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이 좁은 시야 안에서 살 수밖에 없는 개인들은 실수를 할 수 있다. 문제는 사회의 반응이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때 ‘그것은 명백한 잘못이다‘라고 말해주면서 실수를 재발하지 않도록 제재를 가한다. 그래서 ‘법‘이 존재하는 것이며 이 법의 가치에 따라 사회의 여러 장치들, 이를테면 학교교육, 언론 등이 그 기능을 수행해야 함이 마땅하다. - P54

하지만 (‘역시나‘로 바꿔 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문제의식을 느껴야 하는‘ 걸 누가 애써 말해도 별 소용이 없다. 오히려 ‘오래된‘ 전통 운운한다. 그 전통이 ‘폭력적‘이어서 문제라고 말하면 ‘전통적‘이니 대수롭지 않다고 답한다. 조직 전체가 ‘우린 바보요!‘ 하고 세상에 소리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누가 송곳으로 기존의 관념을 ‘찌르면‘ 그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는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사회답다. 오히려 송곳이 되지 않을수록, 혹은 등장한 송곳을 노골적으로 무시할수록 ‘사회생활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곳 아닌가. 특히 남자가. - P57

윤종빈 감독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2005)는 ‘군대 적응=비인간화‘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그간의 군대에 관한 분석들은 지나치게 우회했다. 조직 이론을 들먹이기도 하고 영웅주의에 입각한 상징적 심벌을 강조하여 모순을 은폐한다든지, 군가 등을 목청 터질 듯 부르는 의례에서 집단주의가 형성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등 연역법에 근거해서 이론에 맞는 사례를 발굴했다. 그래서 관념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돌직구를 날린다. 군대는 ‘너무 어린‘ 사람들끼리 ‘너무 오래‘ 함께 살고 있는 곳이라고. - P76

이걸 따지지 않는 사소함이 중요하다. 특히 폭력 행위 ‘그다음‘을 처리해나가는 방식이 그러하다. 어떤 식의 폭력이든 ‘똑같이 되돌려주는‘ 시대가 아닌 이상 일상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거리는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꼴이 되기 일쑤다. 공권력을 통한 법 집행이 위안이 될 수 있지만 피해자가 느끼는 심리적 거리를 가해자가 좁히긴 좀처럼 어렵다. 죽을 때까지 진정성 있게 사과를 해야지만 용서, 그것도 아주 일부만이 ‘극적인 용서‘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군대는 그러지 않는다. 용서를 우습게 안다.
태정은 승영에게 사과한다.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승영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의 변명에 가까운 사과였지만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승영에게 사과하는 태정의 모습은, 이후 그가 왜 ‘용서받지 못할 자‘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문제는 용서를 구할 줄 모르는 뻔뻔함이 아니라, 너무나 쉽게 용서를 구하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있다.
가해자가 북 치고 장구 치고 가해자가 병 주고 약 주는 곳이 군대다. 이런 비합리성이 일상화된 공간에서는 폭력을 문제 삼는 자가 유난 떠는 자로 인식될 뿐이니 가해자는 용서받을 것이 없는 자가 되어 살아간다. 일반적인 세상에서 폭력이 동반된 문제가 이처럼 쉽사리 해결될 리 없다. 하지만 군대를 거쳐가는 이들은 세상 이치의 ‘역‘, 즉 오답을 정답으로 배운다. 착한 어른들은 이렇게 살지 않는다. - P78

그런데 아름답지 않은 것을 뒤늦게 눈치채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상황은 ‘아쉽다‘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특히 ‘폭력‘은 특정 언행이 존재한다면 가타부타 따질 필요 없이 그 자체가 ‘나쁜 것‘이다. 이 추잡한 것을 한참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것이 폭력이었구나‘라고 인지하는 것은 땅을 치고 억울해할 일이다. 피해자는 물론 잘못을 저지른 줄도 몰랐던 가해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잘못된 건 ‘잘못되었다‘고 빨리 정의 내려야 한다. 폭력을 폭력이라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나쁜 사회‘다. - P90

‘사람‘이 사회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성별 정체성이라는 ‘틀‘에 고착화되는 모습은 마치 돼지가 ‘스톨‘이라는 철제 공간에 갇혀 평생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살만 찌우면서 갇혀 사는 것과 흡사하다. 돼지의 몸이 ‘빨리‘, 그리고 ‘좀 더 기름지게‘ 커질수록 남는 장사인 것처럼 성별 정체성의 규격화도 기업의 입장에서는 엄청 좋아할 일이다. 그래서 해외 학자들은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한국의 자본주의가 유독 가파르게 성장한 이유로 (군부독재 외에도) ‘남자들의 사고방식‘을 손꼽는다. 한국의 남자들은 ‘자본주의 노동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딛기도 전에 학교와 군대에서 이미 자본가가 ‘부려먹기에‘ 최적화된다는 말이다. 즉 한국의 남자는 어떤 사회에나 있는 남자와는 ‘다른‘ 남자다. 그러니 ‘원래‘ 그런 남자는 없다. - P118

앞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중요치 않다. 우리가 던질 질문은 단 하나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여성의 운전 실력이 ‘평균적으로 남성보다 낮으니‘ 그런 식의 조롱과 멸시가 타당하단 말인가? 운전을 ‘짜증 나게 하는 사람‘을 그렇게 대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럼 남성은 운전을 ‘평균적으로 여성들보다는 잘하니‘ 동일한 경우에도 욕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이 질문은 찬반 토론할 성질이 아니다. 우리는 헌법의 가치로 일상이 통제되는 ‘2016년도의 민주 공화국‘에서 살고 있다. 복잡한 지하철에서 누가 나의 발을 ‘실수로‘ 밟았다고 해서 "나도 너의 발을 밟아주마!"라면서 ‘고의로‘ 그딴 행동을 한다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 이건 상식이다. 여자가 운전을 ‘조금 못한다면‘ 그건 말 그대로 그런 거다. 또한 이것은 모든 여자들이 그렇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고 모든 남자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도로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어떤 운전 미숙자 때문에 자신이 피해를 받을 때‘는 그 운전자의 성별을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배려‘하는 것만이 필요한 것이다. 그건 운전대를 잡는 ‘모든 사람‘이 고려해야 하는 시민의 덕목이다. 왜냐하면 ‘운전의 달인‘만이 자동차를 이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P136

하지만 이 사회는 ‘사상자가 발생하는‘ 그 끔찍한 사건을 목격하면서도 그런 경우 운전자의 대부분이 남자라는 객관적인 사실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건 운전자가 ‘남자라서가‘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이 운전을 잘못한 경우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주차를 이상하게 한‘ 차량의 운전자가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종의 문제로 치부된다. - P139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자들의 이런 위압적 태도가 ‘정말로‘ 여성들의 운전 실력을 위축시켜 객관적으로 ‘운전을 못하는 여성 운전자의 사례‘가 늘어난다는 게 문제다(그러면 다시 ‘김 여사‘ 이미지는 재생산된다. 이는 남자들이 여성 운전자를 무시하는 증거자료가 될 것이고 그렇게 악순환은 무한 반복된다). 이런 실험이 있었다. 여성 운전자를 두 집단으로 나누어 운전 실력을 테스트하는데, 한쪽 집단에만 "너는 운전 잘하니까 걱정 마!"라는 격려를 했다. 그런데 이 집단이 결과도 좋았다. 이는 여성들이 일상에서 ‘내가 운전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압박감을 지나치게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주눅‘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 P140

지하철 안에서 남자는 계속 옆에 앉아 있는 여자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여자는 치마와 검은색 스타킹을 신고 있었고 옆에서 ‘더듬고 있는 것도‘ 모를 정도로 잠에 빠져 있었다. 성추행을 얼마나 오랫동안 했는지, 그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이 광경을 고스란히 휴대폰에 담았고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은 삽시간에 퍼졌다. 유명한 ‘ㅇㅇㅇ역 성추행 사건‘이다. 경찰은 ㅇㅇㅇ역에서 급히 내렸다는 범인을 CCTV 화면을 통해 추적 중이라고 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남자는 자수한다. 증거자료를 누구나 확보할 수 있는 세상이기에 가능한 쾌거였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인터넷 공간에서 자료가 ‘퍼지는 속도와 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과거 수천 건의 ‘동일 범죄‘가 단지 스마트폰이 손에 없던 세상이었기에 면죄부를 받았던 게 아니었던가. 여하튼 이렇게 사건이 해결되자 기술 혁신이 민주주의를 확장시켰다는 말들이 나왔다. 그런데 ‘잡을 사람‘을 원칙대로 잡는 걸 민주주의 확장으로 표현하니 좀 그렇다. 오히려 ‘여전히‘ 전혀 변한 것 없는 세상 풍경을 걱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자가 그 시간에 술 취해 잠이 들어 있는 건 문제다. 스스로 조심해야지‘라는 식의 의견 역시 여지없이 등장했다. "여자들이 옷을 그렇게 입고 다니니까 성추행을 당하지!"라는 칠푼이 같은 인과관계 분석이 칠푼이 그 이상의 논리로 인정받는 걸 여전히 볼 수 있다는 것은 아직도 양성평등 세상으로 가기에는 멀었다는 뜻일 게다. - P153

‘딸바보‘는 슬픈 단어
마지막으로 ‘딸바보‘라는 말이 없다. 나는 최근에야 등장한 ‘딸바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아들바보‘라는 말은 없는데 ‘딸바보‘라는 말은 왜 생긴 걸까? ‘딸‘을 아빠가 사랑하는 건 당연한 것인데, 도대체 지금껏 어떻게 딸을 대했기에 부모가 자기 자식 사랑하는 게 ‘특별해‘ 보일 수 있을까? 이 단어를 보면 지금껏 한국의 여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고 어떻게 살았는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온갖 편견 속에서 공정치 못한 대우를 받으며 살지 않았겠는가. "나는 술, 담배, 여자를 멀리한다!"고 버젓이 말하는 사람들을 시시때때로 만날 수 있는 세상에서 ‘딸‘을 출산한 부모는 ‘아들‘을 출산한 부모에 비해 그 기쁨이 덜한 게 사실이다. 이 미세한 차이는 딸을 키우면서 고스란히 ‘차별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역사가 있으니 그냥 자기 딸 사랑해놓고 ‘딸바보‘가 될 수 있는 거다. 차별이 애초에 없었던 곳에서는 ‘원래‘ 그런 거지만 애초에 차별이 있었던 곳에서는 이조차 신기할 뿐이다.
이 토론을 하고 며칠이 지나 한 학생이 사진 한 장을 장문의 문자와 함께 전송했다. 마트에서 ‘아빠 쉼터‘를 발견하고 찍은 사진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선생님. 오늘 마트에 갔다가 깜짝 놀라서 찍었어요. 아니 예전에도 있었겠지만 이제야 깜짝 놀라네요. ‘아빠 쉼터‘가 어딘가 어색하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지금껏 살았네요. 장보기를 함께하는 걸 어색해하는 아빠들을 위한 이 세심한 배려가 놀라운 사회랍니다. 아빠와 엄마의 역할이 확연히 구분되어 있지 않고서야 가능했을까요? 저희가 토론 때 상상한 그런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쉼터겠죠?" - P234

"저 남자 담배 피워요"와 "저 여자 담배 피워요"는 문장의 구성 형태는 동일하지만 그 함의는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특정 사람이 어떤 기호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 혹은 백번 양보해도 ‘요즘 세상에 아직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다니‘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또 여기에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흡연할 자유를 구속하지 않겠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흡연의 주체가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래서 ‘저 여자 담배 피워요‘라는 문장에는 ‘어떻게 여자가 담배를 피우지?‘라는 질타의 뜻이 들어 있다. 또 이 문장 뒤에는 "요즘 세상 말세다"가 생략되어 있다. - P254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가 그 일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두려움의 발로라는 점을 생각할 떄, 남동생 밥을 챙겨주는 누나의 행동은 여동생 밥을 챙겨주는 것보다 ‘하지 않았을 때의 후폭풍‘이 더 크다는 것을 본인의 삶을 통해 이미 경험했기 떄문 아닐까. 몇 번쯤은 "내가 왜 밥을 차려줘야 되냐"면서 따져보았겠지만 그때마다 "누나로서의 희생정신이 없다", "누나가 되어서 그것도 못해주나"는 등의 소리를 들으면서 졸지에 ‘나쁜 년‘이 되다 보면 나중에는 이게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자신이 말하는 ‘이유‘에 사회적 공감대가 충분하다는 확신으로 이어진다. 다른 핑계 내지는 거짓말로 모임에서 끝까지 있지 못하는 이유를 밝혀도 되지만, 전혀 그러지 않는다. ‘남동생 밥 챙겨줘야 하는‘ 누나를 막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임에서 빠질 명분을 내세울 때 더 유용하다. 이상한, 하지만 강력한 ‘우선순위‘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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