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친법 팔자의 ‘오이디푸스화’

자, 이제 사주분석의 마지막 코스에 접어들었다. 아마도 운세를 본다는 건 바로 이 최종단계에 대한 해석을 뽑아 보는 것일 터이다. 십신은 팔자가 ‘사회체’, 구체적으로는 사회적 표상들과의 마주침에서 일어나는 기운의 배치라고 했다. 여기엔 아직 주체와 대상이 없다. 기운들의 흐름과 그것들이 자아내는 사회적 표상과 욕망의 주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주름에 주체와 대상을 부여하는 것이 ‘육친법’이다. 육친(六親)은 말 그대로 ‘패밀리’다. 나를 둘러싼 인적 네트워크를 말한다. 기운이 동선을 만들고 동선이 관계를 만든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관계가 곧 동선의 편폭을 만들고, 그 동선이 기운의 배치를 구성한다. 이것이 육친법의 이론적 토대다.
예컨대, 비겁은 나의 수평적 확장이니 그것을 주체화하면 형제와 동료, 라이벌, 남편의 여자(강력한 라이벌이니 겁재 중의 겁재다^^) 등이 된다. 식신은 낳는 기운이니 여성에게는 자식이고, 남성에게는 처가 식구들 혹은 할머니 등에 해당된다(내가 할머니를 낳는다고? 이것이 우주의 아이러니다. 돌고 돌다 보면 할머니가 곧 나의 자식이 되기도 한다). 재성은 일단 아버지다. 나의 재물운을 규정하는 첫 번째 조 153 건이 아버지의 경제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성한테는 거기에 또다른 관계가 첨가된다. 바로 부인 혹은 애인이다. 아버지-여자-재물, 이것이 하나의 계열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그럼 여성한테 남편이나 애인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관성이다. 나를 극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지위나 조건을 규정하는 토대에 해당한다. 혹은 사회적 관계로 나아가는 창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 남성에게 관성이란? 바로 자식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 모양이다. 자식이 웬수라는 말도. 아버지와 아들은 기본적으로 상극이다. 특히 아들은 아버지를 이겨 먹기 위해 세상에 나온 존재다. 중국이나 로마의 황제들에게 가장 큰 적은 무엇보다 아들들이었다. 실제로 아들에게 암살당한 일인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만큼 아버지와 자식의 기운은 팽팽하다. 전자가 지나치게 세면 아들들이 맥을 못추고, 후자가 세면 아버지의 수명이 단축된다. 실제로 암살을 하지 않더라도 너무 잘난 아들을 두면 아버지는 기세가 꺾인다. 가장 극단적인 것이 자식을 낳자마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경우일 것이다. 비정하다고? 하지만 이게 자연의 법칙이다. 그래서 자식이 성인이 되면 집을 떠나야 한다(집에 있더라도 정신적으로 완전히 독립해야 한다). 성인의 기준은 생식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다. 곧 이팔청춘이면 성인인 것이다. 이후에도 부모와 같이 있으면 양쪽 다 힘들어진다. 이것은 단순히 사회경제적 차원을 넘어, 훨씬 더 근원적인 차원에 해당하는 문제다.
마지막으로 인성은 남녀 모두에게 엄마가 된다. 생명의 원천이 154 라는 의미에서 유추된 것이다. 재성은 돈, 관성은 관직, 여기까지는 이해할 만한데, 인성이 공부운·문서운이라는 건 좀 뜨악할 것이다. 공부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충전이고, 문서는 만물을 낳아 주는 대지의 이미지가 덧붙여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게 육친으로 따지면 엄마란다. 하여, 엄마복이 있다는 건 공부운이 좋다는 뜻이 된다. 하기야 맹모삼천은 있어도 맹부삼천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픽션이건 현실에서건 홀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해서라도 자식을 공부시키지만 홀아버지일 경우는 일찌감치 자식을 노동현장에 내놓은 경우가 많다.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도 엄마들이 주도하고 있지 않은가. 아빠들도 많이 ‘엄마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엄마의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친다. 아빠들한테는 자식교육보다 자신의 현장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것이 더 좋고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엄마와 공부가 원초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게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다. 원리가 이렇다면 자식교육을 위해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다닐 게 아니라, 엄마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자식교육에 훨씬 더 효과적이다. 엄마가 잘 살면 자식의 공부운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아무튼 이제 비로소 우리가 아주 익숙하게 알던 세상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이걸 물으러 역술원엘 가고, 그래서 역술원에서 주로 활용하는 영업매뉴얼도 이것이다. 실제로 적중률도 높다. 재물운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애인이 언제 생길지, 남편복이 있는지 없는지, 문서운이 있는지 없는지 등은 초식만 배워도 금방 드러난다. 너무 간 155 단해서 놀랄 지경이다. 하기사 뭔가 대단한 비의가 있으리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삶에 대한 망상이요 무지가 아닐까. 인생사라는 것이 누구든 생로병사의 리듬을 밟아 가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품게 되는 욕망이나 비전 또한 뻔하디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팔자의 주름은 그다지 개성적이지 않다.^^ 그러니 일단 자신의 팔자엔 뭔가 특별한 흔적(복이건 화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부터 던져 버리는 게 낫다. 헌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구?’ 여기서 그치면 아무것도 안 한 거나 마찬가지다. 족집게처럼 맞히면 뭐하는가,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는데……. 게다가 역술가의 입장에선 정직하게 말할 수가 없다. 대개 좋은 운보다 나쁜 운이 더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법이다. 그런데 그걸 곧이곧대로 말해 주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분노 아니면 공포다. 즉, 애꿎은 역술가한테 화풀이를 하거나 아니면 두려움에 떨면서 역술가한테 매달리거나. 그러다 보면 팔자는 더더욱 꼬일 수밖에 없다. 특히 궁합 같은 경우는 그야말로 ‘립서비스’에 불과하다. 이미 결혼을 약속했거나 뜨거운 연애중인 커플을 앉혀 놓고 살이 끼었다거나 인연이 그리 길지 않다든가 하는 말을 늘어놓겠는가. 고로 대부분 하나마나한 소리로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명리학의 담론적 배치다. 역술가(혹은 점쟁이)와 고객 사이엔 어떤 앎의 공유도 없다. 고객은 최소한의 기초도 없는 채로 자기 운명에 대한 해석을 역술가에게 맡겨 버린다. 이런 식의 일방향적 관계에선 언표 자체가 극도로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팔자의 주름에는 십신이나 음양오행 등 아주 풍성한 156 흐름들이 지층화되어 있건만 언표를 구성하는 건 육친을 둘러싼 아주 ‘유치한’ 사건들밖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육친법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가 필요하다. 당연히 이것은 근대 이전의 가족관계와 생활방식을 전제로 한 ‘주체화 방식’이다. 그래서 처삼촌이라든지 이종사촌, 처첩들 등 우리에겐 아주 낯선 친인척 관계도 상당수 들어 있다. 근대 이전에는 가족이라고 하면 당연히 가문 중심, 마을 중심의 친족관계를 뜻했다. 당연히 사돈의 팔촌, 이웃사촌 등이 팔자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가문은 대가족일 뿐 아니라, 노비들과 하인들까지 포함된 ‘사회체’다. 거기다 당파와 학파가 결합되어 있고, 왕과 백성이라는 커다란 배경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근대 이후 우리 시대의 가족은 ‘엄마ㅡ아빠ㅡ아이’라는 삼각형 구도에 갇히고 말았다. ‘국가ㅡ자본ㅡ가족’의 삼위일체의 권력구조에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심리적 회로가 결합한 결과가 바로 일부일처제를 바탕으로 한 핵가족 제도다. 근대 이전의 가문과 지금의 핵가족은 그저 스케일이 축소된 것만이 아니라 전혀 상이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가문이라고 하는 개념에는 토지기계와 촌락공동체, 봉제사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라는 ‘소셜 네트워크’등 폭넓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럴 때 십신은 자연과 공동체, 그리고 가족과 ‘나’라는 경계에 위치한다. 그래서 해석의 편폭도 아주 드넓다. 인성은 어머니이자 토지, 그리고 저 아득한 후대까지 뻗쳐야 하는 지혜와 명예 등이 포함된다. 백 년 뒤까지 이어지는 명예를 생각한다는 건 한편으론 이념적 망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어떤 불리 157 한 조건에서도 결코 자신의 존재성을 포기하지 않는 원천이기도 하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자식들한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제 우리 집안이 폐족이 되었으니 너희들이 학문을 할 때가 되었다."
무슨 뜻인가? 폐족이니 부귀공명을 누리기는 다 틀렸고, 이제 남은 건 오직 학문을 통해 명예를 지키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는 뜻이다. 출셋길이 꽉 막혔는데 공부는 해서 뭐해?ㅡ이것이 우리 시대의 통념이라면, 다산에겐 출셋길이 막혔으니 이젠 공부에 올인하자!는 것이 상식적 이치였다. 이것이 바로 인성운이다. 학문이 나를 부유하고 귀하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그 학문을 통해 나와 내 가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 인성이라는 용어는 이런 근원적 이치를 환기시켜 준다.
여성에게 있어 관성 역시 남편이자 남편이 속한 사회체이며 그것을 경영하는 능력과 연동된다. 한 여성이 혼인을 한다는 건 곧 어떤 집단 혹은 가문의 네트워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가문을 비롯하여 촌락공동체와도 깊은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마을마다 정신적 지주에 해당하는 여성이 있었고, 특히 대갓집 마나님의 경우는 마을 전체의 살림과 풍속을 주재하는 CEO에 해당했다. 『임꺽정』을 한번 읽어 보시라. 조선시대 여성들이 얼마나 위풍당당한지, 그 카리스마와 배짱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관운이다. 요컨대 근대 이전의 관계에선 육친이 혈족을 뜻하는 것이면서 부락공동체와 연동되어 있었고, 동시에 대자연과 천지만물로 이 158 어져 있었다. 사돈의 팔촌, 이웃사촌, 천지신명과 토지기계 등등. 하지만 서구의 도래와 더불어 그런 식의 ‘대칭적’ 연결고리는 끊어지고 말았다. 지금의 육친은 가족삼각형에 갇혀 있을뿐더러 공동체는 물론 자연과도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지독하게 ‘닫힌 구조’인 것. 자, 이렇게 사방으로 통하는 기운을 다 닫아 놓게 되면 팔자란 고작해야 자식의 성공, 아버지와 재물, 그리고 남편과 사회적 지위, 엄마와 부동산 혹은 자격증 등으로 고착되어 버린다. 왜소한, 너무나 왜소한! 니체가 근대인을 일러 ‘난쟁이’라고 부른 게 아마도 이런 맥락이 아닐까. 한편으론 이렇게 관계망을 극도로 축소시켜 놓으면서, 다른 한편으론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누려야 한다는 집착은 더더욱 증폭된다. 이것이 현대인들을 지배하는 욕망의 배치다.
하지만 팔자에선 이런 구조 자체가 설정불가능한 컨셉이자 난센스다. 이미 파악했듯이, 여덟 개의 카드로 오행의 순환이 불가능할뿐더러 설령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해도 그렇게 되면 상생뿐 아니라 상극의 작용도 두드러지게 된다. 예컨대, 식상과 관성은 서로 상극이다. 육친으로 말하면, 자식과 남편은 상극이다. 또 재성은 인성을 극하는데, 이건 육친으로 풀면 아버지는 엄마와 상극이다. 결국 부부는 상극이라는 뜻. 오이디푸스 신화가 이를 잘 말해 준다. 남근은 재물(자본)이고 아버지다. 엄마는 토지기계고 자연이다. 아들은 노동력. 아버지를 죽이고(극을 한다), 아비는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다(극을 당한다). 그래서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많은 경우 자식을 낳으면 부부 사이가 멀어진다. 가족주의하에선 자식이 부모의 교량이라고 선 159 전해 대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일단 여성은 아이와의 일체감이 남편으로 향하는 성욕을 충족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남편과는 육체적으로 멀어지는 것이다. 부부 사이가 나쁠 경우 아이가 잘 생기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어쩌다 관계를 하면 아이가 덜컥 생기고 다시 남편은 밖으로 돈다. 그러면 그 여성은 자식을 키우는 것으로 보상을 받는 것이다. 반대로 옹녀나 춘향이 같은 경우는 아이가 통 안 생긴다. 설령 생겼다 해도 자연유산되거나 스스로 포기하기도 한다. 식상보다는 관성이 더 강렬하기 때문이다. 관성이 ‘센’ 여성은 아이를 낳는 것보다 여러 남자를 거느리고 그걸 통해 자신의 사회적 존재감을 확인하는 데 더 주력하게 된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 또한 사회적 욕망이 강하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무심해지는 편이다. 결국 모든 것을 한꺼번에 얻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 사주명리학의 메시지다.
물론 육친의 덕을 두루 갖춘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유지하느라 정작 자기 자신은 기진맥진이다. 사주상으로 보면 일간이 지극히 신약할 수밖에 없다. 이런 팔자의 경우, 남들은 부러워하지만 정작 자신은 답답하고 공허하다고 느낀다. 크게 추락하지도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상승도 불가능한 채로 그럭저럭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 가진 다음 그걸 지키기 위해 자기를 버리는 것과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한두 가지는 포기해야 하는 것. 어느 쪽이 더 좋은 운인가? 아마 누구도 전자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죽음에 임박할수록 평범하고 무난한 팔자에 자긍심을 갖는 160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그게 콤플렉스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콤플렉스가 없는 것이 콤플렉스라? 허, 이런 역설이라니!
처음, 「입구」에서 말했듯이 운명의 지도에는 역설과 아이러니 투성이다. 어떤 인위적 척도도 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좋으면 저것이 어긋나고, 저것을 얻으면 이것이 사라지고. 겉이 아름다우면 속이 문드러지고, 바깥이 거칠면 속이 부드럽고. 혹은 돈이 들어오면 건강을 잃고, 권력을 가지면 사람을 잃게 되고, 사랑을 얻는 대신 친구를 버려야 하고…… 한마디로 팔자에는 온갖 가치들이 범람한다. 가치들의 범람 속에서 종국에는 가치들이 얼음 녹듯 녹아 버리는 것, 그것이 팔자의 우주적 연기법이다. 고로,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이 서로 ‘오버랩’ 되는 이 매트릭스에선 더 좋은 팔자도, 더 나쁜 팔자도 있을 수 없다. 게다가 지금은 기술문명의 절정에 해당하는 시대다. 인류사에서 의식주가 이렇게 편안했던 적이 있었는가? 그럼에도 현대인들은 이 풍요를 전혀 누리질 못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풍요로 인해 행복하다고, 자신의 팔자가 참 좋다!는 생각을 결코 하지 못한다. 보다시피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고 원망한다. 원초적 평등성 및 시대적 혜택 따위는 치지도외하고 오직 불만족과 불평등만을 느끼고 받아들인다. 아니, 그것들을 열심히 ‘생산’하기까지 한다. 대체 왜? 눈치챘겠지만, 음양오행과 십신, 그리고 육친법으로 이어지는 운명의 흐름을 오직 핵가족 삼각형이라는 좁은 틀에 몰아넣은 탓이다. - P152

근대 이후, 인간이 자연과 단절되면서, 그리고 오이디푸스 안에 갇히면서 자신만의 내밀한 공간을 만들었는데, 자의식 혹은 내면이 바로 그것이다. 밖으로 통하지 못하는 에너지와 힘들, 불균질한 소용돌이가 만들어 낸 협곡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협곡에 갇힌 힘들과 소용돌이는 심하게 뒤틀린다. 왜곡, 변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곧 트라우마다. 이런 논리로 보자면 현대인들은 계층과 조건에 무관하게 숙명적으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자의식과 내면이라는 공간 자체가 사건들을 ‘상처화’하는 거처인 탓이다. 아닌 게 아니라, 현대인들은 거의 다 상처받은 영혼들이다. 정신분석과 심리상담, 각종 치유프로그램이 만연되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더 놀라운 건 그 상처로부터 벗어나기를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상처가 만성화되면서 어느덧 상처와 자의식, 그리고 정체성이 합체가 되어 버린 탓이다. 자본주의가 덧씌운 운명의 굴레 혹은 ‘덫’! 그 구체적 양상을 한번 탐구해 보자. - P168

아토피를 앓는 건 그래도 괜찮다. 구체적으로 몸 곳곳에 흠집이 나니까 뭔가 노력을 하게 된다. 하기에 따라 음식과 몸이 맺는 관계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쌓을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소위 ‘마음의 상처’라는 것이다. ‘마음의 아토피’라고나 할까. 너무 많은 이들이 이 병을 앓고 있다. 남녀노소, 계급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자신을 상처받은 존재로 규정한다. 요즘 대세를 이루는 드라마 주인공들, 특히 재벌 2세들을 한번 보라. 시건방지고 재수없는 성격의 소유자지만 ‘알고 보니 상처가 있더라’가 기본 컨셉이다. 상처의 내용은 한결같다. "엄마한테 버림받았어." "아빠 때문에 엄마가 떠났어." 그리고 상처가 발견되는 순간, 갑자기 그 캐릭터는 순수하고 멋진 인물로 거듭난다. 이쯤 되면 상처가 곧 정체성이자 스펙인 셈이다. 이것이 팔자의 시대적 좌표다. 일간이 뭐건 팔자의 오행이 어떻게 되었든 일단 자신의 삶을 상처라는 심리적 기제에서 시작한다는 것. 이 점을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170 우리 연구실은 지식인 공동체다 보니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겉보기엔 다들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중상류층에 인텔리들이라 교양수준도 높다. 또 소위 ‘정상적인’ 가족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의 삶에 대한 엄청난 불만을 지니고 있다. 스스로 상처받은 존재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개중에는 아주 오랫동안 약물치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 상처의 유래다. 정신분석이 그렇듯이 대개 그 시원은 유년기에 있다. 심지어 뱃속의 태아 때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자신의 삶이 이렇게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용은 공통적으로 ‘애정결핍’이다. 어린 시절 사랑을 못 받아서 지금 이렇게 우울하고 무기력하다고? 이런 논리는 상당히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짜다. 왜냐하면 삶은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오래도록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좋은 기억은 물론이고, 나쁜 기억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산산이 흩어지는 것이 다반사다. 그런데 만약 20년, 30년이 넘도록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건 이제 사건 자체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내가 그 기억을 떠나 보내기를 거부하는 정신의 벡터가 작동한다는 뜻이다. 그 지점을 면밀히 통찰해야 한다. 즉, ‘나는 왜 이렇게 슬픈 유년기를 보내야 했을까?’가 아니라, ‘나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그 기억을 붙들고 있을까?’ 하는. 어떤 비극도 시간이 지나면 전후좌우 맥락이 파악되는 법이다. 그걸 깨달으면서 어른이 되어 가는 것 아닌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내가 그 기억을 계속 동일한 방식으로 곱씹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이미 그 기억은 원래의 사 171 건과는 무관한 나만의 ‘자의식’이 되어 버린다. 자의식이 공고해질수록 외부와의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아주 역설적이게도 소위 상처받은 이들일수록 그걸 빌미로(!) 타인에게 마구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특히 그 대상은 자신을 지극히 아껴 주는 엄마거나 애인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결국 모든 관계가 왜곡되어 버린다. 자, 그럼 여기서 ‘팔자’란 무엇일까? 어렸을 때 받은 상처가 그 단서라고 치자. 그럼, 그 다음엔? 그걸 계속 물고 늘어지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훼손시키는 것은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이것도 팔자인가? 만약 그렇다면 결국 자기 팔자는 자기가 만든다는 말이 맞지 않는가?
이어지는 또 하나의 전도. 상처라는 담론 속에서 자신은 결코 주체가 아니다. 상처를 입힌 자들만 클로즈업된다. 나는 그저 ‘당했을’ 뿐이다. 얼떨결에, 난데없이! 그렇다면 이상하다. 왜 이 상처의 서사에선 내가 무엇을 했는지가 전혀 부각되지 않는 걸까? 무섭고 약해서 그랬다고 한다면 그런 자신의 모습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나는 왜 그토록 어리석었을까? 혹은 무엇이 그토록 두려웠던 것일까? 요컨대 상처라는 담론 안에는 자신에 대한 관찰이 놀랄 만큼 빠져 있다. 그래서 그 과거는 여전히 현재에 개입하고 미래를 창조한다. 니체는 ‘양심의 가책’ 혹은 원한감정의 탄생이라는 측면에서 이 문제를 오래도록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바가 있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밖으로 발산되지 않는 모든 본능은 안으로 행해진다. ㅡ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인간의 ‘내면화’라는 것이다. 이에 의해서 인간은 172 비로소 훨씬 후에 ‘영혼’이라고 불리는 것을 개발해 냈다. 원래는 두 개의 얇은 피부막 사이에 펼쳐진 것처럼 빈약했던 저 전체 내면세계는, 인간본능의 밖으로의 발산이 저지됨에 따라 더욱더 분화되고 팽창되어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얻게 되었다. 낡은 자유의 본능에 대해서 정치조직(국가)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구축해 놓은 저 무서운 방벽ㅡ형벌도 이러한 방벽 중의 하나이지만ㅡ은 거칠고, 자유롭고, 방랑적인 인간의 저 모든 본능이 인간 자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적의, 잔인, 박해, 공격, 변혁과 파괴의 쾌락ㅡ이 모든 것이 이러한 본능의 소유자 자신에게로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의 기원인 것이다.

외부의 적과 저항이 없어지고, 관습의 억누르는 듯한 협소함과 꼼꼼한 형식 속에 처박혀진 인간은 참을 길이 없어 자기 자신을 찢고, 책망하고 물어뜯고, 괴롭히고, 학대했다. ‘길들이기’ 위한 우리의 창살에다 몸을 부딪혀 상처투성이가 된 이 동물, 황야에의 향수에 지쳐 스스로 모험, 고문대와, 불안하고 위험한 황야에 몸을 내던지지 않을 수 없었던 이 궁핍한 동물, 이 바보, 그리움에 지치고 절망해 버린 이 죄수야말로 ‘양심의 가책’의 발명자가 된 것이다. 게다가 이와 아울러 인류가 오늘날에도 역시 치료하지 못하고 있는 저 가장 무겁고 위험한 병도 비롯되었던 것이다. 즉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괴로워하는 병이다. 이것이 인간이 그의 동물적인 과거로부터 억지로 떼어낸 결과, 말하자면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생존조건 속으로 뛰어든 결과이며, 이제까지 그의 힘과 173 기쁨과 공포의 근거였던 오랜 본능에 대한 선전포고의 결과였다.(니체, 『도덕의 계보』, 93쪽)

논리와 표현은 다르지만 의역학적 관점과 매우 흡사하다. 외부와 연결되었던 다양한 채널들이 막히면서 그 힘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타자와 세상을 향해 흘러가야 할 기운이 출구가 막히자 자신을 물어뜯고 괴롭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의보감』을 빌려 말하자면, 예전에는 노권상(勞倦傷)이 많았다. 먹고 살기 위해선 매일같이 상당한 양의 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칭 골병이 많이 들었다. 날씨만 흐려도 뼈마디가 쑤시고 삭신이 오글거리는…… 우리 부모님들이 일상적으로 앓던 신경통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요즘은 몸을 거의 쓰지 않는다. 그래도 먹고사는 데 별 지장이 없다. 아마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조선시대 지체 높은 가문의 양반들보다도 몸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노권상은 해결되었다고 치자. 그런데 존재는 몸과 마음,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몸이 편하면, 몸의 에너지를 바깥으로 쓰지 않으면 그것이 정신이라는 무형의 창고에 쌓이게 된다. 유형이 무형으로 전변하는 것이다. 여기가 참 놀라운 지점이다. 몸이 편하면 자긍심이 높아질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사람은 활동이 줄어들면 자기에 대한 불만이 커진다. 대체 왜 그럴까? 원리는 간단하다. 생명은 언제나 활동을 원한다. 움직이고 접속하고 변형되고 다시 수렴되고 등등. 그 속에서만이 자신의 ‘우주적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 활 174 동지수가 낮아지면 그만큼의 물리적 압력이 정신적 스트레스로 쌓이는 게 당연하다. 그것은 결국 자기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금융자본의 증식, 디지털의 폭주 속에서 이 내면의 부동산 또한 무한증식된다. 불필요하게 비대해지면 거기서 자랄 수 있는 것은 종양뿐이다. 마음의 종양이 바로 무수한 정신병력, 분열증 혹은 강박증, 우울증…… 포괄적으로 말하면 화병이다. 수승화강이 안 되면 불은 위로, 물은 아래로 각기 따로 놀기 시작한다. 불이 위로 치성해서 제멋대로 요동치는 것이 바로 화병이다. 골병에서 화병으로! 종기에서 광기로! 이것이 우리 시대 문명생리학적 배치다. - P169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린 시절의 상처가 삶을 지배한다면 그건 그 사이에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는, 다시 말해 스스로 성숙을 거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보통의 심리치료는 어린 시절의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을 다시 확인하고 치유하며 통합하는 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경우 자신은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확신을 얻게 되지만, 반면에 부정적인 감정이나 고통을 유발한 책임을 부모나 주위 사람에게서 찾았기 때문에 자신은 희생자라는 감정에 사로잡히기 쉽다."(『마음은 몸으로 말한다』, 83쪽) 이것이 바로 오이디푸스의 덫이다. 핏줄, 더 구체적으론 일촌 관계를 떠나지 못하게 꽁꽁 묶어 두는 심리적 기제. 이렇게 묶여 버리면 남는 건 자의식의 과잉뿐이다. 생명의 에너지가 좁은 삼각형 안에 갇힐 때, 다시 말해 순환이 불가능해질 때 그 힘은 파괴적으로 분출된다. 자신을 파괴하거나 아니면 타인을 파괴하거나. 묻지마 범죄ㅡ총기난사나 방화 등ㅡ의 원천은 바로 이 지점이다. - P178

명리의 이치를 알게 되면, 일단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보더라도 인연의 그물망 속에서 보게 된다. 인연의 그물망이란 아주 다양한 가치들의 범람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 기존의 가치들이 무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가족삼각형’의 정상성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다. 예컨대, 자수성가한 자식의 경우, 우리는 보통 부모가 무능하거나 부모복이 없는 자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딛고 성공했다는 식으로 ‘성공의 서사’를 구성한다. 하지만 운명론의 차원 183 에서 보면 전혀 다르다. 그렇게 운이 센 자식이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가 파산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반대로 부모가 너무 기가 세고 강한 경우, 자식들이 제대로 자라기가 어렵다. 황제의 자식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 크게 실연을 당했을 경우도, 그게 전적으로 상대방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게 보는 건 상대를 주체로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상대방도 ‘자기도 모르게’ 어떤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건은 주체나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인연조건’이 있을 뿐이다. 시절인연이 맞으면 공통의 리듬을 갖게 되지만 시절인연이 어긋나면 아무리 서로를 원한다 해도 리듬이 맞을 수가 없다. 그럴 때는 뜻밖의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게 된다. 느닷없이 감정이 솟구치기도 하고, 부질없는 갈등이 야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인연을 맞이하기 위한 관문일 뿐이다. 실제로 주변사람들의 인생을 잘 관찰해 보면 그 점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남편을 잃으면서 아주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든지, 파산을 해서 큰 괴로움을 겪었지만 그 덕분에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든지 등등. 교통사고나 질병, 자살시도 등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도 아주 엉뚱한 인연을 만들어 내는 출구나 단서가 되기도 한다. 쉽게 말하면, 소위 ‘고난’이란 하나의 마디를 넘기 위해 내가 치러야 할 우주적 대가인 셈이다. 내 안의 자연, 내 안의 정기신을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씀으로써 인생 전체를 ‘리셋’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접근의 구도를 바꾸면 어떤 팔자든 흥미롭기 짝이 없다. 좋은 일이라 여긴 것이 나쁜 일의 단서가 되고, 억수로 재수가 없다고 여겼는데 184 그 덕분에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도 하고, 머리와 재능을 타고나서 행운인 줄 알았더니 그로 인해 간난신고를 겪기도 하고 기타 등등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다채로운 천태만상에 위계나 서열을 부여할 초월적 가치 같은 건 없다. 해서, 그냥 있는 그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다채로운 역동성이 가족삼각형으로 환원되는 순간 모든 팔자는 다 한심해진다. 있으면 있어서 괴롭고, 없으면 없어서 괴롭고, 사랑이 넘쳐도 상처요, 모자라도 상처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또 상처투성이다. 여기에 사로잡혀 있는 한 인생역전은 불가능하다. 삼각형을 뛰어넘는 시야와 감각을 훈련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 탓이다. 그 결과, 나이가 들수록 운명과 자의식, 그리고 트라우마가 하나로 중첩되어 버린다. 결국 남는 것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뿐!
주지하듯,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유래했다.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한 아들. 오이디푸스는 이 운명을 타고났다. 그래서 이 가혹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하지만 기어코 그는 이 운명의 궤도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운명의 장난이었다고? 그렇다. 하지만 그때 운명의 소종래는 어디인가? 마치 저 먼 별에서 주어지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 그것은 바로 자기 ‘안에’ 있다.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피할 생각이 없는 것이라고 해야 맞다. 오이디푸스는 왜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는가? 신의 저주로? 악령에 의해? 오 노! 그 자신이 엄마를, 엄마에 대한 표상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 185 다. 자기 안의 에너지 장을 끝내 바꾸지 못했기에 그렇게 모질게 버림받고도 결국 엄마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는 모두 자신이 만들어 낸 것으로 전적으로, 말 그대로 100%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타인의 그릇된 언행이라고 나에게 인지된 것, 심지어는 잘못된 정치·경제·사회적 현상 등 눈앞에 있는 모든 문제는 자신의 안쪽에 있는 문제"(허훈, 『마음은 몸으로 말한다』, 90쪽)이다. 도둑의 눈에는 세상 모든 사람이 도둑으로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모든 중생이 다 부처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모든 운명의 키는 자신 안에 있다. 억울하다고?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해법 또한 자신에게 있다. 서양의 의성 슈바이처는 말한다. "환자는 자기 속에 자신의 의사를 모시고 있다. 환자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병원으로 치료받으러 온다. 그러므로 훌륭한 의사로서 우리가 할 일은 환자 속에 있는 의사가 스스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책, 21~22쪽) 병이 이럴진대 하물며 운명에 있어서랴.
엄마의 품을 떠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일종의 ‘근친상간’이다. 스무 살이 되어도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면 그건 유아기처럼 엄마와 신체가 연동되어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은 분명 죄다. 윤리와 도덕을 범한 죄가 아니라 자연의 섭리를 어긴, 삶의 차서를 어긴 죄. 따라서 그 무지와 집착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 신탁이 예언한 바대로, 자신이 아비를 죽이고 엄마를 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먼 길을 떠난다. 눈을 찌른다는 건 186 더 이상 이전의 방식대로 세상을 보지 않겠다는 실존적 결단이다. 이제 엄마와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세계는 붕괴되었다. 눈을 찌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세계를 떠나 보낼 수가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한다. 그것은 혹독한 고행이기도 하지만 새로 태어나기 위한 치열한 이니시에이션, 즉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그 고행의 절정에서 그는 마침내 빛을 찾았다. 그 빛은 자신을 구하고 세상을 구원했다. 이제 더 이상 오이디푸스는 없다. 오이디푸스로부터의 탈주ㅡ안티 오이디푸스가 탄생한 것이다.
아주 역설적이게도 오이디푸스 신화가 말해 주는 바는 인간이란 결국 출가(出家)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출가, 곧 오이디푸스 삼각형으로부터 탈주할 때만이 운명의 지도를 바꾸는 길찾기가 가능하다는 것. 인류의 위대한 멘토인 부처와 공자, 예수가 다 출가자인 이유가 여기에 있으리라. 이들은 모두 국가와 계급, 소유에 대한 집착이 더더욱 고착화되던 흐름에 맞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젖힌 멘토들이다. 그들이 걸어간 길은 다 달랐지만 공통의 지반은 하나였다. 집을 떠나라! 집을 나와 ‘길 위에’ 있을 때만이 진리와 자유를 얻을지니. 이것이 "축의 시대"(야스퍼스)를 움직인 대전제였다. 12세기 독일 출신의 신학자 휴그는 『공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①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미숙한 초보자이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강인한 187 자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타향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완벽한 자이다. 미숙한 영혼의 소유자는 그 자신의 사랑을 세계 속 특정한 하나의 장소에 고정시킨다. 강인한 자는 그의 사랑을 모든 장소에 미치고자 한다. 완벽한 자는 그 자신의 장소를 없애 버린다.

② 완벽한 독서를 희망하는 자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이국의 땅이 되어야 한다. 시인은 노래한다. "나는 모른다. 도대체 어떤 감미로움이 사람을 고향으로 이끌어가는가? 그리고 고향을 결코 잊지 않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 현명한 사람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고향에 이별을 고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모든 존재는 원초적으로 출가자이자 이주민이다. 우리는 어느 날 문득 아주 우연히도 이 별에 도착했다. 부모의 몸을 잠시 빌린 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이다. 낯선 삶을 향하여,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하여. 그것만이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준 천지만물과 부모에 대한 유일한 보답이다. 운명의 지도가 필요한 건 이 때문이다. 집에 머무르면서 길을 떠나지 않는 자에게 지도란 무의미하다. 길을 떠난다는 건 그 자체로 오이디푸스적 표상으로부터의 탈주에 다름 아니다. 오이디푸스는 길을 떠났건만 정작 우리들은 오이디푸스에 머무르는, 아, 이 지독한 아이러니! 만약 오이디푸스가 다시 귀환한다면 그는 말하리라. 이제 그만 오이디푸스 삼각형에서 탈주하라고. 거기에는 어떤 출구도, 구원도 없다고. 오직 상처뿐인 188 팔자의 굴레를 벗어나 우주적 생명력이 약동하는 길 위에 나서라고.
사주명리학의 이치 또한 마찬가지다. 육친법의 좁은 틀에 갇히지 않고 생극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별들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덫을 박차고 나오는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하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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