리스도교 전도 활동이 거둔 수많은 승리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 환하게 빛나 보이던 신이교적인 지배적 소수자의 전도가 급속히 빛을 잃고 계속되는 전란으로 고민하는 우리 시대에 있어,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의 모든 가지 속을 다시 생명의 수액이 맥맥이 흐르기 시작하고 있음이 분명히 눈에 보인다.
이러한 정경을 보면 서유럽 사회 역사의 다음 장은 결국 헬라스 사회 역사의 마지막 단계와는 다른 방향을 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적 프롤레타리아가 일구어 놓은 문명의 흙 속에서 새로운 교회가 싹트고 쇠퇴하고 해체되는 한편, 그런 문명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유언 집행인과 유산 수취인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혼자서 서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한 문명이 뜻하지 않게도 지금까지 뿌리치고 밀어내려 하던 선조 전래의 교회의 팔에 결국 안기게 되어 치명적인 전략을 면하게 될 것 같다. - P491

509-10 북미 인디언은 최초 영국인 개척자가 도착한 그 순간부터 280년 후인 1890년 수 전쟁에서 인디언의 최후 무력 저항 시도가 분쇄될 때까지 거의 ‘도망쳐 다니기만‘ 했기 때문에 그들이 유럽 인의 침략이라는 도전에 대해 창조적인 종교적 응전을 할 수 있었다는 일 그 자체가 주목할 만한 일인데다 한층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인디언의 응전이 온건적인 성질이었다는 점이다. 인디언의 전투 단체에서 예상된 창조적 응전은 어느 정도 그들 자신의 모습을 본뜬 이교적 종교ㅡ이로쿼이족의 올림포스 또는 아스가르드 같은 것ㅡ를 창조하거나, 아니면 그들 공격자인 칼뱅적 신교의 가장 전투적인 요소를 받아들이거나, 어느 하나였다. 그런데 1762년의 무명 예언자 델라웨아를 비롯해, 1885년경 네바다에 출현해 인디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워보카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예언자들은 그와는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복음을 설파했다. 그들은 평화를 내세우고 그들의 제자들에게 화기 사용을 비롯해 그들의 적인 백인으로부터 배운 일체의 기술적 물질적 ‘개량품‘의 사용을 금하도록 요구했다. - P509

512-3 그런데 사실 오늘날 야만인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 한가운데에서가 아닌가? "고대의 문명은 밖에서 수입한 야만인 때문에 멸망하였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야만인을 키우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세대에서 우리의 바로 눈앞에서 한 국가 또는 국가라는 한 형태로, 이때까지 그리스도교 세계였던 그 사회의 주변이 아니라 중심에 다수의 신야만인 전투 단체가 편성되는 것을 봐오지 않았던가?
파쇼 전투 부대와 나치스 돌격대의 전투원들은 그 정신에 있어 야만인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은 자신들이 그 사회의 의붓자식이며 풀어야 할 원한을 가진 학대받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차없이 무력을 행사하여 ‘해가 비치는 곳‘을 획득할 도덕적 권리를 갖고 있따고 그렇게 선동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 선종이 바로 겐세릭이나 아틸라와 같은 외적 프롤레타리아의 수령들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방위 능력을 잃은 세계를 약탈하러 갈 때에 언제나 부하 전사들에게 타일러 주던 가르침이 아니었던가.
1935~36년의 이탈리아ㅡ아비시니아 전쟁(이티오피아 전쟁)에서 검은 피부가 아니라 검은 셔츠가 야만의 표지였음은 확실하며, 검은 셔츠를 입은 야만인 쪽은 그가 희생물로 하였던 검은 피부의 야만인보다 훨씬 무서운 흉조였다. 검은 셔츠를 흉조라고 하는 것은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광명을 배반하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며, 위험한 까닭은 죄를 범하는 수단으로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선조 전래의 기술을 갖고서 그것을 신에 대한 봉사에 유용하게 쓰는 대신 악마에 대한 봉사에 전용했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나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여도 아직 문제의 근본까지 파내려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이 이탈리아의 신야만주의가 도대체 어떤 원천에서 나왔는가 하는 거을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솔리니는 전에 "내가 이탈리아를 위해 하고 있는 것은 대영 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영국인이 영국을 위하고, 또 위대한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가 프랑스를 위해 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말한 일이 있다. 이 이탈리아 인의 말을 우리 자신의 선조가 이룬 업적의 희화라고 일소에 붙이기 전에 우리는 희화라는 것도 인물의 특징을 실로 잘 잡아서 표현하는 수가 있다는 사실에 반성할 필요가 있다.
문명의 길을 외면한 이탈리아 신야만인의 흉측한 얼굴 속에 그가 모범으로 찬양한 영국인ㅡ클라이브와 드레이크와 호킨스 등ㅡ의 모습이 약간 보인다고 자인하지 않을 수 없으나, 우리의 질문을 좀더 깊이 파고들어갈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조사에 의하면, 지배적 소수자와 외적 프롤레타리아의 싸움에서 처음에 공격을 거는 것은 지배적 소수자 쪽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지 않을까?
이 ‘문명‘과 ‘야만‘과의 사이에 벌어진 싸움의 역사를 쓴 것은 거의 전부가 ‘문명‘진영에 속하는 필자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저 고전적이고 죄 없는 문명의 아름다운 영토 안에 야만과 전화와 살육을 들여오는 외적 프롤레타리아의 모습은 아무래도 사실의 객관적인 묘사가 아니라, ‘문명 쪽이‘ 자기가 도발하여 반대 공격의 목표가 되자 그 분노를 표현한 것처럼 생각된다.
야만인의 적에 의해 쓰여진 야만인에 대한 고소장은 결국 다음의 시와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 동물은 맹랑한 놈이다
때리면 덤벼든다! - P512

537-9 방종과 자제
해체기 사회 특유의 방종이나 자제의 출현을 확인한다는 것은 다소 곤란할지도 모르겠다. 이 두 가지 형태의 개인적 행동 양식은 여하한 사회적 환경에서도 인간 개개인이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개 사회의 생활에 있어서도 오르기아(난행)적 경향과 금욕적 경향을 찾아볼 수 있고, 또한 이 두 가지 기분은 해마다 계절 따라 주기적으로 바꾸어 가며 구성원의 감정을 집단적으로 표현하는 부족 전체의 의식 형태를 취하여 나타난다. 그러나 해체하는 문명이 생활 속에서 창조성을 대신하여 나타내는 방종에 의해 우리가 뜻하는 것은 이와 같은 원시적 감정의 유출보다도 더욱 엄밀히 규정되어 있는 것이 있다. 우리가 뜻하는 방종은 창조 활동 대신 계율에 반대되는 설ㅡ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또 이론적이건 철학적이건ㅡ이 받아들여지는 심적 상태이다. 그러면 이런 뜻에서의 방종의 예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창조성 대신 나타나는 또 하나의 현상으로서 그것과는 정반대의 태도인 자제의 예와 병행하여 동시에 보아 나가면 가장 확실하게 규명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헬라스 사회 동란 시대에, 쇠퇴 후 최초의 세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방종과 자제의 대립에 대한 구체적인 예가 플라톤이 묘사한 「향연」속의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 「국가」속의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의 모습에 나타나 있다. 감정의 노예가 된 알키비아데스는 실천상의 방종을 대표하고 있으며 ‘힘이 정의이다‘라는 설을 주장하는 트라시마코스는 똑같은 분위기를 이론상으로 대표한다.
헬라스 사회 역사의 다음 단계에서 창조 대신 행해지고 있는 이 두 가지 양식의 자기 표현을 시도한 각 대표자가 자기들의 행동 방식이야말로 ‘자역에 따라 사는‘ 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여기에다 관록을 붙이려고 했던 것을 인정할 수 있다. 방종이야말로 지금 말한 것 같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 것은 에피쿠로스의 이름을 함부로 인용하여 그 이름을 더럽혔기 때문에 에피쿠로스파 시인 루크레티우스로부터 그 당치 못한 행위를 심하게 힐책당한 저속한 쾌락주의자들이었다. 다른 한편, 금욕 생활이야말로 ‘자연적‘ 생활 태도로서 승인되어야 한다는 것이 키닉 학파ㅡ그 대표적 인물은 그 옛날 나무 통 속에서 생활했던 디오게네스이다ㅡ에 의해, 좀 더 세련된 형태로 스토아 학파에 의해 주장되었다.
헬라스 문명 세계에서 동란 시대의 시리아 문명 세계로 눈을 돌리면, 이와 똑같은 방종과 자제가 서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대립으로서 전도서 속의 차분하고 회의적인 이론에 의해, 그리고 은둔 생활을 하고 있던 에세네 교단의 경건하고 금욕적인 실천에 의해 대립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밖에도, 해체기에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그들 종교의 타락된 성욕주의와 그들 철학의 극단적인 금욕주의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점에서 미개인 기풍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우리의 문명이 있다. 인도·바빌로니아·히타이트·마야의 각 문명이 바로 그렇다.
인도 사회의 경우, 링가 숭배(남성 생식기 숭배)와 요가 사이에는 일견 불가해한 모순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대응하는 해체기 바빌로니아 사회의 사원 매음과 점성 철학 사이, 마야족의 인신 공양과 참회 고행 사이, 히타이트 사회의 키벨레와 아티스 숭배의 오르기아적 측면과 금욕적 측면 사이의 모순에 대하여 역시 놀란다. 이 4개의 해체기 문명에서, 구성원의 정신 속에 방권자의 차가운 분석적인 눈에 도저히 서로 융합될 수 없는 것처럼 비치는 관례적인 행위들 간에 정서적인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방종의 실천 속에도 모두 공통의 정도를 넘지 않는 사디즘(가학성 변태)적 경향이 가미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행동 양식이 오늘날 서유럽 사회 역사의 근대기라는 광대한 무대 위에서 또다시 그 역할을 재연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방종의 근거를 들기는 어렵지 않다. 이론의 영역에서 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매혹적인 부르짖음을 던진 루소가 방종의 예언자였고, 한편 오늘날의 방종의 실천에 관해서는 그야말로 ‘만일 당신이 그 기념비를 구하려거든 주위를 둘러 보라‘는 실례를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과는 반대로 여기에 대항하는 금욕주의 부활의 징조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이 사실에서 일단 잠정적으로 분명히 서유럽 문명은 쇠퇴했지만, 그 해체는 아직 그다지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냉소적인 결론을 내려도 좋을 것이다. - P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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