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설해버려야 속이 시원해지는 화체(火體)의 기질. 화체의 성격은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좋게 말하면 머리가 명석하고 투명한 성격이지만 세간생활에서는 그것이 본인에게 불이익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고스톱을 칠 때 고돌이 원단이 표에 들어오면 곧바로 얼굴 표정에 그 설렘이 반영되는 체질이라고 보면 쉽다. 화체는 도박에서 좀처럼 돈을 따기 어려운 체질이기도 하다. - P196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 그것이 최고의 통찰이다. 점의 궁극적 관심은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통찰에 있다. 자기를 통찰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신탁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많은 술객 도사들이 빠지는 함정이 이 통찰의 부족이다. 다른 사람 점은 잘 보아주는데 정작 자신의 점은 보지 못한다. 그래서 뻔한 함정에 빠지 210 곤 한다. 이 약점을 방지하기 위해 술사들은 크로스 체크를 하기도 한다. 서로 상대방의 팔자를 보아주는 방법이다. 인간은 상대방의 눈에 든 티끌은 밝게 보지만 자신의 대들보 같은 허물은 못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고난도의 고행을 겪어야만 얻어지는 경지이지 함부로 얻을 수 있는 급수가 아니다. 박 도사가 말년에 빠졌던 함정도 바로 자기 자신을 몰랐다는 사실이다.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천하의 박 도사도 자기를 아는 데는 실패했다. 자기를 안다고 장담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래서 계율과 스승이 필요하다. 스스로 계율에 의지해 자신을 점검해보고, 스승으로부터 끊임없는 경책을 받아야만 스스로 반성할 수 있다. 박 도사의 일생을 보면서 왠지 델포이 신전의 기둥이 자꾸 생각난다. ‘너 자신을 알라’를 음미하면서 불교의 ‘나는 없다’라는 무아(無我)의 법문을 연상하는 것은 현학적인 취미인가. - P209

인(寅) 호랑이
공경하고 경의를 표시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초목이 땅속에서 쭉 성장해 시기를 기다리는 상태다. 고대 중국인이 공경하며 두려워했던 동물은 백수의 제왕인 호랑이(중국에는 사자가 없었다)였으므로, 호랑이에게 인을 배당했다. - P234

조선시대 선비들이 홀로 있으면서 자신을 들여다보았던 수련이 신독이다. 아니면 선(禪)이나 기도를 해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해서 얼굴을 좀 더 맑게 다듬었으면 좋겠다. 시라소니는 아무 때나 사냥할 일이 아니고 필요할 때만 공격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 P273

탄허도 오대산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면 아마 6.25 때 좌익을 하다가 총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 주변의 연배들이 그렇게 죽은 사람이 많았으니까 말이다. 『주역』이나 마르크시즘이나 세상을 바꾸는 교과서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단 방법이 다를 뿐이다. 전자는 미신적(?) 방법이고, 후자는 과학적 방법이라고 주장했지만, 세월을 지내놓고 보니까 무엇이 정답이라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1980년대에 적극적으로 운동권에 가담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1990년대 들어와 입산수도로 방향을 돌린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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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친법 팔자의 ‘오이디푸스화’

자, 이제 사주분석의 마지막 코스에 접어들었다. 아마도 운세를 본다는 건 바로 이 최종단계에 대한 해석을 뽑아 보는 것일 터이다. 십신은 팔자가 ‘사회체’, 구체적으로는 사회적 표상들과의 마주침에서 일어나는 기운의 배치라고 했다. 여기엔 아직 주체와 대상이 없다. 기운들의 흐름과 그것들이 자아내는 사회적 표상과 욕망의 주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주름에 주체와 대상을 부여하는 것이 ‘육친법’이다. 육친(六親)은 말 그대로 ‘패밀리’다. 나를 둘러싼 인적 네트워크를 말한다. 기운이 동선을 만들고 동선이 관계를 만든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관계가 곧 동선의 편폭을 만들고, 그 동선이 기운의 배치를 구성한다. 이것이 육친법의 이론적 토대다.
예컨대, 비겁은 나의 수평적 확장이니 그것을 주체화하면 형제와 동료, 라이벌, 남편의 여자(강력한 라이벌이니 겁재 중의 겁재다^^) 등이 된다. 식신은 낳는 기운이니 여성에게는 자식이고, 남성에게는 처가 식구들 혹은 할머니 등에 해당된다(내가 할머니를 낳는다고? 이것이 우주의 아이러니다. 돌고 돌다 보면 할머니가 곧 나의 자식이 되기도 한다). 재성은 일단 아버지다. 나의 재물운을 규정하는 첫 번째 조 153 건이 아버지의 경제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성한테는 거기에 또다른 관계가 첨가된다. 바로 부인 혹은 애인이다. 아버지-여자-재물, 이것이 하나의 계열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그럼 여성한테 남편이나 애인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관성이다. 나를 극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지위나 조건을 규정하는 토대에 해당한다. 혹은 사회적 관계로 나아가는 창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 남성에게 관성이란? 바로 자식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 모양이다. 자식이 웬수라는 말도. 아버지와 아들은 기본적으로 상극이다. 특히 아들은 아버지를 이겨 먹기 위해 세상에 나온 존재다. 중국이나 로마의 황제들에게 가장 큰 적은 무엇보다 아들들이었다. 실제로 아들에게 암살당한 일인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만큼 아버지와 자식의 기운은 팽팽하다. 전자가 지나치게 세면 아들들이 맥을 못추고, 후자가 세면 아버지의 수명이 단축된다. 실제로 암살을 하지 않더라도 너무 잘난 아들을 두면 아버지는 기세가 꺾인다. 가장 극단적인 것이 자식을 낳자마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경우일 것이다. 비정하다고? 하지만 이게 자연의 법칙이다. 그래서 자식이 성인이 되면 집을 떠나야 한다(집에 있더라도 정신적으로 완전히 독립해야 한다). 성인의 기준은 생식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다. 곧 이팔청춘이면 성인인 것이다. 이후에도 부모와 같이 있으면 양쪽 다 힘들어진다. 이것은 단순히 사회경제적 차원을 넘어, 훨씬 더 근원적인 차원에 해당하는 문제다.
마지막으로 인성은 남녀 모두에게 엄마가 된다. 생명의 원천이 154 라는 의미에서 유추된 것이다. 재성은 돈, 관성은 관직, 여기까지는 이해할 만한데, 인성이 공부운·문서운이라는 건 좀 뜨악할 것이다. 공부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충전이고, 문서는 만물을 낳아 주는 대지의 이미지가 덧붙여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게 육친으로 따지면 엄마란다. 하여, 엄마복이 있다는 건 공부운이 좋다는 뜻이 된다. 하기야 맹모삼천은 있어도 맹부삼천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픽션이건 현실에서건 홀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해서라도 자식을 공부시키지만 홀아버지일 경우는 일찌감치 자식을 노동현장에 내놓은 경우가 많다.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도 엄마들이 주도하고 있지 않은가. 아빠들도 많이 ‘엄마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엄마의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친다. 아빠들한테는 자식교육보다 자신의 현장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것이 더 좋고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엄마와 공부가 원초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게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다. 원리가 이렇다면 자식교육을 위해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다닐 게 아니라, 엄마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자식교육에 훨씬 더 효과적이다. 엄마가 잘 살면 자식의 공부운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아무튼 이제 비로소 우리가 아주 익숙하게 알던 세상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이걸 물으러 역술원엘 가고, 그래서 역술원에서 주로 활용하는 영업매뉴얼도 이것이다. 실제로 적중률도 높다. 재물운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애인이 언제 생길지, 남편복이 있는지 없는지, 문서운이 있는지 없는지 등은 초식만 배워도 금방 드러난다. 너무 간 155 단해서 놀랄 지경이다. 하기사 뭔가 대단한 비의가 있으리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삶에 대한 망상이요 무지가 아닐까. 인생사라는 것이 누구든 생로병사의 리듬을 밟아 가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품게 되는 욕망이나 비전 또한 뻔하디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팔자의 주름은 그다지 개성적이지 않다.^^ 그러니 일단 자신의 팔자엔 뭔가 특별한 흔적(복이건 화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부터 던져 버리는 게 낫다. 헌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구?’ 여기서 그치면 아무것도 안 한 거나 마찬가지다. 족집게처럼 맞히면 뭐하는가,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는데……. 게다가 역술가의 입장에선 정직하게 말할 수가 없다. 대개 좋은 운보다 나쁜 운이 더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법이다. 그런데 그걸 곧이곧대로 말해 주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분노 아니면 공포다. 즉, 애꿎은 역술가한테 화풀이를 하거나 아니면 두려움에 떨면서 역술가한테 매달리거나. 그러다 보면 팔자는 더더욱 꼬일 수밖에 없다. 특히 궁합 같은 경우는 그야말로 ‘립서비스’에 불과하다. 이미 결혼을 약속했거나 뜨거운 연애중인 커플을 앉혀 놓고 살이 끼었다거나 인연이 그리 길지 않다든가 하는 말을 늘어놓겠는가. 고로 대부분 하나마나한 소리로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명리학의 담론적 배치다. 역술가(혹은 점쟁이)와 고객 사이엔 어떤 앎의 공유도 없다. 고객은 최소한의 기초도 없는 채로 자기 운명에 대한 해석을 역술가에게 맡겨 버린다. 이런 식의 일방향적 관계에선 언표 자체가 극도로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팔자의 주름에는 십신이나 음양오행 등 아주 풍성한 156 흐름들이 지층화되어 있건만 언표를 구성하는 건 육친을 둘러싼 아주 ‘유치한’ 사건들밖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육친법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가 필요하다. 당연히 이것은 근대 이전의 가족관계와 생활방식을 전제로 한 ‘주체화 방식’이다. 그래서 처삼촌이라든지 이종사촌, 처첩들 등 우리에겐 아주 낯선 친인척 관계도 상당수 들어 있다. 근대 이전에는 가족이라고 하면 당연히 가문 중심, 마을 중심의 친족관계를 뜻했다. 당연히 사돈의 팔촌, 이웃사촌 등이 팔자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가문은 대가족일 뿐 아니라, 노비들과 하인들까지 포함된 ‘사회체’다. 거기다 당파와 학파가 결합되어 있고, 왕과 백성이라는 커다란 배경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근대 이후 우리 시대의 가족은 ‘엄마ㅡ아빠ㅡ아이’라는 삼각형 구도에 갇히고 말았다. ‘국가ㅡ자본ㅡ가족’의 삼위일체의 권력구조에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심리적 회로가 결합한 결과가 바로 일부일처제를 바탕으로 한 핵가족 제도다. 근대 이전의 가문과 지금의 핵가족은 그저 스케일이 축소된 것만이 아니라 전혀 상이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가문이라고 하는 개념에는 토지기계와 촌락공동체, 봉제사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라는 ‘소셜 네트워크’등 폭넓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럴 때 십신은 자연과 공동체, 그리고 가족과 ‘나’라는 경계에 위치한다. 그래서 해석의 편폭도 아주 드넓다. 인성은 어머니이자 토지, 그리고 저 아득한 후대까지 뻗쳐야 하는 지혜와 명예 등이 포함된다. 백 년 뒤까지 이어지는 명예를 생각한다는 건 한편으론 이념적 망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어떤 불리 157 한 조건에서도 결코 자신의 존재성을 포기하지 않는 원천이기도 하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자식들한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제 우리 집안이 폐족이 되었으니 너희들이 학문을 할 때가 되었다."
무슨 뜻인가? 폐족이니 부귀공명을 누리기는 다 틀렸고, 이제 남은 건 오직 학문을 통해 명예를 지키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는 뜻이다. 출셋길이 꽉 막혔는데 공부는 해서 뭐해?ㅡ이것이 우리 시대의 통념이라면, 다산에겐 출셋길이 막혔으니 이젠 공부에 올인하자!는 것이 상식적 이치였다. 이것이 바로 인성운이다. 학문이 나를 부유하고 귀하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그 학문을 통해 나와 내 가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 인성이라는 용어는 이런 근원적 이치를 환기시켜 준다.
여성에게 있어 관성 역시 남편이자 남편이 속한 사회체이며 그것을 경영하는 능력과 연동된다. 한 여성이 혼인을 한다는 건 곧 어떤 집단 혹은 가문의 네트워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가문을 비롯하여 촌락공동체와도 깊은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마을마다 정신적 지주에 해당하는 여성이 있었고, 특히 대갓집 마나님의 경우는 마을 전체의 살림과 풍속을 주재하는 CEO에 해당했다. 『임꺽정』을 한번 읽어 보시라. 조선시대 여성들이 얼마나 위풍당당한지, 그 카리스마와 배짱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관운이다. 요컨대 근대 이전의 관계에선 육친이 혈족을 뜻하는 것이면서 부락공동체와 연동되어 있었고, 동시에 대자연과 천지만물로 이 158 어져 있었다. 사돈의 팔촌, 이웃사촌, 천지신명과 토지기계 등등. 하지만 서구의 도래와 더불어 그런 식의 ‘대칭적’ 연결고리는 끊어지고 말았다. 지금의 육친은 가족삼각형에 갇혀 있을뿐더러 공동체는 물론 자연과도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지독하게 ‘닫힌 구조’인 것. 자, 이렇게 사방으로 통하는 기운을 다 닫아 놓게 되면 팔자란 고작해야 자식의 성공, 아버지와 재물, 그리고 남편과 사회적 지위, 엄마와 부동산 혹은 자격증 등으로 고착되어 버린다. 왜소한, 너무나 왜소한! 니체가 근대인을 일러 ‘난쟁이’라고 부른 게 아마도 이런 맥락이 아닐까. 한편으론 이렇게 관계망을 극도로 축소시켜 놓으면서, 다른 한편으론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누려야 한다는 집착은 더더욱 증폭된다. 이것이 현대인들을 지배하는 욕망의 배치다.
하지만 팔자에선 이런 구조 자체가 설정불가능한 컨셉이자 난센스다. 이미 파악했듯이, 여덟 개의 카드로 오행의 순환이 불가능할뿐더러 설령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해도 그렇게 되면 상생뿐 아니라 상극의 작용도 두드러지게 된다. 예컨대, 식상과 관성은 서로 상극이다. 육친으로 말하면, 자식과 남편은 상극이다. 또 재성은 인성을 극하는데, 이건 육친으로 풀면 아버지는 엄마와 상극이다. 결국 부부는 상극이라는 뜻. 오이디푸스 신화가 이를 잘 말해 준다. 남근은 재물(자본)이고 아버지다. 엄마는 토지기계고 자연이다. 아들은 노동력. 아버지를 죽이고(극을 한다), 아비는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다(극을 당한다). 그래서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많은 경우 자식을 낳으면 부부 사이가 멀어진다. 가족주의하에선 자식이 부모의 교량이라고 선 159 전해 대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일단 여성은 아이와의 일체감이 남편으로 향하는 성욕을 충족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남편과는 육체적으로 멀어지는 것이다. 부부 사이가 나쁠 경우 아이가 잘 생기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어쩌다 관계를 하면 아이가 덜컥 생기고 다시 남편은 밖으로 돈다. 그러면 그 여성은 자식을 키우는 것으로 보상을 받는 것이다. 반대로 옹녀나 춘향이 같은 경우는 아이가 통 안 생긴다. 설령 생겼다 해도 자연유산되거나 스스로 포기하기도 한다. 식상보다는 관성이 더 강렬하기 때문이다. 관성이 ‘센’ 여성은 아이를 낳는 것보다 여러 남자를 거느리고 그걸 통해 자신의 사회적 존재감을 확인하는 데 더 주력하게 된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 또한 사회적 욕망이 강하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무심해지는 편이다. 결국 모든 것을 한꺼번에 얻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 사주명리학의 메시지다.
물론 육친의 덕을 두루 갖춘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유지하느라 정작 자기 자신은 기진맥진이다. 사주상으로 보면 일간이 지극히 신약할 수밖에 없다. 이런 팔자의 경우, 남들은 부러워하지만 정작 자신은 답답하고 공허하다고 느낀다. 크게 추락하지도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상승도 불가능한 채로 그럭저럭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 가진 다음 그걸 지키기 위해 자기를 버리는 것과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한두 가지는 포기해야 하는 것. 어느 쪽이 더 좋은 운인가? 아마 누구도 전자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죽음에 임박할수록 평범하고 무난한 팔자에 자긍심을 갖는 160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그게 콤플렉스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콤플렉스가 없는 것이 콤플렉스라? 허, 이런 역설이라니!
처음, 「입구」에서 말했듯이 운명의 지도에는 역설과 아이러니 투성이다. 어떤 인위적 척도도 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좋으면 저것이 어긋나고, 저것을 얻으면 이것이 사라지고. 겉이 아름다우면 속이 문드러지고, 바깥이 거칠면 속이 부드럽고. 혹은 돈이 들어오면 건강을 잃고, 권력을 가지면 사람을 잃게 되고, 사랑을 얻는 대신 친구를 버려야 하고…… 한마디로 팔자에는 온갖 가치들이 범람한다. 가치들의 범람 속에서 종국에는 가치들이 얼음 녹듯 녹아 버리는 것, 그것이 팔자의 우주적 연기법이다. 고로,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이 서로 ‘오버랩’ 되는 이 매트릭스에선 더 좋은 팔자도, 더 나쁜 팔자도 있을 수 없다. 게다가 지금은 기술문명의 절정에 해당하는 시대다. 인류사에서 의식주가 이렇게 편안했던 적이 있었는가? 그럼에도 현대인들은 이 풍요를 전혀 누리질 못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풍요로 인해 행복하다고, 자신의 팔자가 참 좋다!는 생각을 결코 하지 못한다. 보다시피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고 원망한다. 원초적 평등성 및 시대적 혜택 따위는 치지도외하고 오직 불만족과 불평등만을 느끼고 받아들인다. 아니, 그것들을 열심히 ‘생산’하기까지 한다. 대체 왜? 눈치챘겠지만, 음양오행과 십신, 그리고 육친법으로 이어지는 운명의 흐름을 오직 핵가족 삼각형이라는 좁은 틀에 몰아넣은 탓이다. - P152

근대 이후, 인간이 자연과 단절되면서, 그리고 오이디푸스 안에 갇히면서 자신만의 내밀한 공간을 만들었는데, 자의식 혹은 내면이 바로 그것이다. 밖으로 통하지 못하는 에너지와 힘들, 불균질한 소용돌이가 만들어 낸 협곡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협곡에 갇힌 힘들과 소용돌이는 심하게 뒤틀린다. 왜곡, 변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곧 트라우마다. 이런 논리로 보자면 현대인들은 계층과 조건에 무관하게 숙명적으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자의식과 내면이라는 공간 자체가 사건들을 ‘상처화’하는 거처인 탓이다. 아닌 게 아니라, 현대인들은 거의 다 상처받은 영혼들이다. 정신분석과 심리상담, 각종 치유프로그램이 만연되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더 놀라운 건 그 상처로부터 벗어나기를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상처가 만성화되면서 어느덧 상처와 자의식, 그리고 정체성이 합체가 되어 버린 탓이다. 자본주의가 덧씌운 운명의 굴레 혹은 ‘덫’! 그 구체적 양상을 한번 탐구해 보자. - P168

아토피를 앓는 건 그래도 괜찮다. 구체적으로 몸 곳곳에 흠집이 나니까 뭔가 노력을 하게 된다. 하기에 따라 음식과 몸이 맺는 관계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쌓을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소위 ‘마음의 상처’라는 것이다. ‘마음의 아토피’라고나 할까. 너무 많은 이들이 이 병을 앓고 있다. 남녀노소, 계급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자신을 상처받은 존재로 규정한다. 요즘 대세를 이루는 드라마 주인공들, 특히 재벌 2세들을 한번 보라. 시건방지고 재수없는 성격의 소유자지만 ‘알고 보니 상처가 있더라’가 기본 컨셉이다. 상처의 내용은 한결같다. "엄마한테 버림받았어." "아빠 때문에 엄마가 떠났어." 그리고 상처가 발견되는 순간, 갑자기 그 캐릭터는 순수하고 멋진 인물로 거듭난다. 이쯤 되면 상처가 곧 정체성이자 스펙인 셈이다. 이것이 팔자의 시대적 좌표다. 일간이 뭐건 팔자의 오행이 어떻게 되었든 일단 자신의 삶을 상처라는 심리적 기제에서 시작한다는 것. 이 점을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170 우리 연구실은 지식인 공동체다 보니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겉보기엔 다들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중상류층에 인텔리들이라 교양수준도 높다. 또 소위 ‘정상적인’ 가족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의 삶에 대한 엄청난 불만을 지니고 있다. 스스로 상처받은 존재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개중에는 아주 오랫동안 약물치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 상처의 유래다. 정신분석이 그렇듯이 대개 그 시원은 유년기에 있다. 심지어 뱃속의 태아 때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자신의 삶이 이렇게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용은 공통적으로 ‘애정결핍’이다. 어린 시절 사랑을 못 받아서 지금 이렇게 우울하고 무기력하다고? 이런 논리는 상당히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짜다. 왜냐하면 삶은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오래도록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좋은 기억은 물론이고, 나쁜 기억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산산이 흩어지는 것이 다반사다. 그런데 만약 20년, 30년이 넘도록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건 이제 사건 자체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내가 그 기억을 떠나 보내기를 거부하는 정신의 벡터가 작동한다는 뜻이다. 그 지점을 면밀히 통찰해야 한다. 즉, ‘나는 왜 이렇게 슬픈 유년기를 보내야 했을까?’가 아니라, ‘나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그 기억을 붙들고 있을까?’ 하는. 어떤 비극도 시간이 지나면 전후좌우 맥락이 파악되는 법이다. 그걸 깨달으면서 어른이 되어 가는 것 아닌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내가 그 기억을 계속 동일한 방식으로 곱씹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이미 그 기억은 원래의 사 171 건과는 무관한 나만의 ‘자의식’이 되어 버린다. 자의식이 공고해질수록 외부와의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아주 역설적이게도 소위 상처받은 이들일수록 그걸 빌미로(!) 타인에게 마구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특히 그 대상은 자신을 지극히 아껴 주는 엄마거나 애인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결국 모든 관계가 왜곡되어 버린다. 자, 그럼 여기서 ‘팔자’란 무엇일까? 어렸을 때 받은 상처가 그 단서라고 치자. 그럼, 그 다음엔? 그걸 계속 물고 늘어지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훼손시키는 것은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이것도 팔자인가? 만약 그렇다면 결국 자기 팔자는 자기가 만든다는 말이 맞지 않는가?
이어지는 또 하나의 전도. 상처라는 담론 속에서 자신은 결코 주체가 아니다. 상처를 입힌 자들만 클로즈업된다. 나는 그저 ‘당했을’ 뿐이다. 얼떨결에, 난데없이! 그렇다면 이상하다. 왜 이 상처의 서사에선 내가 무엇을 했는지가 전혀 부각되지 않는 걸까? 무섭고 약해서 그랬다고 한다면 그런 자신의 모습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나는 왜 그토록 어리석었을까? 혹은 무엇이 그토록 두려웠던 것일까? 요컨대 상처라는 담론 안에는 자신에 대한 관찰이 놀랄 만큼 빠져 있다. 그래서 그 과거는 여전히 현재에 개입하고 미래를 창조한다. 니체는 ‘양심의 가책’ 혹은 원한감정의 탄생이라는 측면에서 이 문제를 오래도록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바가 있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밖으로 발산되지 않는 모든 본능은 안으로 행해진다. ㅡ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인간의 ‘내면화’라는 것이다. 이에 의해서 인간은 172 비로소 훨씬 후에 ‘영혼’이라고 불리는 것을 개발해 냈다. 원래는 두 개의 얇은 피부막 사이에 펼쳐진 것처럼 빈약했던 저 전체 내면세계는, 인간본능의 밖으로의 발산이 저지됨에 따라 더욱더 분화되고 팽창되어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얻게 되었다. 낡은 자유의 본능에 대해서 정치조직(국가)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구축해 놓은 저 무서운 방벽ㅡ형벌도 이러한 방벽 중의 하나이지만ㅡ은 거칠고, 자유롭고, 방랑적인 인간의 저 모든 본능이 인간 자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적의, 잔인, 박해, 공격, 변혁과 파괴의 쾌락ㅡ이 모든 것이 이러한 본능의 소유자 자신에게로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의 기원인 것이다.

외부의 적과 저항이 없어지고, 관습의 억누르는 듯한 협소함과 꼼꼼한 형식 속에 처박혀진 인간은 참을 길이 없어 자기 자신을 찢고, 책망하고 물어뜯고, 괴롭히고, 학대했다. ‘길들이기’ 위한 우리의 창살에다 몸을 부딪혀 상처투성이가 된 이 동물, 황야에의 향수에 지쳐 스스로 모험, 고문대와, 불안하고 위험한 황야에 몸을 내던지지 않을 수 없었던 이 궁핍한 동물, 이 바보, 그리움에 지치고 절망해 버린 이 죄수야말로 ‘양심의 가책’의 발명자가 된 것이다. 게다가 이와 아울러 인류가 오늘날에도 역시 치료하지 못하고 있는 저 가장 무겁고 위험한 병도 비롯되었던 것이다. 즉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괴로워하는 병이다. 이것이 인간이 그의 동물적인 과거로부터 억지로 떼어낸 결과, 말하자면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생존조건 속으로 뛰어든 결과이며, 이제까지 그의 힘과 173 기쁨과 공포의 근거였던 오랜 본능에 대한 선전포고의 결과였다.(니체, 『도덕의 계보』, 93쪽)

논리와 표현은 다르지만 의역학적 관점과 매우 흡사하다. 외부와 연결되었던 다양한 채널들이 막히면서 그 힘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타자와 세상을 향해 흘러가야 할 기운이 출구가 막히자 자신을 물어뜯고 괴롭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의보감』을 빌려 말하자면, 예전에는 노권상(勞倦傷)이 많았다. 먹고 살기 위해선 매일같이 상당한 양의 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칭 골병이 많이 들었다. 날씨만 흐려도 뼈마디가 쑤시고 삭신이 오글거리는…… 우리 부모님들이 일상적으로 앓던 신경통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요즘은 몸을 거의 쓰지 않는다. 그래도 먹고사는 데 별 지장이 없다. 아마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조선시대 지체 높은 가문의 양반들보다도 몸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노권상은 해결되었다고 치자. 그런데 존재는 몸과 마음,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몸이 편하면, 몸의 에너지를 바깥으로 쓰지 않으면 그것이 정신이라는 무형의 창고에 쌓이게 된다. 유형이 무형으로 전변하는 것이다. 여기가 참 놀라운 지점이다. 몸이 편하면 자긍심이 높아질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사람은 활동이 줄어들면 자기에 대한 불만이 커진다. 대체 왜 그럴까? 원리는 간단하다. 생명은 언제나 활동을 원한다. 움직이고 접속하고 변형되고 다시 수렴되고 등등. 그 속에서만이 자신의 ‘우주적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 활 174 동지수가 낮아지면 그만큼의 물리적 압력이 정신적 스트레스로 쌓이는 게 당연하다. 그것은 결국 자기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금융자본의 증식, 디지털의 폭주 속에서 이 내면의 부동산 또한 무한증식된다. 불필요하게 비대해지면 거기서 자랄 수 있는 것은 종양뿐이다. 마음의 종양이 바로 무수한 정신병력, 분열증 혹은 강박증, 우울증…… 포괄적으로 말하면 화병이다. 수승화강이 안 되면 불은 위로, 물은 아래로 각기 따로 놀기 시작한다. 불이 위로 치성해서 제멋대로 요동치는 것이 바로 화병이다. 골병에서 화병으로! 종기에서 광기로! 이것이 우리 시대 문명생리학적 배치다. - P169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린 시절의 상처가 삶을 지배한다면 그건 그 사이에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는, 다시 말해 스스로 성숙을 거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보통의 심리치료는 어린 시절의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을 다시 확인하고 치유하며 통합하는 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경우 자신은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확신을 얻게 되지만, 반면에 부정적인 감정이나 고통을 유발한 책임을 부모나 주위 사람에게서 찾았기 때문에 자신은 희생자라는 감정에 사로잡히기 쉽다."(『마음은 몸으로 말한다』, 83쪽) 이것이 바로 오이디푸스의 덫이다. 핏줄, 더 구체적으론 일촌 관계를 떠나지 못하게 꽁꽁 묶어 두는 심리적 기제. 이렇게 묶여 버리면 남는 건 자의식의 과잉뿐이다. 생명의 에너지가 좁은 삼각형 안에 갇힐 때, 다시 말해 순환이 불가능해질 때 그 힘은 파괴적으로 분출된다. 자신을 파괴하거나 아니면 타인을 파괴하거나. 묻지마 범죄ㅡ총기난사나 방화 등ㅡ의 원천은 바로 이 지점이다. - P178

명리의 이치를 알게 되면, 일단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보더라도 인연의 그물망 속에서 보게 된다. 인연의 그물망이란 아주 다양한 가치들의 범람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 기존의 가치들이 무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가족삼각형’의 정상성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다. 예컨대, 자수성가한 자식의 경우, 우리는 보통 부모가 무능하거나 부모복이 없는 자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딛고 성공했다는 식으로 ‘성공의 서사’를 구성한다. 하지만 운명론의 차원 183 에서 보면 전혀 다르다. 그렇게 운이 센 자식이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가 파산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반대로 부모가 너무 기가 세고 강한 경우, 자식들이 제대로 자라기가 어렵다. 황제의 자식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 크게 실연을 당했을 경우도, 그게 전적으로 상대방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게 보는 건 상대를 주체로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상대방도 ‘자기도 모르게’ 어떤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건은 주체나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인연조건’이 있을 뿐이다. 시절인연이 맞으면 공통의 리듬을 갖게 되지만 시절인연이 어긋나면 아무리 서로를 원한다 해도 리듬이 맞을 수가 없다. 그럴 때는 뜻밖의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게 된다. 느닷없이 감정이 솟구치기도 하고, 부질없는 갈등이 야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인연을 맞이하기 위한 관문일 뿐이다. 실제로 주변사람들의 인생을 잘 관찰해 보면 그 점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남편을 잃으면서 아주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든지, 파산을 해서 큰 괴로움을 겪었지만 그 덕분에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든지 등등. 교통사고나 질병, 자살시도 등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도 아주 엉뚱한 인연을 만들어 내는 출구나 단서가 되기도 한다. 쉽게 말하면, 소위 ‘고난’이란 하나의 마디를 넘기 위해 내가 치러야 할 우주적 대가인 셈이다. 내 안의 자연, 내 안의 정기신을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씀으로써 인생 전체를 ‘리셋’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접근의 구도를 바꾸면 어떤 팔자든 흥미롭기 짝이 없다. 좋은 일이라 여긴 것이 나쁜 일의 단서가 되고, 억수로 재수가 없다고 여겼는데 184 그 덕분에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도 하고, 머리와 재능을 타고나서 행운인 줄 알았더니 그로 인해 간난신고를 겪기도 하고 기타 등등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다채로운 천태만상에 위계나 서열을 부여할 초월적 가치 같은 건 없다. 해서, 그냥 있는 그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다채로운 역동성이 가족삼각형으로 환원되는 순간 모든 팔자는 다 한심해진다. 있으면 있어서 괴롭고, 없으면 없어서 괴롭고, 사랑이 넘쳐도 상처요, 모자라도 상처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또 상처투성이다. 여기에 사로잡혀 있는 한 인생역전은 불가능하다. 삼각형을 뛰어넘는 시야와 감각을 훈련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 탓이다. 그 결과, 나이가 들수록 운명과 자의식, 그리고 트라우마가 하나로 중첩되어 버린다. 결국 남는 것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뿐!
주지하듯,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유래했다.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한 아들. 오이디푸스는 이 운명을 타고났다. 그래서 이 가혹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하지만 기어코 그는 이 운명의 궤도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운명의 장난이었다고? 그렇다. 하지만 그때 운명의 소종래는 어디인가? 마치 저 먼 별에서 주어지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 그것은 바로 자기 ‘안에’ 있다.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피할 생각이 없는 것이라고 해야 맞다. 오이디푸스는 왜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는가? 신의 저주로? 악령에 의해? 오 노! 그 자신이 엄마를, 엄마에 대한 표상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 185 다. 자기 안의 에너지 장을 끝내 바꾸지 못했기에 그렇게 모질게 버림받고도 결국 엄마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는 모두 자신이 만들어 낸 것으로 전적으로, 말 그대로 100%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타인의 그릇된 언행이라고 나에게 인지된 것, 심지어는 잘못된 정치·경제·사회적 현상 등 눈앞에 있는 모든 문제는 자신의 안쪽에 있는 문제"(허훈, 『마음은 몸으로 말한다』, 90쪽)이다. 도둑의 눈에는 세상 모든 사람이 도둑으로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모든 중생이 다 부처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모든 운명의 키는 자신 안에 있다. 억울하다고?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해법 또한 자신에게 있다. 서양의 의성 슈바이처는 말한다. "환자는 자기 속에 자신의 의사를 모시고 있다. 환자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병원으로 치료받으러 온다. 그러므로 훌륭한 의사로서 우리가 할 일은 환자 속에 있는 의사가 스스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책, 21~22쪽) 병이 이럴진대 하물며 운명에 있어서랴.
엄마의 품을 떠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일종의 ‘근친상간’이다. 스무 살이 되어도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면 그건 유아기처럼 엄마와 신체가 연동되어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은 분명 죄다. 윤리와 도덕을 범한 죄가 아니라 자연의 섭리를 어긴, 삶의 차서를 어긴 죄. 따라서 그 무지와 집착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 신탁이 예언한 바대로, 자신이 아비를 죽이고 엄마를 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먼 길을 떠난다. 눈을 찌른다는 건 186 더 이상 이전의 방식대로 세상을 보지 않겠다는 실존적 결단이다. 이제 엄마와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세계는 붕괴되었다. 눈을 찌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세계를 떠나 보낼 수가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한다. 그것은 혹독한 고행이기도 하지만 새로 태어나기 위한 치열한 이니시에이션, 즉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그 고행의 절정에서 그는 마침내 빛을 찾았다. 그 빛은 자신을 구하고 세상을 구원했다. 이제 더 이상 오이디푸스는 없다. 오이디푸스로부터의 탈주ㅡ안티 오이디푸스가 탄생한 것이다.
아주 역설적이게도 오이디푸스 신화가 말해 주는 바는 인간이란 결국 출가(出家)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출가, 곧 오이디푸스 삼각형으로부터 탈주할 때만이 운명의 지도를 바꾸는 길찾기가 가능하다는 것. 인류의 위대한 멘토인 부처와 공자, 예수가 다 출가자인 이유가 여기에 있으리라. 이들은 모두 국가와 계급, 소유에 대한 집착이 더더욱 고착화되던 흐름에 맞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젖힌 멘토들이다. 그들이 걸어간 길은 다 달랐지만 공통의 지반은 하나였다. 집을 떠나라! 집을 나와 ‘길 위에’ 있을 때만이 진리와 자유를 얻을지니. 이것이 "축의 시대"(야스퍼스)를 움직인 대전제였다. 12세기 독일 출신의 신학자 휴그는 『공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①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미숙한 초보자이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강인한 187 자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타향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완벽한 자이다. 미숙한 영혼의 소유자는 그 자신의 사랑을 세계 속 특정한 하나의 장소에 고정시킨다. 강인한 자는 그의 사랑을 모든 장소에 미치고자 한다. 완벽한 자는 그 자신의 장소를 없애 버린다.

② 완벽한 독서를 희망하는 자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이국의 땅이 되어야 한다. 시인은 노래한다. "나는 모른다. 도대체 어떤 감미로움이 사람을 고향으로 이끌어가는가? 그리고 고향을 결코 잊지 않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 현명한 사람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고향에 이별을 고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모든 존재는 원초적으로 출가자이자 이주민이다. 우리는 어느 날 문득 아주 우연히도 이 별에 도착했다. 부모의 몸을 잠시 빌린 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이다. 낯선 삶을 향하여,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하여. 그것만이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준 천지만물과 부모에 대한 유일한 보답이다. 운명의 지도가 필요한 건 이 때문이다. 집에 머무르면서 길을 떠나지 않는 자에게 지도란 무의미하다. 길을 떠난다는 건 그 자체로 오이디푸스적 표상으로부터의 탈주에 다름 아니다. 오이디푸스는 길을 떠났건만 정작 우리들은 오이디푸스에 머무르는, 아, 이 지독한 아이러니! 만약 오이디푸스가 다시 귀환한다면 그는 말하리라. 이제 그만 오이디푸스 삼각형에서 탈주하라고. 거기에는 어떤 출구도, 구원도 없다고. 오직 상처뿐인 188 팔자의 굴레를 벗어나 우주적 생명력이 약동하는 길 위에 나서라고.
사주명리학의 이치 또한 마찬가지다. 육친법의 좁은 틀에 갇히지 않고 생극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별들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덫을 박차고 나오는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하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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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친 혹은 십신

육친(六親)은 명리학에서 여섯(자신과 다섯의 오행)의 친족 또는 인맥관계 그리고 사회적 관계를 표현한 말이다. 그러니까 육친론을 통해 부모운, 배우자운, 자식운, 재물운, 학업운, 명예운 등을 살필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운명론을 통해 알고 싶은 대부분의 것이 여기에 있다.
육친론에서는 일간을 중심으로 오행의 판이 짜인다. 거기서 일간과 어떤 상생·상극 관계를 맺느냐를 보고 운을 파악하는 것이다. 일단 용어부터 알아두자. 일간과 같은 오행의 육친을 비겁(比劫)이라 한다. 그리고 일간이 생하는 육친은 식상(食傷)이다. 일간이 극하는 육친은 재성(財星)이고, 일간을 극하는 육친은 관성(官星)이며, 마지막으로 일간을 생하는 육친을 인성(印星)이라 한다. 다음 페이지의 그림1처럼 육친의 자리는 항상 같은 곳이니 자리로 기억해 두기 바란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비겁은 자기 자신·형제·동료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식상은 자식(여성에게만)·의식주·언어·시작 등을 뜻하며, 재성은 아내·재물·결과, 관성은 남편·조직·명예·시련, 인성은 공부·어머니·문서운 등과 관계가 있다. - P261

일간은 비겁, 식상, 재성, 관성, 인성과 별개로 구분하기 때문에 여섯 육친(六親)이 되는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일간은 비겁과 함께 취급하기 때문에 일간인 정화가 비겁의 자리에 놓이게 된다. - P263

비겁의 기호

육친 관계
친구, 선후배, 동업자, 경쟁자, 형제·자매·남매, 부하 직원
나의 영역
우주와 연잎
자기애 : 영역 확대 욕망, 자기본위, 욕망의 발생, 변화에의 의지, 우물
자존감 : 자존심, 칭찬에 민감
고집 : 오만, 간섭과 규제에 저항
영역 내 대인 관계 : 사적 대인 관계, 이타심과 기대
미적 감각 : 호불호 명확
협력과 경쟁 관계
협력, 경쟁에 강함
재성을 극함
금전 사건 : 자금 운용의 단순화
사업 확장 : 군겁쟁재
배우자 갈등 : 허세 - P267

그러나 진정한 자기애란 자기 영역을 확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역의 경계를 넘는 것에서 시작된다. 멀리 달아났다고 생각하겠지만 270 결국 부처님 손바닥 위다. 여기서 부처님 손바닥이란 초월자의 아우라가 아니라 자기 한계를 말한다. 아무리 달아나도 자기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그건 기존의 영역이 넓어진 것일 뿐이다. 우물을 벗어나야 하는데 우물의 사이즈를 넓히는 꼴이다. 그래서 비겁에서의 자기애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영역의 확대가 아니라 영역 밖으로 나가는 것,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의기양양하며 더 멀리 더 넓게 확대하려는 빈곤한 구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P269

비겁이 순환하려면 식상과 재성, 관성, 인성이라는 타자를 만나야 한다. 타자들은 비겁을 순환 관계의 장 안으로 인도한다. 비겁이 자신의 영역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장과 만나고(식상), 마디를 넘어 결과를 맺으며(재성), 스스로를 객관화시켜 공동체적인 관계를 구성하고(관성), 배움과 수양을 통해 새로운 주체를 생성(인성)해 가는 과정을 거치는 것, 그것이 비겁이 타자를 통해 순환하는 방법이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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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인.달사들과 만남을 가지면서 제산은 어느새 영기(靈氣)가 계발되었던 것 같다. 대체로 머리 좋은 사람들은 영기 즉 직관력이 부족한 수가 많다. 분석적이기 때문이다. 매사를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영기가 쇠퇴한다. 마치 모래시계의 양면과 같아서 논리가 강하면 반대쪽 사이드인 직관 쪽은 기능이 퇴화되게 마련이다. 반대로 직관이 강하면 논리가 약해진다.
필자가 많은 도사들을 만나본 경험에 따르면 산에서 ‘기도발’이 잘 받는 사람은 성격이 단순해 깐깐하게 따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쉽게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인다. 반대로 대학에서 논문 많이 쓰는 교수들을 만나보면 논리적이기는 한데 시원하게 터진 맛이 없다. 물증(物證)만 중시하고 심증(心證)은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답답하다. 기도만 많이 하고 학문을 하지 않으면 부황(浮黃)해지기 쉽고, 반대로 학문만 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성품이 속되게 변한다. 그래서 조선 중기의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을 강조했다. 학문을 어느 정도 연마했으면 마직막에는 이를 버 155 리고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이 순서라는 말이다. - P154

도가의 경전인 『음부경(陰府經)』을 보면 ‘은생어해 해생어은(恩生於害 害生於恩)’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원수에게서 은혜가 나오고, 은인으로부터 원수가 나온다는 뜻이다. 은인이 원수 되고 원수가 은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 P157

백운산 들어가는 계곡 옆에는 백운사라고 하는 허름한 절이 있다. 179 보기에는 허름하지만 이 절은 계곡의 물소리가 아주 좋다. 커다란 바위절벽 옆에 붙어 있는 이 절은 경내를 감싸고 흐르는 물소리가 아주 일품이다. 특히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의 계절인 봄이 되면 물소리가 나그네의 마음을 붙잡는다. 왜냐하면 번뇌를 없애는 데는 계곡의 물소리가 가장 특효약이기 때문이다. 화창한 봄날 노란 산수유가 만발한 계곡에서 물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만 가지 시름이 모두 사라지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수도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의식의 집중이다. 문제는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이다. 화두에 집중할 것인가, 염불에 집중할 것인가.
『능엄경』에서는 물소리에 집중할 것을 권하고 있다. 물소리에 대한 집중이 가장 쉬우면서도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소리에 집중하는 수행법이 바로 청각을 이용한 이근원통(耳根圓通)이다. 관음보살이 수행해서 효과를 본 수행법이 이근원통이다. - P178

기독교인들이 예배할 때 외우는 ‘주기도문’도 필자가 보기에는 주문의 일종이다. 신비주의를 거부하는 유교에서도 『서경(書經)』 서문이 주문의 대용품 역할을 한다. 그런가 하면 ‘옴-마-니-반-메-훔’의 여섯 글자가 전부인 육자대명진언(六字大明眞言)도 유명한 주문으 184 로, 산동네인 티베트에서 발효된 특유의 영성이 물씬 풍겨나오는 주문이다. 1992년에 베트남 출신의 세계적 종교지도자 칭하이(靑海)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필자는 부산 KBS 홀에서 처음 그녀를 상면했는데, 그가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던 수행 방법도 역시 인도.히말라야의 신들을 부르는 5단계 주문이었다. - P183

겪어본 사람들의 체험담에 따르면 박 도사는 입이 근질근질해서 도저히 말을 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했다고 한다. 거기서 함구하고 스톱하는 자제력을 갖추기는 웬만한 인내심 갖고는 어림없다고 한다. 십중팔구는 나가서 떠들게 마련이다. 고스톱의 핵심도 고와 스톱을 시중(時中)에 맞게 판단하는 것이지만, 인생사 전체도 따지고 보면 고와 스톱을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길흉이 결판난다. 조용헌이만 보아도 조금 아는 것 가지고 이렇게 떠들고 있지 않은가!
특히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그만 감동해 천기를 누설하는 경향이 많다. 박 도사도 어려운 상황일 때 자기에게 도움을 준 장덕진 장관의 요청을 거절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삼국지』의 제갈공명도 천하대사 운운하는 유비의 꾐에 넘어가지 않았더라면 재야에서 조용히 수도해서 틀림없이 신선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 중기의 토정 선생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잠언을 남긴 것 아닌가 싶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는 말도 있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잠언도 있다 195 는 것을 독자들은 염두에 두기 바란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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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 수행 가운데 위파사나 명상법이 있다. 그 명상법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건 보는 것이다. ‘보면 사라진다’가 이 명상법의 기본 원리다. 뭘 보는가? 자신의 번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어떻게 변화, 소멸되어 가는지를 보라는 것. 그러면 번뇌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보면 사라진다고? 잘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쉽다면 누가 못한담? 맞는 말이다.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다. 보기만 해도 사라진다는 명제는 방법적으로는 참 간단하다. 그런데 본다는 행위 자체는 실로 어렵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개는 자신도 모르게 실수로,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 당연히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 다음엔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주로 변명, 아니면 원망이다. 그래서 또다시 반복한다. 어떻게 보면 인생 전체가 이런 식으로 반복되는 쳇바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보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어떤 감정과 의식의 상태에 있는지를. 가장 간단하고도 근본적인 훈련은 호흡관찰이다. 호흡을 면밀히 관찰하노라면 온갖 잡념과 망상이 흘러가는데, 그것들을 잘 보기만 해도 무차별적으로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는 이치다. 하지만 이 120 것 자체가 엄청난 집중력을 요한다. 집중(集中)이란 ‘중(中)을 잡는다’는 말로 ‘지금, 여기’와의 완벽한 일치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집중력 자체가 자신의 행위와 말과 생각을 통찰하는 ‘마음의 근육’에 다름 아니다. - P119

그때 비장의 카드로 쓸 수 있는 오행이 바로 용신이다. 필요한 오행이 팔자 안에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용신으로 삼으면 되고, 원국에 없으면 지장간에 있는 히든 카드라도 찾아내야 한다. 만약 대운에 용신이 온다면 절호의 찬스라 여기고 힘을 충만하게 쌓아서 대운이 불리하게 바뀌는 시절을 대비해야 한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외부에서라도 끌어다 써야 한다. 무슨 뜻인고 하니, 인맥을 적극 활용하라는 것이다. 즉, 용신에 해당하는 기운을 많이 가진 친구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같은 기운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있으면 처음엔 잘 통하는 듯 보이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불통의 상태가 되어 버린다. 비슷비슷한 정서의 회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타자들의 향연’이라는 말이 있다. 낯선 것과의 마주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용신의 원리도 바로 거기에 있다. - P121

십신(十神) 팔자와 ‘표상’의 마주침

언급했듯이, 여덟 개의 카드로 읽을 수 있는 첫 번쨰 기호는 오장육부의 생리적 배치다. 오장육부 역시 음양오행에 배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배속은 곧 칠정, 곧 ‘희노우사비경공’(喜怒憂思悲驚恐)의 흐름이기도 하다. 이 칠정의 관계와 구성은 마음의 행로를 결정한다. 생리와 심리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존재성의 서로 다른 표현이자 이름이라고 보면 된다. 이 존재성이 사회적 조건과 마주치는 기운의 배치를 십신이라고 한다. 팔자의 생극적 흐름에 부여된 ‘사회적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일간을 중심으로 모두 열 가지의 힘이 형성되기 때문에 ‘십신’이라고 한다.
비겁(비견과 겁재)은 일간과 동일한 오행을 뜻한다. 일간이 을목이라면 목기를 지닌 카드들이 비겁이 된다. 비견(比肩)은 음양도 같기 때문에 말 그대로 나와 나란히 어깨[肩]를 겨루는[比] 기운이다. 나의 확대 혹은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겁재는 말 그대로 ‘나의 재산을 겁탈한다’는 의미인데, 나와 맞서는 라이벌이라 보면 된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겁재다. 겁재라고 하면 기분이 좀 언짢을 수 있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뺏길 게 있다는 건 그만큼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진 게 133 없으면 뜯길 것도 없는 법이다. 또 라이벌이나 적을 가지려면 유형이든 무형이든 그에 걸맞은 자산이나 내공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비견과 마찬가지로 나의 팽창 혹은 확대라고 볼 수 있다.
식상(식신과 상관)은 일간이 낳는 오행이다. 즉 내가 외부를 향해 생하는 기운이다. 밥, 말, 끼, 자식 등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일간과 음양이 같으면 식신(食神)이다. 말 그대로 밥그릇의 신, 곧 평생의 먹거리다. 식신이 있으면 어디를 가도 굶지는 않는다. 먹는 것도 좋아하고 먹거리를 만드는 것도 좋아한다. 좌우지간 먹는 것과 인연이 깊다는 뜻. 말도 유창하다. 자식복도 있다. 인생살이에서 ‘말’과 ‘밥’, 그리도 ‘생식’이 같은 계열임을 말해 주는 개념이다. 일간과 음양이 134 다르면 상관이다. 식신이 자연스러운 스텝이라면 상관은 일종의 엇박이다. 말이든 밥이든 생식이든 좀 ‘튀는’ 것으로, 일종의 불규칙 바운딩에 해당한다. 규칙을 일탈했기 때문에 때론 비범한 재능이 되기도 하고, 때론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상관(傷官; 관성을 상하게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연예인들, 그중에서도 예능인들이 특히 식상에 강하다. 말과 끼가 재산이요 밥그릇이지만, 그러다 보면 자칫 구설에 오르기 십상이다. 그런 점에서 말은 정말 힘이 세다.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 이 말이다. 또 말에 수반되는 끼(리액션 혹은 어팩션)도 포함된다. 말이든 끼든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런지는 의문이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들(혹은 행동)이 참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에 의해 사건이 구성되고 인연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칼보다 무서운 게 세치 혀"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경구들이 거기에서 나온 것이리라. 또 식욕과 성욕은 함께간다. 끼는 달리 말하면 에로스의 무의식적 표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요즘은 문화 전체가 ‘섹시’ 컨셉이니 그야말로 식상이 만발하는 시대인 셈이다.
다음, 식상이 낳는 기운이 재성(정재와 편재)이다. 일간을 중심으로 보면 내가 극하는 기운에 해당한다. 식상으로 기운을 내고 그걸 밑천으로 유형의 자산을 만들어 내는 힘, 그래서 재성이다. 재성이라고 하면 바로 돈을 떠올릴 테지만, 단지 화폐화된 것들만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화된 것들이 다 여기에 포함된다. 재성부터는 음양관계가 달라진다. 일간과 음양이 같으면 편재, 다르면 정재다. 편재 135 는 불규칙한 재성, 정재는 규칙적인 재성. 전자는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의 활동에 가깝고, 후자는 정규직이나 안정된 사업에 가깝다. 요즘 같은 시대야 정규직이 최고 선망의 대상이라 정재가 더 좋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정재는 좀 답답한 재성에 해당한다. 성실하고 믿음직하지만 다소 쫀쫀해 보이는 속성이랄까. 편재는 그와 반대다. 불규칙한 재물을 의미하니 재물이 들락날락하는 변수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 불안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똑 같은 액수를 가지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도 있다. 하여, 진짜 재물의 주인이 되려면 정재보다는 편재가 있어야 한다. 얼마를 버는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어떻게 버는가이다. 정규직을 지향한다지만 정작 직장인들의 꿈은 창업이나 독립 아니던가. 또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프리랜서다. 첫 출발도 그렇지만, 평생을 정규직에 복무한다 해도 정년을 하고 나면 결국 프리랜서로 귀환할 수밖에 없다. 아, 물론 우리 시대의 편재는 부동산이나 주식 등 투기성 자본이 많아서 편재를 이렇게 쓸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프리랜서가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다.
자, 일단 식신과 재성까지는 내가 주도하는 세계다. 내가 생하고 또 극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말하고 낳고 만들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이 리듬을 타야 한다. 말하자면 나의 존재성 혹은 기운을 발산하는 리듬이라 할 수 있다.
발산의 흐름이 있으면 수렴의 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재성 다음이 관성(정관과 편관), 곧 나를 극하는 기운이다. 왜 관성인가? 관(官) 136 이란 조직 혹은 그와 비슷한 관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나를 어떤 조건으로 밀어넣는 힘을 뜻한다. 내 활동의 바운더리와 토대를 구획하는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위치에 있건 내가 속한 조건이면서 동시에 책임을 지는 관계망이다. 그래서 조직력 혹은 리더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도 일간과 같으면 편관, 다르면 정관이다. 굳이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따라서 관성을 써야만 변화의 마디를 넘어갈 수 있다. 생물의 진화건 문명의 발전이건 혹은 혁명적 변화건 다 주체를 강하게 압박하는 어떤 장애물 혹은 문턱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선 먼저 고난이 확실하게! 주어져야 한다. 십신 가운데 ‘정관’을 최고로 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를 강하게 압박해 오는 조건에 처하게 되면 선택은 둘 중 하나다. 그 압박에 무릎을 꿇거나 아니면 밀고 당기는 과정 속에서 내가 다른 것으로 변용되거나. 소위 고난이나 역경이란 이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누구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힘과 덕성을 발휘할 수 없다. 인류학적으로 보면, 모든 종족, 모든 문명권이 청년들에게 이니시에이션(통과의례)을 거치도록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학교의 본래 목적 역시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시대엔 학교가 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 사회적 관계에 필요한 힘과 덕목을 한 가지도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전 독재정권 시절엔 학교가 억압과 금기의 장소였다. 이것은 관성의 상극이 지나친 경우다. 당시 전국민에게 암기를 강요했던 「국민교육헌장」이 잘 보여 주듯이, 모든 개인은 민족과 국가를 137 위해 이 땅에 태어났고, 그걸 연마하는 것이 학교였다. 이렇게 관성의 압박이 심하면 비겁이 제대로 활동하기 어렵다. 그래서 다들 개성과 창조성을 감추고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억압과 강제가 지속되다 보면 당연히 반대의 힘들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80년대 민주화운동이었다. 그때 대학생들은 저항과 투쟁의 상징이었다. 독재와의 투쟁, 그것이 그 시절의 통과의례였던 것이다. 80년대 학생운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당시 청년들은 정말 기세등등했다. 입학한 지 두어 달만 되면 시위에 참여하고 짱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투척한다. 바로 코앞에서 다연발 최루탄이 터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지금 청년들로선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용기와 배짱이다. 철학적으로는 더 기고만장했다.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인생을 역사와 혁명을 위해 기꺼이 바치겠다고 할 정도로 ‘지적 파토스’가 흘러넘쳤다. 나처럼 체력도 후지고 세계관도 영 모자랐던 경우도 시대적 소명에 대해 늘 되뇔 수밖에 없었던 시대, 그게 바로 불의 연대라 불리는 80년대다. 한편으론 고난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당시 청년들은 그 시대의 힘으로 청춘을 통과했으니 대단한 행운이기도 했다. 관성이라는 건 바로 이런 의미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상황이 되었다. 민주주의의 형식적 확대와 자본의 무한한 증식으로 학교는 이제 서비스센터가 되어 버렸다. 초중고의 목적은 오직 대학입시, 또 대학의 목적은 오직 취업(정규직)이다. 관성은커녕 온통 재성만을 연마하도록 주입한다. 시대적 소명 138 같은 건 사라진 지 오래고, 성공의 척도는 다만 연봉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학교에서도 또 집에서도.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즉 돈을 사회적 관계에서 어떻게 쓸 것인가는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소유에 대한 집착만 지독하게 키워 주는 셈이다. 재성이 곧 소유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데도 결국 우리 시대에는 재성이 소유와 즈익으로 고착되는 ‘홈파인 회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하여, 아이들은 교환 경제를 넘어선 증여와 보시에 대해선 듣도 보도 못하고 자라게 된다. 명리학적으로 보면 재성과 관성 사이에 철옹성이 놓인 것이다. 관성은 재성을 순환시키면서, 곧 내가 이룬 것을 사회적으로 환원하면서 비로소 작동한다. 그것이 재능이건 힘이건 돈이건 간에, 돈을 무작정 풀어서 방탕하게 쓴다면 그건 오히려 식상에 가깝다. 관성은 그 돈이 흐르는 방향을 규정하는 힘이다. 리더십이나 경영능력 같은 것에 해당한다. 이런 활동에는 명분과 의리, 그리고 사회적 차원의 인정욕망이 수반되어야 한다. 자신의 행동과 말에 책임을 지고 타자들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속성, 그것이 곧 관성이다. 그릇 혹은 내공이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이걸 연마하는 것이 청춘이고 학교인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시대 학교에선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연결되는 장이 없다. 교사와 학부모는 학생들을 모래알처럼 흩어 놓기 바쁘다. 경쟁을 부추기고 불안과 의심을 증폭시키고 여차하면 갈라 놓기에 급급하다. 책임감과 리더십은 고사하고 우정과 연대의 기초조차 배울 기회가 없다. 그래서 학생들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인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재성에 대한 탐착은 있는 139 대로 키우고 관성은 증발시키는 것, 우리 시대 교육이 얼마나 무용하고 위태로운지를 한눈에 보여 주는 중요한 지표다. 하여, 십대를 몽땅 학교에서 보내고서도 통과의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 청춘들이 부지기수다. 그 결과, 독재정권 시절보다 더 나약하고 무력한 청춘들이 되고 말았다. 엄청나게 많은 배려를 받고 있으면서도 늘 결핍과 박탈감에 시달리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자신들이 가장 불행한 처지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세상에 온전한 제도란 불가능하다. 이걸 이루면 저것이 부족해지고, 저걸 보충하면 이것이 모자라게 되는 법. 그것이 인생과 우주의 이치가 아닐지. 그래서 역사에는 진보가 있을 수 없다. 역사적 실천이란 어떤 정해진 목표지점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배치 속에서 ‘단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일 뿐이다. 다윈이 말하는 진화의 원칙도 마찬가지다. 생명의 진화에는 목표도, 방향도 없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우주의 중심이고 거기서 단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바로 진화일 뿐이다. 흔한 속담처럼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인 것이다.
관성이 낳는 기운이 인성(정인과 편인)이다. 인성은 일간인 나를 낳아 주는 기운이다. 나의 존재감을 높여 주는 무형의 베이스라 생각하면 된다. 관성의 혹독한 마디를 넘어야 인성에 도달한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모든 오행이 그렇지만 관성 역시 이중적이다. 나를 극하면서, 동시에 나의 베이스이자 모태인 인성을 낳아 주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관성의 단계를 제대로 밟지 못하면 인성을 생성시킬 수 140 없다. 나를 극하는 기운에 충분히 노출되어야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상생의 관계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럼, 나를 낳아 주는 기운이란 대체 무엇일까? 공부 혹은 지성이다. 생명의 원천이 앎이라는 사실, 사주명리학이 전해 주는 기막힌 메시지다. 인성의 인(印)은 도장이라는 의미다. 대지, 문서, 명예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 이때의 공부는 무형의 통찰력이다. 인간은 아는 만큼 살아 내고, 사는 만큼 알 수 있다. 인생의 행로에서 무지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죽음이 왜 두려운가?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이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죽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부처와 공자, 예수 등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이 하나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죽음의 공포로부터의 자유 혹은 해방, 예나 이제나 인류의 위대한 지혜는 모두 여기로 수렴된다. 문명이 발달하고 수많은 혁명이 일어나도 인류가 결코 종교적 가르침으로부터 떠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명과 혁명, 역사와 경제에 대한 담론들은 결코 죽음을 설명하지 못한다.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우주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의 지혜가 없다면 삶의 비전 또한 무력하다. 죽음이 배제된 삶, 그것은 반쪽 이하에 불과하다. 그래서 삶도 늘 위태롭다. 요컨대, 무지는 모든 번뇌의 원천이다. 하여, 공부는 선택이 아니다. 존재의 근원적 토대다ㅡ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내가 사주명리학에 매료된 가장 141 큰 이유가 바로 이 인성이라는 개념이었다. 한낱 ‘구복의 노하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공부운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고, 그것이 나의 존재감을 드높여 주는 상생의 기운이라니, 명리학이 운명의 우주적 비전으로 격상되는 순간이었다.)
인성은 바로 이 공부의 존재론을 말해 준다. 일간과 음양이 같으면 편인, 다르면 정인이다. 식상에서 재성으로 이어지는 발산의 흐름만 있으면 아마 사람들은 금방 탈진해 버릴 것이다. 발산의 흐름을 멈출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 흐름을 제어하고 거두면서 내적으로 단련시키는 리듬이 관성과 인성이다(‘십신’에 대해 좀더 탐구하고 싶으면 안도균, <운명의 열쇠를 찾아서>, 『누드 글쓰기』 참조).
자, 이렇게 해서 카드 여덟 개의 봉인이 또 하나 풀렸다. 음양오행과 생극의 동그라미 속에서 볼 때랑 십신의 흐름 속에서 볼때랑 느낌이 아주 다를 것이다. 물론 두 개의 차원을 동시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오행적으로 목/화가 많은 명리가 있다고 치자. 여기서 목화가 비겁과 식상인지 아니면 관성과 인성인지를 따져 봐야 한다. 둘다 목화지기가 많은 사주라고 해도 목화가 식상·재성인 경우와 관성·인성인 경우는 아주 다른 운명의 지도에 속한다. 용신을 뽑을 때도 마찬가지다. 목기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목기가 인성에 해당하는 것인지 식상에 해당하는 것인지에 따라 그 동선과 현장은 아주 달라진다. 예컨대, 계수 일간의 경우, 식상이 없는 팔자가 있다고 치자. 그래서 식상의 기운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는 식상이 목기운이다(→수생목). 식상은 ‘밥과 말, 끼’라고 했다. 그런데 142 그게 목기운이라고? 목기는 그 자체로 교육과 관련되어 있다. 우주적 인과론에서 보자면, 사람을 키우는 것과 나무를 키우는 것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용신은 말로 하는 교육, 강의와 글쓰기가 가장 적합하다. 이런 식으로 읽어 내는 것이다.
비겁, 식상, 재성, 관성, 인성 ㅡ이 열 개의 배치는 존재의 리듬이 ‘사회체’와 마주칠 때 각인되는 기본코드에 해당한다. 언제 어디서 태어나든 인생에는 이 열 개의 힘들이 각축한다. 누구든 자신의 힘과 재능을 발휘하여 밥벌이를 하고(식상→재성), 사회적 조건 안에서 관계를 만드는 훈련을 하고(관성), 그 과정에서 매 순간 배움을 닦아야 한다(인성). 이 과정을 밟지 않아도 좋은 사람이 있는가? 없다! 누구는 오직 밥벌이만 하고 누구는 오직 공부만 해야 한다면 그게 바로 신분사회다. 인류가 신분을 해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명리학적으로 보면, 신분사회란 모든 이들의 팔자를 한두 가지 방향으로 고정시켜 놓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신분사회가 해체되었다는건 이 편향된 고정성을 벗어나 모두가 십신의 전 과정을 스스로의 힘으로 겪어 낼 수 있음을 뜻하는 셈이다. 요컨대 이 십신은 계급과 세대, 직업과 성별을 불문하고 누구나 거쳐야 하는 관문들이다. 여기서도 차이와 운동, 곧 순환이 핵심이다. 식상이 재성으로, 재성에서 관성으로, 관성에서 인성으로 이어지는 이 리듬을 제대로 밟아야 일간인 내가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다. 그렇게 매끄러운 순환을 거치고 나면 그 힘으로 또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건 끊임없이 내가 143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운동과 차이는 같은 말이기도 하다. 일찍이 우임금이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일신우일신’ (日新又日新), 이것이 가능하다면 누구든 최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 P132

일간이 나의 명주고 비겁이 나의 수평적 확장이라고 했다. 그럼 비겁이 일종의 무게중심인 셈인데, 무게중심을 잘 지키려면 내가 스톡(stock)만 해서는 안 된다. 순환의 강밀도를 조정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밀고 당기고 조이고…… 비겁이 튼실하다는 건 바로 이 조절능력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겁이 강해지면 주체성이 확고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주체성이 아니라, 고집과 탐착이 강해진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아상(我相)이 견고해진다. 그렇게 되면 식상, 재성, 관성, 인성이 다 파극당할 염려가 있다. 반대로 비겁이 약하면 반대의 양상이 펼쳐진다. 자신이 그저 다른 힘들이 오고가는 통로가 되어 버리니 근기가 약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자기를 버리고 다른 오 145 행과 합(合)을 이룸으로써 다른 오행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일간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중심이 현저히 교란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때는 당연히 다른 힘들이 나의 서포터즈가 될 수 있도록 치열하게 훈련을 해야 한다. 결국 신강하면 신강한 대로, 신약하면 신약한 대로 다 그 나름의 강점과 애로사항이 있는 셈이다. 거기에 사회적 가치와 표상이 덧붙여질 때 각종 차별상이 부각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팔자가 좋다, 나쁘다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팔자의 잠재력을 보려면 이 차별상과의 대결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어떤 팔자를 타고나도 이 차별상 안에 들어가면 운명을 사랑하기란 불가능하다. 특이성이 사라진 곳엔 위계와 서열이 지배하게 되고 거기에선 모두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운명을 긍정할 수 있는 원초적 토대 자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생극의 파노라마에서 십신의 각축장으로 들어오면 특히 이 점을 더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팔자를 십신의 차원에서 재구성해 보면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나온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리듬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식상생재(食傷生財). 곧 식상이 재성을 생하는 경우, 이것은 유형적인 것으로 발산하고 표현하는 장이다. 말과 음식, 성욕 등으로 기운을 내고 그것이 구체적인 물질적 재화와 자산을 구축하는 흐름이다. - P144

이것이 관성에서 인성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리듬이다. 식상은 생성의 흐름이고 재성은 상극의 리듬이다. 상생과 상극이 이루어 147 지면 하나의 물건, 그것이 무엇이든 구체적인 현장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그치면 다시 또 내고 쌓고 하는 스톡으로 진행된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자기 팔자와는 무관하게 ‘식상생재격’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배터리가 방전된다. 내가 생하고 내가 극하는 기운으로만 살기 때문이다. 식상생재격으로 타고난 사람도 계속 이렇게 살면 멍~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야 이렇게 살면 몸이 성할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휴가를 내거나 여행을 떠난다. ‘나를 충전해야겠어’라고 하면서. 재성에서 곧바로 인성으로 튀는 것이다. 관성을 거치지 않고 바로 인성으로 튀면 일시적으로 안정이 되고 편안할 수 있지만 돌아오면 도루묵이다. 관성이라는 관문을 넘지 않고 편안한 울타리로 들어가 안주하는 탓이다. 결국 돈만 날리고(재성은 인성을 극한다) 되돌아와서 다시 이번엔 식상이라는 단계도 건너뛰고 바로 재물을 구하려 든다. 결국 평생 동안 재물과 인성 사이를 오락가락하게 된다.
이럴 때는 반드시 관성을 용신으로 써야 한다. 관성이란 ‘타자들과의 네트워킹’이다. 익숙한 존재들과의 관계는 관성이 아니라, 식상에 가깝다. 계모임이나 동호회, 친목단체 등등. 이 관게에선 나의 변용이 불가능하다. 비슷한 상태의 확장과 변주만 있을 뿐. 반대로, 관성은 낯설고 불편한 관계를 감수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책임을 져야 하고 갈등과 충돌도 불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기운이 형성된다. 그것을 바탕으로 재물을 모을 수도 있다. 그 재물이 다시 관성을 낳기도 하고. 따라서 관성을 적극 활용하면 재성과 148 인성이 서로 맞서는 형국에서 재ㅡ관ㅡ인으로 이어지는 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
관인상생도 역시 상극과 상생이다. 먼저 관성은 나를 극하는 기운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나를 생해 주는 관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식상생재와는 반대의 흐름이다. 먼저 형극을 감내하면 그 다음엔 아주 느긋하게 나를 생성시켜 주는 대지의 품에 들어설 수 있다. 관성은 나를 규정하고 압박하는 무형의 관계망이다. 거듭 말하지만, 관성의 단계를 밟지 않으면 나는 변용이 불가능하다. 비겁은 나의 양적 확대고, 식상은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이고, 재성은 양적 다양성으로 귀결될 뿐이다. 이 단계에는 질적 전환의 과정이 없다. 식상생재로 이어지는 경우 사회적 적응력은 뛰어난 반면 크게 변화를 겪진 못한다. 동일성의 궤도 위를 왕복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관성은 내가 다른 존재로 변이되는 통과의례이자 관문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다. 가수들이 마치 스포츠 선수처럼 경연대회를 하다니. 이거야말로 스스로 자기를 극하는 조건에 뛰어든 꼴이다. 노래는 원래 식상의 힘이다. 인기는 비겁에 해당하고. 즉, 가수라는 직업은 나와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과 공통감각을 주고받으면서(비겁) 즐겁게 놀고(식상) 그 즐거움을 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재성) 흐름을 타는 것인데, 그런 패턴을 가로질러 다음 마디로 넘어간 것이다. 사회적 시선과 경쟁심이 작동하면 이젠 돈이 문제가 아니다. 자존심, 예술혼, 나아가 내공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그 마디를 넘으면 노래실력은 149 물론 인생 자체에 대하여 큰 공부를 하게 된다. 노래가 갑자기 인생과 철학의 그릇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나가수’ 스타들 가운데는 이 프로를 통해 인생역전을 한 경우가 많다. 국면의 대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이게 바로 관성을 통한 ‘일간’의 변용에 해당한다. 그런 점에서 십신의 다섯 스텝이 하나하나 모두 중요하지만 가장 결정적 마디는 뭐니뭐니해도 재성에서 관성으로 가는 길목이다.
자, 이 정도면 대강 식상생재의 흐름과 관인상생의 흐름이 잡힐 것이다. 이걸 바탕으로 다양한 배치의 변화를 읽어 내면 된다. 예컨대 비겁이 과다할 경우, 그러면 당연히 나에 대한 팽창욕이 강하니까 다른 기운이 약할 수밖에 없다. 또 인성과 식상으로 이루어진 경우는 상생으로만 되어 있으니 구체적인 현장과 유형적 성취가 어려워진다. 또 재성과 관성으로 이루어진 경우는 상극으로만 되어 있으니 몸이 고달프다. 항상 뭔가가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현장만 있게 될 터이니 말이다. 중요한 건 상생과 상극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역술가들도 이런 이치에다 수많은 임상적 경험을 덧붙여 분석을 하는 것이지 다른 특별한 묘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치와 용법만 익히면 훨씬 더 다이내믹한 흐름을 읽어 낼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개인뿐 아니라 시대의 흐름은 물론 직업이나 활동공간에 따라 어떤 기운을 더 주도적으로 쓰는지도 포착할 수 있다.
가령, 네티즌들은 인터넷 공간 안에서 십신의 흐름을 다 소비할 것이다. 발산하고 수렴하고, 상생하고 상극하고, 유형과 무형의 소비와 충전을 하는 등등. 그 안에서도 모든 과정이 다 이루어진다. 하지 150 만 그것은 순환이 되지 못한다. 사이버 공간 안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네트워킹을 하는 것 같아도 결국은 독백이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지만 소통이라기보다는 거의 배설에 가까운 경우도 많다. 상대와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익명성의 바다에 몸을 숨겨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나를 극하는 배치에 들어서지 못하고, 그저 나의 일부를 일방적으로 발산하는 수준에서 끝나고 만다. 그래서 비겁만 증식되어 망상이 확대되거나 아니면 식상만 쓰느라 기진맥진할 수밖에 없다.(구설수와 송사의 아수라장!) 사이버 공간에 집중할수록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체적 소통력은 점차 떨어지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누구는 오직 돈만 벌고, 누구는 오직 공부만 하는 신분사회, 인류는 이걸 타파하기 위해 온갖 투쟁을 다 해왔다. 누구든 스스로의 힘으로 밥벌이를 하고, 누구든 스스로의 힘으로 삶의 지혜를 닦아 가는 사회, 이것이 인류가 기획하는 최고의 비전이 아니었던가. 헌데, 참 희한하게도 막상 그런 자유와 선택이 주어지자 다들 오직 물질적 분배에만ㅡ그것도 주로 상품과 쾌락의 증식과 관련된ㅡ주력할 뿐 정신적 자산을 나누고 누리는 데는 대체로 무관심하다. 이것이 우리 앞에 놓인 표상의 배치다. 보다시피 그 자체로 태과불급이다. 이 흐름에 장단을 맞추다 보면 당연히 모든 구성원들의 팔자가 꼬이게 마련이다. 원초적으로 타고난 태과불급에다 자본주의적 욕망의 배치가 덧보태지면서 십신의 리듬이 더한층 혼탁해지는 것이다. 리듬이 혼탁해지면 무엇보다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151 살아내기 어렵다. 잘 살고 못 살고는 다음 문제다. 더 중요한 건 타고난 명(命)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운전할 수 있느냐이다.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도 긴박한 문제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팔자의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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