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용신을 사용한다는 것은 개선해야 할 방향성을 가진 기운이 연운이나 대운 등 시절의 운으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이 찾아온 뒤에도 자기가 해야 할 실천은 없다. 다만 시절이 저절로 그렇게 해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수동적인 용법이다. 용신을 능동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그 기운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이 사주의 경우 조후와 억부 모두 금과 수가 용신이므로 금수 용신을 일상에서 어떻게 구현하는가가 관건이다.
금은 원리원칙적이고 구조화에 능하며 논리적이고 절제력이 있으며 마무리에 강하다. 수는 무겁고 자폐적인 단점이 있지만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으며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배려심을 강점으로 가지고 있다. 금과 수의 기운이 부족하다는 것은 이런 능력들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금과 수가 용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러한 능력 379 들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면 시절운으로 금과 수가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자신에게 부족한 금수 기운의 측면들을 평소에 극복하는 것으로 용신을 사용하면 된다. 이것이 능동적인 용신 사용법이다.
위 사주의 주인공도 평소에 맺고 끊는 것이 약하고, 우유부단하며, 사람을 깊게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 주인공을 위한 처방 혹은 개운법은 위와 같은 금과 수의 측면들을 실천하는 것이다. 육친과 연결하자면, 금 식상은 명료하고 논리적인 말, 현실적인 도전과 계산된 기획, 기발하고 변칙적인 변화 등이 미덕에 해당하고, 수 재성의 미덕은 유연한 일 처리, 회사 동료에 대한 깊이 있는 배려와 원만한 대인관계 등이다. 그녀의 경우 현재 임자(壬子)대운(현 40세)으로 수 재성이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금 용신을 더 주목해야 하겠지만 수 재성의 미덕을 갖추지 못했다면 언제든 그것을 용신의 실천법으로 주시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 P378

소세키는 34살에 유학길에 올랐다. 그런데 그는 32세에 무술(戊戌) 대운이 온다. 무토와 술토는 그 자체로 큰 역마의 기운이 서려 있기 때문에 그가 유학을 갔을 것이라고 해석해도 된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무토는 임수와 충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임수와 정화의 합이 깨진다. 그렇게 되면 지지의 인목과 묘목은 지휘관을 잃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처지가 된다. 특히 인목은 일지의 신금과 충을 한다. 그 도발적 변화의 역량이 역마살이라는 기운과 만나서 런던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외지를 향해 나가게 했다. 그러나 이건 해석일 뿐이다. 그런 사주라 해서 반드시 그런 기회가 생기는 것도 아니 405 고 또 그 기회를 꼭 승낙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만일 이때 우리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어떨까? 유학의 권유가 있었고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는 그때 우리는 자신의 사주를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만약 갈 마음이 없다면 굳이 사주를 들여다보지 않을 것이다. 변화 없는 상황에 머물러 있으려 할 때는 그런 운명론을 잘 보지 않는다. 선택을 앞두고 적극적으로 사주를 본다는 것은 가고 싶은 마음과 두려운 마음이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때는 새로운 선택을 지지하는 쪽으로 사주를 해석하면 된다. 예를 들어, "무술이 들어왔으니 거친 대지를 향해 나아가라는 뜻이군." "통근이 되지 않은 인목이 예기치 못한 지형을 향해 떠날 운명이라는 것을 지시하고 있군." 이런 식의 해석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 개입할 수 있다. - P404

글쓰기 얘기가 나왔으니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글쓰기는 사주에서 어떤 세력으로 봐야 할까? 수업시간에 가끔 받는 질문이다. 그런데 글쓰기를 단일한 요소에 한정시킬 순 없다. 하나의 행위는 여러 세 408 력과 기운들의 인과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하면 글을 쓴다는 것이 표현에 해당하므로 식상의 기운이라고 볼 수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글쓰기는 표현의 의지와 실천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조의 사주에서도 천간의 경금과 지지의 신금이 통근을 하고 있어서 식상의 기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글쓰기의 욕망, 재능과 연결시켜도 괜찮을 듯하다. 하지만 글쓰기 작업은 이 밖의 여러 육친적 역할들이 필요하다. 글쓰기에 담긴 사유의 깊이는 인성과 관련이 있고, 글쓰기의 욕망이 출발하는 곳은 자기애의 자리인 비겁이며, 그것을 표현하고 현장에 펼쳐 놓는 것이 식상, 그리고 글을 마무리하고 책으로 출간하는 일 등은 재성이며, 그 글이 이름 모를 독자들과 만나고 세상에 회자되는 장은 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글쓰기를 비롯한 여러 행위들은 어느 한 요소에 환원될 수 없는 힘의 네트워크 속에 혼융되어 있다. 다만 식상을 먼저 언급한 이유는 식상이 자기 안의 욕망을 표출하는 첫 현장이기 때문이다. - P407

이런 정서는 오행에서 목화토의 기운에 속한다. 금수의 기운은 냉정하고 차갑다. 수가 유연하고 부드럽긴 하나 이렇게 다정다감한 정서는 아니다. - P410

목화는 따뜻하고 순진하며 다정다감한 기운이지만 속도가 빠르고 직설적이고 화를 참지 못하고 열정적이며 바쁘고 부산하게 움직인다. - P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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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 가며 머리에서 지장간이 저절로 떠오를 수 있을 정도로 연습해야 사주를 볼 때도 능수능란하게 응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드러나지 않게 하는 일이 지장간의 흐름이라고 보면 된다. - P153

선현들께서 이처럼 음양오행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그 운을 알아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신 수행을 하기 위한 것, 곧 마음을 비우고 천리에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주를 오래도록 연구하다 보면 저절 161 로 알게 되는 것 중 하나는 그 부모나 조상의 영향이 마치 유전자처럼 후손으로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굳이 "선한 일을 많이 하면 반드시 그 후손이 복을 받고, 악한 일을 많이 하면 반드시 그 후손이 화를 당한다."는 <<주역>>의 말을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마음을 닦으며 천지의 흐름에 따라 바르게 살라는 것이 선현들께서 명리학을 남기신 절대적인 이유다. 운을 미리 알아 하늘의 복을 훔치면 결국 후손들이 그 이상으로 재앙을 당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 P160

궁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자면, 연주를 조상궁으로 보아 조부모와 조상으로 해석하고, 월주를 부모·형제궁으로 보아 부모와 형제로 해석하며, 일지를 배우자궁으로 보아 배우자로 해석하고, 시주를 자식궁으로 보아 자식으로 해석한다. 사주에서 간지의 위치로 대응시키는 궁은 육친보다 다소 약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태어난 연월일시인 사주 원국의 해석에서는 중요하다.
이를 테면 무토일간인 필자는 일지와 시지가 인사형이어서 간호사 출신의 배우자를 만나 살고 있다.(??) 사주 당사자가 의료나 법률과 관계된 일로 직접 사용할 수 있고, 이처럼 배우자궁에 있으면 그 궁에 해당하는 배우자가 사용할 수도 있다.
12강에서 자세히 보겠지만 후천운인 대운과 세운에 따라 인성印星에 변화가 생기면, 그것이 상징하는 어머니나 문서 등에 변화가 생긴다. 또한 그 인성이 자리 잡고 있는 궁에도 적용할 수 있는데, 곧 인성 163 이 배우자궁에 자리 잡고 있다면 배우자의 신상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혹 인성이 부모궁에 자리 잡고 있다면 궁과 육친이 모두 어머니를 상징하니, 어머니께 변화가 생길 확률이 아주 높아진다. 사주의 감정은 육친과 궁을 위주로 해석하는 것인데, 궁과 육친이 동일하게 하나를 나타내면 그것이 상징하는 일이 발생할 확률은 매우 높아진다는 것이다. 육친과 궁이 따로 나누어져 있을 경우 필자는 육친을 위주로 보고 궁을 부수적으로 보며 해석한다. - P162

167 3. 연월일시의 의미
앞에서 말했듯이 연주·월주·일주·시주의 각 자리를 조상궁·부모와 형제궁·본인과 배우자궁·자식궁이라고 하는 이유는 연주를 기반으로 월주가 있고, 월주를 기반으로 일주가 있으며, 일주를 기반으로 시주가 있기 때문이다.
또 연주와 월주를 합해 선천궁, 일주와 시주를 합해 후천궁이라고도 하니, 연주와 월주는 나를 낳아 주시는 조상과 부모에 해당하고, 일주와 시주는 내가 태어난 이후의 삶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허무맹랑한 것 같지만 이치로 보면 말이 되는 소리이니 "수많은 조상님들이 부모님을 낳으시고 부모님이 나를 낳으시니, 내가 일지의 짝을 만나 시주의 자식을 낳으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더라!"라고 연주·월주·일주·시주의 상징에 대해 외우길 바란다.
사주는 궁과 육친을 주로 본다고 했다. 일간을 기준으로 다른 간지와 오행의 상생과 상극을 따져 비겁·식상·관성·재성·인성으로 나눈 것이 육친이고, 궁은 바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연·월·일·시의 의미를 따져 조상궁·부모와 형제궁·나와 배우자궁·자식궁으로 보는 것이다.
배우자궁을 때리는 지지가 오면 배우자가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병 168 원에 입원하는 등으로 사고가 생기고, 자식궁을 흔드는 간지가 오면 자식이 공연히 반항하며 말썽을 부리는 등의 일이 생기곤 한다. 마찬가지로 인성을 극하거나 충하는 간지가 오면 갑자기 일이 생겨 집을 팔 일이 생기거나 어머니가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관을 돕는 기운이 오면 남편이 진급하거나 사업이 잘 되는 등으로 좋은 일이 생기곤 한다. 물론 전자의 예시가 궁이고 후자의 예시가 육친이다.

















말년(61~80세)

장년(41~60세)

청장년(21~40세)

초년(0~20세)

자식

본인과 배우자

부모와 형제

조상

사지

몸통

어깨

머리

하급자

본인

상급자

사장

연주·월주·일주·시주를 위의 표에서처럼 확장하여 보기도 하니, 표를 기준으로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할수록 얼마든지 더 넓게 응용할 수 있다. 그리고 연·월·일·시를 20년씩 계산한 것은 현재의 평균 수명인 80세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예전에는 15년씩 하여 전체를 간지가 한 바퀴 다 돌고 돌아오는 60년으로 보았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 P167

(…) 사주 통변에 적용해 보면 알겠지만 아주 잘 맞는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공망은 비어 있다는 글자의 뜻 그대로 있어도 없는 것과 같아서 나에게 그 영향과 작용이 별로 없게 된다. 사실 말로는 실감이 별로 나지 않을 것인데, 자식이나 부모가 공망이라면,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도 없는 것과 같으니 서운하고 속상할 일이 무척 많이 생긴다는 것이다.
(…)
172쪽의 공망표와 179쪽의 공망 뽑는 공식을 통해 무엇이 공망인지 알아 두자. 원국에 공망이 있으면 오행에서는 그 작용이 그대로 살아 있지만 짝을 짓지 못한 앙갚음으로 다른 간지에 냉담하기 때문에(??) 공망에 해당하는 간지의 육친 작용이 약화되어 없는 것처럼 된다. 다소 신비한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천지의 기운도 사람들과 동일하게 감정이 있다고 보면 된다. 지지가 공망이면 그 위의 천간도 함께 공망이니, 연민과 원망을 가진 지지와 같이 있어 그 천간에까지 연민과 원망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국에서 공망 맞은 글자는 충을 당하면 도리어 그 인자가 활성화되니, 이미 나와 관계없던 것이 도리어 제대로 되는 것으로 본다.
171 일주를 기준으로 공망을 보는 것이 기본이고, 그 나머지 주를 기준으로 공망을 봐도 된다. 이를 테면 일주를 기준으로 연주가 공망이면 조상과 인연이 박해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일이 잘 발생하고, 월주가 공망이면 부모와의 인연이 좋지 못하고, 시주가 공망이면 자식과의 인연이 나쁘다.
또한 어떤 육친이 공망이면 그 육친과 인연이 박하다고 보면 된다. 궁과 육친이 겹칠 경우에는 그 확률이 더 높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월주에 인성이 있고 월주가 공망이면 부모 특히 어머니와의 인연이 박하다고 여기면 된다. 겹치지 않을 경우에는 상담을 하면서 어느 쪽으로 공망이 발생할지 참작하여 설명해 주면 된다.
대운에서 공망을 만나면 오행으로는 영향이 있으나 육친으로는 영향이 없다. (…)
사주의 원국 자체에 간지가 있음에도 공망 때문에 육친의 작용이 약화된 것이 아쉬워서 그것을 채우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지만 결국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바로 공망이니, 여기에 집착하여 인생을 아주 길게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테면 관 공망인 경우, 자신도 모 172 르게 그것에 대한 허전함을 만회하려고 고시와 같은 큰 벼슬에 집착하여 인생을 걸고 오랫동안 노력하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젊음과 시간만 낭비하게 되는 식이다.
사주에 원래 어떤 형태로 있든지 그것은 그 사람이 타고난 본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형태의 삶을 살면 본성적인 능력을 발휘 173 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니 사주에 공망이 있으면 공망 형태의 삶을 살면 된다. 식상 공망이면 속이 빈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니 곧 속이 빈 과자 뻥튀기나 솜사탕 같은 것을 만들어 팔면 된다. 식상 공망에 형이나 충과 같은 것이 더해졌으면, 형과 충이 가공을 더하는 것에 해당하니, 충격을 주어 모양을 다듬는 뭔가를 만들면 된다. 이를 테면 속이 빈 과자에 충격을 주어 아름다운 색깔을 입히거나 다듬어서 팔면 본성을 그대로 발휘하는 것이 되어 남보다 뛰어나게 된다. 곧 형과 공망을 있는 그대로 사용해서 반드시 기술까지 넣어야 성공한다는 것이다.
공망이 관이나 재 및 인성 등에 어떤 형태로 오든지 상관이 없다. 곧 어떤 육친이 공망이든지 생긴 모양 그대로 삶의 형태를 만들면, 자신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니, 천부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주에 형살이 있으면 형살과 관계된 삶을, 충이 있으면 충이 있는 모양의 삶을, 합과 충이 함께 있으면 그런 모양의 삶을 찾아 살면 된다. 타고난 본성을 제대로 발휘하는 것이어서 남들과의 경쟁에서 강할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사주를 보다 보면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만, 성공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사주의 특성을 제대로 발휘하여 좋은 영향 쪽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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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설명할 축술미丑戌未 삼형도 마찬가지인데, 형살은 서로 조금씩 양보함으로써 조정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형살이 원국에 있으면 이것과 저것을 조금씩 양보하게 만들어 조정하는 특성이 그 사람에게 원천적으로 있다고 본다. 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의료·법률·보험·가공을 직업으로 하면 좋다. 의료는 몸의 불균형을, 법률은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바로 잡는 것이니, 원국에 형살이 있으면 그것에 능숙할 수밖에 없다. 약하게는 사고를 조정하는 보험과 물품을 서로 조립하는 가공으로 사용할 수 있다. 운에서 형살이 들어오면 형사소송이나 수술할 일이 생길 수 있다. 인사신이나 축술미의 삼형살이 원국에 있으면서 운에서 또 들어오면 그 특성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고 보면 된다. - P123

육합도 합의 일종이므로 그 목적은 음양이 합해 새로운 무엇을 만드는 것인데, 해害는 그것을 방해하여 망가지게 한다. 그러니 해가 있으면 합동해서 하는 작용을 방해해 공동의 일을 할 때 다른 사람들과 서로 마음이 잘 맞지 않아 곤란을 당한다. 그 대신 혼자 일하는 능력 132 이 발달하고 운을 만나면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니 하늘은 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 곧 하나의 약점이 다른 상황에서는 남들보다 강한 장점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사주에 이런 특성이 있으면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그것에 맞추어 살 수 있도록 조언을 해 주어야 한다. - P131

천을귀인과 삼기귀인

필자는 명리 원리에 대해 가능한 신살神殺을 사용하지 않고 설명하려 한다. 오행의 생극과 간지의 생장·소멸 및 운동 법칙을 가지고 사주를 논리적으로 훌륭하게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긴 세월 동안 사주를 보면서 무슨 이유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천을귀인과 삼기귀인의 적중률이 아주 높음을 체험했다. 그래서 특별히 독자들께서도 사주 해석에 참고하시라고 작은 지면이라도 할애하여 간략히 적어 두고자 한다. 필자는 아직까지 신살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할 실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그러니 독자들께서 사주를 익혀 그 작용에 대해 연구하여 학계에 보고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명리 공부에 도움을 주시길 부탁드린다.

천을귀인
천을귀인天乙貴人이 드는 해에 특별한 일로 만난 사람은 그 관계가 좋아 오래도록 유지되고, 평상시에도 천을귀인의 띠를 만나면 그 사람과 하는 일이 잘 풀리고 도움을 많이 받으니, 가능하면 천을귀인의 띠를 골라서 사귀면 좋다. 일간을 기준으로 갑·무·경은 축·미가, 을·기는 자·신이, 병·정은 해·유가, 신은 인·오가, 임·계는 사·묘가 각기 천을귀인이다.
그런데 사주에 천을귀인은 하나만 있어야 좋다. 두 개 이상 있으면 그것에 의지하는 특성이 강해져 사람이 너무 느긋하거나 씀씀이가 사치스럽고 헤퍼 도리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예를 든다면, 돈을 빌려주고도 상대방이 줄 때가 되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달라고 하지 않는 식이다.

삼기귀인
연월일이나 월일시를 중심으로 갑무경이나 을병정이나 신임계가 모두 있으면 삼기귀인으로 여기에 술해 천문이 있으면 아주 귀격 사주다. 인간관계에서 삼기귀인을 채워주는 상대를 만나면 정신적으로 서로 잘 통하니, 배필을 구할 때 이것을 서로 맞춰 주면 아주 좋다. 갑무경은 천상삼기로 음양이 하늘에서 시작되는 기점과 그 중간점을 나타내고, 을병정은 지하삼기로 땅에서 태양이 그 열기로 생명나무를 가꾸는 것을 나타내며, 신임계는 인중삼기로 찬 서리와 얼음 및 물이 함께 모여 있는 것을 나타낸다. 천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들끼리 모여 있는 것이니, 정신적으로 서로 잘 통하는 인자들이라고 보면 된다. - P135

장생​長生: 힘이 생겨나는 것이다. 양간은 어머니의 원조로, 음간은 아들의 후원으로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목욕​沐浴: 사춘기처럼 성장 과정의 어린 티를 벗어 버리고 어른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다듬고 고치며 치장한다.
관대​冠帶: 다른 것과 구분될 정도로 자신의 형체와 특성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건록建祿: 자신의 뜻을 있는 그대로 실현한다.
제왕​帝王: 자신의 기운이 가장 강해질 때다. 왕처럼 절대 양보하지 않고 가장 활발하게 기운을 펼친다.
쇠​衰: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의 운동을 전처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안으로는 힘이 빠지고 있다.
병​丙: 지금까지 유지된 힘으로 버티고 있지만 속으로는 힘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렇지만 지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자신의 뜻을 실현하는 상태이기도 한데, 바꿀 수 없는 습관과 같다.
사​死: 죽은 것과 다름없으니 힘없이 형태만 유지하고 있다.
묘​墓: 자신의 형태는 사라졌지만 아직까지 그 기운의 영향이 다소 남아 있다.
절​絶: 자신의 영향 곧 기운마저도 완전히 끊어져 사라졌다.
태​胎: 처음의 약한 기운이 드러나지 않고 미미하게 생성되기 시작한다.
양​養: 아직 형태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감촉에 의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존재가 확인된다. - P142

마지막으로, 양의 간지와 음의 간지에서 12운성이 다르게 받아들 145 여지는 부분도 기억하기 바란다. 양간지는 그 활발하게 움직이는 특성 때문에 쇠·병·사에서는 힘이 미약할지라도 희망을 품는데, 묘·절·태에서는 더 이상 어떻게 해볼 힘이 전혀 없어 절망하게 된다. 반면 음의 간지는 힘이 완전히 없어진 묘·절·태에서는 포기하고 다른 환경에 그대로 순응하여 편한데, 쇠·병·사에서는 어떻게 해 보려고 안간힘을 다하기 때문에 무척 고통스럽다고 본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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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은 무의식적으로 존재의 방향을 지시한다. 정관과 정재는 이 방향성에 타자적으로 개입하여 견제하고 길항하는 역할을 한다. 그 역할이란, 운명에 대한 일간의 정치적 독단을 제어하고 주체를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균형의 통치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균형감이 억압과 방임 사이에서 중심을 잡게 한다. 그래서 정관과 정재를 예로부터 사길신(四吉神), 즉 네 가지 길한 육친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편관과 편재 역시 제어와 견제의 상극관계이긴 하지만 음양이 같은 이유로 쉽게 감정적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정관과 편관은 모두 일간을 자극하는 시련의 아이콘이지만, 정관이 편관보다 더 공적이고 객관화된 시련이다. 편관은 음양이 같아서 좀 사적이고 감정적이다. 아는 사람한테 비판을 받으면 더 기분이 나쁘게 느껴지는 것을 편관적인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럴 경우엔 자기를 들여다보고 성찰을 하기보다는 원망의 감정에 빠져서 시야를 좁히게 된다. - P330

4정임합화목
정화와 임수가 만나면 목으로 변한다. 다만 이 두 결합을 방해하는 충이 없어야 한다. 정화와 충을 하는 천간은 신금과 계수이고, 임수와 충을 하는 천간은 병화와 무토다. 정화는 촛불 혹은 모닥불, 임수는 큰 강물이나 홍수를 표상한다. 정화와 임수의 만남은 강가에 놓인 모닥불 또는 홍수 같다. 강물이 붇기라도 하면 모닥불은 금방 꺼지고 만다. 정과 임의 합으로 목이 된다는 것은 정화의 입장에서는 모닥불에 땔감이 더해진다는 것이고, 임수의 입장에서는 물이 스며들 숲이 생긴다는 것으로 보면 된다. 숲이 물을 빨아들여 홍수를 예방하는 것에 비유할 수도 있다. 모닥불에 땔감을 잔뜩 올려놓으면 불은 처음에 주춤하거나 잘못하면 꺼지게 된다. 게다가 물을 흡수한 나무라면 모닥불은 더 약해질 것이다. 따라서 모닥불의 화력을 결정하고, 큰물의 수 337 위를 조절할 수 있는 주도 세력은 목이 된다. 정과 임이 만나면 화와 수의 성향은 약해지고 목의 힘이 강해진다.
촛불·모닥불[丁]의 상징성은 예(禮), 배려, 형식적, 미시 권력, 의존적인 성향으로 해석할 수 있고, 강물·호수[壬]의 상징성은 폭넓은 대인 관계, 느긋함, 유연한 리더십, 권모술수 등으로 확장할 수 있다. 이 둘이 목으로 변한다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정화의 형식적 예절이 아니라 목의 탈형식적이고 순수한 배려가 되고, 임수의 느리고 유연함은 목기의 빠르고 거친 속도로 변한다. 또한 정화의 의존적 성향은 약해지고 목의 독립적인 기운이 강해지며, 임수의 권모술수는 목의 돌파력으로 바뀐다. 물론 변하고 바뀐다는 말은 합화(合化)의 뜻일뿐, 원국에서 합이 되는 것이므로 원래 태어나면서 그런 바뀐 성향으로 살아가게 된다.

을 정 정 임
사 미 미 오

위 명식은 다산 정약용의 사주다. 천간의 정화와 임수가 합을 한다. 정화가 두 개지만, 하나는 일간이라 합이 안 된다고 보고, 월간 정화와 연간 임수가 합을 하고 있다. 정과 임을 충하는 천간이 없어서 온전한 합을 이루어 목으로 변한다. 하나 있는 임수마저 합을 이루고 나니 사주는 거의 목과 화 위주로 편향되었다. 따라서 임수의 거칠고 느긋하며 포용력이 있는 성향은 약해지고 목의 솔직하고 순수한 성정과 돌파력이 부각된다. - P336

그러나 정화나 임수를 충하는 천간이 대운이나 세운으로 들어올 때는 이 결합이 약해지면서 정화와 임수의 본성이 드러나게 된다. (…) 계수가 정화와 충을 함으로써 정임의 합이 느슨해진다. - P338

천간충은 합이 되는 자리에서 양 옆으로 한 칸 비켜 있는 자리의 천간과의 관계다. 갑이 마주보는 기토와 합을 한다면, 충은 기토 옆에 있는 무토, 경금과 각각 충의 관계를 갖는다. 그렇게 해서 천간충은 천간합에 비해 2배가 많은 10개의 충이 성립된다. 아래의 그림을 참조하시라. 천간합이 상호 견제와 합의의 관계라 한다면, 천간충은 심리적 변 340 화와 도발적 사유를 일으킨다. 이런 변화와 도발은 대체로 갈등 상황과 함께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사건이 없이는 정신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천간합은 정관과 정재의 관계다. 천간충은 모두 편관, 편재의 관계다. 예를 들면, 갑경충에서 갑목 입장에서는 경금이 편관에 해당하는 자리에 있고, 경금 입장에서는 갑목이 편재의 위치에 있다. 편재와 편관은 일간과 상극의 관계에 있으면서 음양이 같은 육친이다. 음양이 같은 상극 관계는 애증과 질투, 설렘과 의욕 등 감정적인 부딪힘이 일어나기 쉽다. 감정의 변화는 사건과 함께 일어나므로, 천간충은 작은 사건에서 비롯된다. 만일 지지충도 같이 있다면 천간충으로 일어난 감정의 돌발적 변수가 또 다른 큰 사건을 야기하게 된다. 원국에 있다면 평생운이 될 터이지만 그건 타고난 운이라 체감되는 것은 약하다. 물론 돌이켜보면 사건사고가 많았다고 후에 복기할 수는 있다. 천간충은 세운이나 대운으로 오는 경우에 체감지수가 높다. 시절 운으로 오면 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소소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그것은 대체로 기존의 상태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즉, 안정된 것은 균형이 무너지고, 미미한 것은 역동적으로 일어나며, 번다한 것은 단순해지고, 결합된 것은 깨지고, 나뉜 것은 다시 이어지는 것이 충의 속성이다. 천간충은 육친과 함께 해석해야 더 다채롭고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 P339

3사유축금
사유축합화금은 사화와 유금, 축토 세 지지가 만나서 금이 된다는 뜻이다. 단 사유축과 충을 하는 해수, 묘목, 미토가 없어야 한다. 사 347 유축합화가 되면 유금의 성질은 그대로 유지되고, 사화와 축토의 독특한 특징들은 금의 성질로 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사화의 강한 에너지는 금의 수렴력으로 인해 그 정도가 약해지고, 축토의 우유부단함은 금의 날카로운 결단력으로 방향을 바꾼다. 또는 사화의 책임감이 유금을 만나면서 더욱 강직해지고, 축토의 우직하고 성실함은 금의 실리를 배워 크게 무리하지 않고 적절하게 힘 조절을 하게 된다.

ㅇ 을 정 ㅇ
ㅇ ㅇ 사 유

위 사주는 월지 사화가 유금과 반합을 하여 금으로 변했다. 그래서 사화 본연의 독성과 강렬함이 금의 수렴으로 인해 그 정도가 많이 약해지고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것을 취한다. 그러나 사화 바로 위에 정화가 있어서 아래 위로 화기운의 기둥이 생긴다. 이를 간여지동(干與支同)천간과 지지가 같음이라 이른다. 간여지동의 경우 합이 잘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아래 위로 하나의 오행으로 강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다른 오행으로 잘 바뀌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을 고려했을 때, 사화는 유금과의 결합이 비교적 약하게 결합되어 있고, 다른 대운이나 연운으로 충이 올 때 외에도, 월운이나 일운 정도로도 쉽게 그 결합이 깨질 수 있다. 그래서 자주 사화의 강한 에너지가 봇물처럼 일어나, 갑자기 화를 낸다거나 일을 무섭도록 열심히 한 뒤 번 아웃이 되어 쓰러지는 일을 겪게 될 수 있다. 실제로 이 사주의 여성은 평소엔 매우 실리적이고 냉정한 성향인데, 불현 듯 화가 치밀어 오르거나, 일을 할 때 한 번 348 에 강렬한 에너지를 쏟기 때문에 어떤 때는 멀쩡하다가도 갑자기 기운이 바닥을 보이기도 한다. 이 여성이 미술 분야의 일을 한다는 점도 참고하면 좋다. 미술은 시각적인 일이므로 화기를 많이 쓴다.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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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좁은 시야 안에서 살 수밖에 없는 개인들은 실수를 할 수 있다. 문제는 사회의 반응이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때 ‘그것은 명백한 잘못이다‘라고 말해주면서 실수를 재발하지 않도록 제재를 가한다. 그래서 ‘법‘이 존재하는 것이며 이 법의 가치에 따라 사회의 여러 장치들, 이를테면 학교교육, 언론 등이 그 기능을 수행해야 함이 마땅하다. - P54

하지만 (‘역시나‘로 바꿔 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문제의식을 느껴야 하는‘ 걸 누가 애써 말해도 별 소용이 없다. 오히려 ‘오래된‘ 전통 운운한다. 그 전통이 ‘폭력적‘이어서 문제라고 말하면 ‘전통적‘이니 대수롭지 않다고 답한다. 조직 전체가 ‘우린 바보요!‘ 하고 세상에 소리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누가 송곳으로 기존의 관념을 ‘찌르면‘ 그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는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사회답다. 오히려 송곳이 되지 않을수록, 혹은 등장한 송곳을 노골적으로 무시할수록 ‘사회생활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곳 아닌가. 특히 남자가. - P57

윤종빈 감독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2005)는 ‘군대 적응=비인간화‘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그간의 군대에 관한 분석들은 지나치게 우회했다. 조직 이론을 들먹이기도 하고 영웅주의에 입각한 상징적 심벌을 강조하여 모순을 은폐한다든지, 군가 등을 목청 터질 듯 부르는 의례에서 집단주의가 형성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등 연역법에 근거해서 이론에 맞는 사례를 발굴했다. 그래서 관념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돌직구를 날린다. 군대는 ‘너무 어린‘ 사람들끼리 ‘너무 오래‘ 함께 살고 있는 곳이라고. - P76

이걸 따지지 않는 사소함이 중요하다. 특히 폭력 행위 ‘그다음‘을 처리해나가는 방식이 그러하다. 어떤 식의 폭력이든 ‘똑같이 되돌려주는‘ 시대가 아닌 이상 일상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거리는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꼴이 되기 일쑤다. 공권력을 통한 법 집행이 위안이 될 수 있지만 피해자가 느끼는 심리적 거리를 가해자가 좁히긴 좀처럼 어렵다. 죽을 때까지 진정성 있게 사과를 해야지만 용서, 그것도 아주 일부만이 ‘극적인 용서‘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군대는 그러지 않는다. 용서를 우습게 안다.
태정은 승영에게 사과한다.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승영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의 변명에 가까운 사과였지만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승영에게 사과하는 태정의 모습은, 이후 그가 왜 ‘용서받지 못할 자‘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문제는 용서를 구할 줄 모르는 뻔뻔함이 아니라, 너무나 쉽게 용서를 구하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있다.
가해자가 북 치고 장구 치고 가해자가 병 주고 약 주는 곳이 군대다. 이런 비합리성이 일상화된 공간에서는 폭력을 문제 삼는 자가 유난 떠는 자로 인식될 뿐이니 가해자는 용서받을 것이 없는 자가 되어 살아간다. 일반적인 세상에서 폭력이 동반된 문제가 이처럼 쉽사리 해결될 리 없다. 하지만 군대를 거쳐가는 이들은 세상 이치의 ‘역‘, 즉 오답을 정답으로 배운다. 착한 어른들은 이렇게 살지 않는다. - P78

그런데 아름답지 않은 것을 뒤늦게 눈치채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상황은 ‘아쉽다‘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특히 ‘폭력‘은 특정 언행이 존재한다면 가타부타 따질 필요 없이 그 자체가 ‘나쁜 것‘이다. 이 추잡한 것을 한참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것이 폭력이었구나‘라고 인지하는 것은 땅을 치고 억울해할 일이다. 피해자는 물론 잘못을 저지른 줄도 몰랐던 가해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잘못된 건 ‘잘못되었다‘고 빨리 정의 내려야 한다. 폭력을 폭력이라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나쁜 사회‘다. - P90

‘사람‘이 사회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성별 정체성이라는 ‘틀‘에 고착화되는 모습은 마치 돼지가 ‘스톨‘이라는 철제 공간에 갇혀 평생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살만 찌우면서 갇혀 사는 것과 흡사하다. 돼지의 몸이 ‘빨리‘, 그리고 ‘좀 더 기름지게‘ 커질수록 남는 장사인 것처럼 성별 정체성의 규격화도 기업의 입장에서는 엄청 좋아할 일이다. 그래서 해외 학자들은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한국의 자본주의가 유독 가파르게 성장한 이유로 (군부독재 외에도) ‘남자들의 사고방식‘을 손꼽는다. 한국의 남자들은 ‘자본주의 노동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딛기도 전에 학교와 군대에서 이미 자본가가 ‘부려먹기에‘ 최적화된다는 말이다. 즉 한국의 남자는 어떤 사회에나 있는 남자와는 ‘다른‘ 남자다. 그러니 ‘원래‘ 그런 남자는 없다. - P118

앞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중요치 않다. 우리가 던질 질문은 단 하나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여성의 운전 실력이 ‘평균적으로 남성보다 낮으니‘ 그런 식의 조롱과 멸시가 타당하단 말인가? 운전을 ‘짜증 나게 하는 사람‘을 그렇게 대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럼 남성은 운전을 ‘평균적으로 여성들보다는 잘하니‘ 동일한 경우에도 욕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이 질문은 찬반 토론할 성질이 아니다. 우리는 헌법의 가치로 일상이 통제되는 ‘2016년도의 민주 공화국‘에서 살고 있다. 복잡한 지하철에서 누가 나의 발을 ‘실수로‘ 밟았다고 해서 "나도 너의 발을 밟아주마!"라면서 ‘고의로‘ 그딴 행동을 한다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 이건 상식이다. 여자가 운전을 ‘조금 못한다면‘ 그건 말 그대로 그런 거다. 또한 이것은 모든 여자들이 그렇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고 모든 남자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도로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어떤 운전 미숙자 때문에 자신이 피해를 받을 때‘는 그 운전자의 성별을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배려‘하는 것만이 필요한 것이다. 그건 운전대를 잡는 ‘모든 사람‘이 고려해야 하는 시민의 덕목이다. 왜냐하면 ‘운전의 달인‘만이 자동차를 이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P136

하지만 이 사회는 ‘사상자가 발생하는‘ 그 끔찍한 사건을 목격하면서도 그런 경우 운전자의 대부분이 남자라는 객관적인 사실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건 운전자가 ‘남자라서가‘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이 운전을 잘못한 경우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주차를 이상하게 한‘ 차량의 운전자가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종의 문제로 치부된다. - P139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자들의 이런 위압적 태도가 ‘정말로‘ 여성들의 운전 실력을 위축시켜 객관적으로 ‘운전을 못하는 여성 운전자의 사례‘가 늘어난다는 게 문제다(그러면 다시 ‘김 여사‘ 이미지는 재생산된다. 이는 남자들이 여성 운전자를 무시하는 증거자료가 될 것이고 그렇게 악순환은 무한 반복된다). 이런 실험이 있었다. 여성 운전자를 두 집단으로 나누어 운전 실력을 테스트하는데, 한쪽 집단에만 "너는 운전 잘하니까 걱정 마!"라는 격려를 했다. 그런데 이 집단이 결과도 좋았다. 이는 여성들이 일상에서 ‘내가 운전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압박감을 지나치게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주눅‘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 P140

지하철 안에서 남자는 계속 옆에 앉아 있는 여자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여자는 치마와 검은색 스타킹을 신고 있었고 옆에서 ‘더듬고 있는 것도‘ 모를 정도로 잠에 빠져 있었다. 성추행을 얼마나 오랫동안 했는지, 그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이 광경을 고스란히 휴대폰에 담았고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은 삽시간에 퍼졌다. 유명한 ‘ㅇㅇㅇ역 성추행 사건‘이다. 경찰은 ㅇㅇㅇ역에서 급히 내렸다는 범인을 CCTV 화면을 통해 추적 중이라고 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남자는 자수한다. 증거자료를 누구나 확보할 수 있는 세상이기에 가능한 쾌거였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인터넷 공간에서 자료가 ‘퍼지는 속도와 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과거 수천 건의 ‘동일 범죄‘가 단지 스마트폰이 손에 없던 세상이었기에 면죄부를 받았던 게 아니었던가. 여하튼 이렇게 사건이 해결되자 기술 혁신이 민주주의를 확장시켰다는 말들이 나왔다. 그런데 ‘잡을 사람‘을 원칙대로 잡는 걸 민주주의 확장으로 표현하니 좀 그렇다. 오히려 ‘여전히‘ 전혀 변한 것 없는 세상 풍경을 걱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자가 그 시간에 술 취해 잠이 들어 있는 건 문제다. 스스로 조심해야지‘라는 식의 의견 역시 여지없이 등장했다. "여자들이 옷을 그렇게 입고 다니니까 성추행을 당하지!"라는 칠푼이 같은 인과관계 분석이 칠푼이 그 이상의 논리로 인정받는 걸 여전히 볼 수 있다는 것은 아직도 양성평등 세상으로 가기에는 멀었다는 뜻일 게다. - P153

‘딸바보‘는 슬픈 단어
마지막으로 ‘딸바보‘라는 말이 없다. 나는 최근에야 등장한 ‘딸바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아들바보‘라는 말은 없는데 ‘딸바보‘라는 말은 왜 생긴 걸까? ‘딸‘을 아빠가 사랑하는 건 당연한 것인데, 도대체 지금껏 어떻게 딸을 대했기에 부모가 자기 자식 사랑하는 게 ‘특별해‘ 보일 수 있을까? 이 단어를 보면 지금껏 한국의 여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고 어떻게 살았는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온갖 편견 속에서 공정치 못한 대우를 받으며 살지 않았겠는가. "나는 술, 담배, 여자를 멀리한다!"고 버젓이 말하는 사람들을 시시때때로 만날 수 있는 세상에서 ‘딸‘을 출산한 부모는 ‘아들‘을 출산한 부모에 비해 그 기쁨이 덜한 게 사실이다. 이 미세한 차이는 딸을 키우면서 고스란히 ‘차별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역사가 있으니 그냥 자기 딸 사랑해놓고 ‘딸바보‘가 될 수 있는 거다. 차별이 애초에 없었던 곳에서는 ‘원래‘ 그런 거지만 애초에 차별이 있었던 곳에서는 이조차 신기할 뿐이다.
이 토론을 하고 며칠이 지나 한 학생이 사진 한 장을 장문의 문자와 함께 전송했다. 마트에서 ‘아빠 쉼터‘를 발견하고 찍은 사진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선생님. 오늘 마트에 갔다가 깜짝 놀라서 찍었어요. 아니 예전에도 있었겠지만 이제야 깜짝 놀라네요. ‘아빠 쉼터‘가 어딘가 어색하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지금껏 살았네요. 장보기를 함께하는 걸 어색해하는 아빠들을 위한 이 세심한 배려가 놀라운 사회랍니다. 아빠와 엄마의 역할이 확연히 구분되어 있지 않고서야 가능했을까요? 저희가 토론 때 상상한 그런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쉼터겠죠?" - P234

"저 남자 담배 피워요"와 "저 여자 담배 피워요"는 문장의 구성 형태는 동일하지만 그 함의는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특정 사람이 어떤 기호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 혹은 백번 양보해도 ‘요즘 세상에 아직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다니‘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또 여기에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흡연할 자유를 구속하지 않겠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흡연의 주체가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래서 ‘저 여자 담배 피워요‘라는 문장에는 ‘어떻게 여자가 담배를 피우지?‘라는 질타의 뜻이 들어 있다. 또 이 문장 뒤에는 "요즘 세상 말세다"가 생략되어 있다. - P254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가 그 일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두려움의 발로라는 점을 생각할 떄, 남동생 밥을 챙겨주는 누나의 행동은 여동생 밥을 챙겨주는 것보다 ‘하지 않았을 때의 후폭풍‘이 더 크다는 것을 본인의 삶을 통해 이미 경험했기 떄문 아닐까. 몇 번쯤은 "내가 왜 밥을 차려줘야 되냐"면서 따져보았겠지만 그때마다 "누나로서의 희생정신이 없다", "누나가 되어서 그것도 못해주나"는 등의 소리를 들으면서 졸지에 ‘나쁜 년‘이 되다 보면 나중에는 이게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자신이 말하는 ‘이유‘에 사회적 공감대가 충분하다는 확신으로 이어진다. 다른 핑계 내지는 거짓말로 모임에서 끝까지 있지 못하는 이유를 밝혀도 되지만, 전혀 그러지 않는다. ‘남동생 밥 챙겨줘야 하는‘ 누나를 막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임에서 빠질 명분을 내세울 때 더 유용하다. 이상한, 하지만 강력한 ‘우선순위‘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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