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라니! 시간이 흘러도 결코 낡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이 그것보다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는가! 위나라의 재상 거백옥은 공자에게 사람을 보내 근황을 알아보게 했다. 공자가 그 사자를 가까이 앉히고 이렇게 물었다. "그대의 주인은 뭘 하고 계시오?" 사자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제 주인님은 자신의 허물을 줄이고자 하시지만 그 일이 끝이 없나이다." 사자가 가고 나자 그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사자로구나! 정말 훌륭한 사자로다!" - P113

우리 뉴잉글랜드 주민들이 이처럼 비천한 삶을 영위하는 것 역시 우리의 눈이 사물의 표면을 꿰뚫어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실재일 거라고 생각한다. 만일 오직 사실만을 볼 줄 아는 누군가가 있어 마을 안을 돌아다닌다면 마을의 물방아둑은 어떻게 될까? 그 사람이 우리에게 자신이 본 사실을 알려 준다 해도 우리는 그가 말하는 물방아둑이 어디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공회당이나 군청, 구치소, 상점, 집들을 보고 진정한 눈으로 응시할 경우 그것들이 무엇처럼 보일지를 말해 보라. 그러면 그것들에 대해 말하는 순간 그것들 모두가 산산조각나고 말 것이다. 사람들은 진리가 멀리 있다고, 천체의 바깥이나 가장 먼 별의 저편, 아담 이전에 있었거나 최후의 인간 이후에나 오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영원에는 뭔가 참되고 숭고한 것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과 장소와 사건은 지금 이곳이다. 하느님 자신도 현재라는 순간에 완결되는 것이며 그 어느 시대에도 지금보다 더 거룩한 존재는 아닌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현실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그 안에 흠씬 젖어듦으로써만 숭고하고 고귀한 것을 파악할 수가 있다. 우주는 끊임없이 또한 유순하게 우리의 생각에 응답해 준다. 우리가 빠르게 가든 느리게 가든 언제나 우리의 길은 마련돼 있다. 그렇다면 생각하면서 삶을 영위하도록 하자. 어떤 시인이나 예술가의 구상이 너무나 아름답고 고귀해서 후손이 완성시킬 수 없을 정도였던 적은 없었다. - P115

이제 차분하게 자리를 잡고 일을 하면서 두 발을 의견, 선입견, 전통, 망상, 허상 따위의 진흙밭 깊숙이 집어넣자. 파리와 런던, 뉴욕과 보스턴과 콩코드, 교회와 국가, 시와 철학과 종교를 통틀어 이 지구를 덮고 있는 그 퇴적물들 속으로. 그러다 보면 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단단한 바닥에 이르러, 바로 여기가 틀림없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나서 지지점이 생겼을 때 홍수와 서리와 불 밑에 벽이나 국가를 세울 만한 자리를, 가로등 기둥이나 측량기를 세울 만한 자리를 만들기 시작하자. 나일강 수위를 재기 위한 측량기가 아니라 진실을 측량하기 위한 계기를 말이다. 그리하여 후세인들이 기만과 겉치레의 홍수가 얼마나 범람했던지를 알 수 있도록 말이다. 만약 당신이 똑바로 서서 사실을 대면하면 흡사 언월도(偃月刀)라도 되듯 그 사실의 양면에 번쩍이는 햇살을 보게 될 것이며, 그 예리한 날이 당신의 심장과 골수를 자르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행복하게 지상에서의 운명을 마치게 될 것이다. 삶이 됐든 죽음이 됐든 우리가 갈구하는 것은 오로지 진실뿐이다. 만약 우리가 정말 죽어 가고 있는 거라면 목구멍 안에서 끓어오르는 소리를 들을 테고 임종의 싸늘함도 느낄 수 있으리라. 우리가 살아 있는 거라면 부지런히 할 일을 하도록 하자. - P116

우리 자신 또는 후손을 위해 재산을 모으거나 가정이나 국가를 세우거나 명성을 얻어도 우리는 죽을 운명을 피할 수 없지만, 진리를 다룸에 있어서는 불멸이나 다름없으며 그 어떤 변화나 불의의 사고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고대 이집트 인이 아니면 인도인 철학자가 신의 조각상에서 베일의 한 자락을 들쳐 올렸는데, 그 떨리는 옷자락은 여전히 들려 있는 채로 남아 있으며 나는 지금도 그 철학자가 그랬듯 신선한 영광을 응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그토록 대담했던 것은 바로 그의 안에 있는 나 자신이었고, 지금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자는 바로 내 안에 있는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옷에는 그 사이 먼지 하나 앉지 않았다. 신성이 발견된 이래로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개선하고 또 개선할 수 있는 시간은 과거나 현재, 미래가 아니다. - P120

그리스어로 호머나 아이스킬로스를 읽는 학생이라면 방탕이나 사치에 빠질 염려가 없을 텐데,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영웅을 본뜨려 할 테고 아침나절을 그들의 저서로 신성하게 보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설혹 우리 모국어로 인쇄된 것일지라도 이 영웅시들은 타락한 이 시대에는 죽은 말로 된 듯이 읽힐 것이다. 우리는 지혜와 용기와 관용 같은 단어에서도 우리의 일상 용법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으리라고 짐작하면서 그 낱말이나 행 하나하나의 의미를 애써 판독해야 한다. 오늘날 번역본의 값도 더 내려가고 인쇄물도 풍부해졌지만 그렇다고 이 고대의 영웅시 작가들이 좀더 가까워진 것은 아니다. 그들과 그들의 글은 예전에 그랬던 만큼이나 진기하고 유별나 보인다. 젊은 날의 소중한 시간으로 고대의 언어를 몇 마디 배우기만 해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 그 언어는 거리의 진부함에서 벗어나 영원한 암시와 자극을 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농부가 주워들은 라틴어 몇 마디를 기억해서 암송하는 것도 헛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고전 연구가 현대의 보다 실질적인 학문을 위한 길이 되어 줄 것처럼 말하곤 하지만, 모험심에 넘치는 학생이라면 그것이 어떤 언어로 씌어지고 그 언어가 얼마나 오래된 것이든 상관없이 고전을 공부할 것이다. 고전이란 인간의 사상 중에 가장 고귀한 내용을 기록한 것에 다름아닐 테니까. 고전은 사멸되지 않은 유일한 신탁이며 가장 현대적인 질문에도 델포이나 도도나 신전조차 주지 못한 해답을 줄 것이다. 자연이 오래된 것이라 해서 자연을 공부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책을 잘 읽는 일, 다시 말해서 참된 정신으로 참된 책을 읽는 일은 숭고한 운동이며, 오늘날의 관습이 존중하는 그 어떤 운동보다도 힘든 일이다. 그 일은 운동선수가 하는 것만큼 훈련을 필요로 하며, 독서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거의 평생에 걸친 꾸준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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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가지를 치는 사람이 천 명이라면 악의 근원을 꺾는 이는 한 사람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시간과 돈을 쓰는 사람이 어쩌면 자신의 생활방식을 통해 그가 구하고자 하는 그 비참한 상황을 가장 열심히 더 만들어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한 명의 노예를 판 수익금으로 나머지 아홉 명의 노예들에게 일요일만 자유를 주는 위선적인 노예 주인과 다를 바 없다. 또 가난한 사람에게 부엌일을 시킴으로써 자비를 베푸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일은 자신이 하는 편이 훨씬 더 자비로운 일이 아닐까? 사람들은 수입의 10분의 1을 자선에 쓰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만 차라리 수입의 10분의 9를 자선에 쓰고 그 일에서 아예 손을 떼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결국 사회는 재산의 10분의 1만을 회수하는 셈이다. 이것을 재산가의 관용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사법 관리의 태만으로 봐야 할까? - P88

나는 자선에 의당 따라야 할 찬사를 깎아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바쳐 인류에게 축복을 안겨준 모든 이들을 공정하게 대하기를 요구하는 것뿐이다. 나는 인간에게서 고결한 행위와 자비로운 마음을 가장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데, 그것들은 이를테면 인간의 줄기와 잎에 해당한다. 그 풀이 시들면 사람들은 환자를 위한 비천한 용도로, 그것도 주로 돌팔이 의사들이 애용하는 약초로 쓰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인간의 꽃과 열매다. 인간의 향기가 내게 풍겨 오기를, 그 성숙함으로 우리들의 인간 관계에 풍미를 더할 수 있기를 원한다. 인간의 선함이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행위여서는 안 되며, 그것은 늘 남아도는 것, 그 사람에게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의식적이지도 않은 행위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수많은 죄를 감춰 주는 박애다. 자선가 자신이 헤어난 슬픔에 대한 기억으로 마치 공기처럼 인간을 감싸면서 그것을 연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절망이 아니라 용기를, 질병이 아니라 건강과 안정을 함께 나눠야 하며 질병이 전염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저 울부짖는 소리는 남부의 어느 평원에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가 빛으로 인도할 이방인들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우리가 구제해야 할 저 사납고 무지막지한 인간은 누굴까? 몸이 아파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심지어 복통만 일어나도(위장이야말로 동정심이 생기는 곳이니까) 그는 즉각 세상을 시정하려 들게 마련이다. 자신이 우주의 축소판인 그는 세상이 풋사과를 먹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그것은 참된 의미에서의 발견이며, 그가 바로 그 발견의 장본인이다). 실제로 그의 눈에는 지구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풋사과이며, 인간의 아이들이 채 익기도 전에 갉아먹을 것이라는 생각만 해도 끔찍스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는 즉각 과감한 박애정신을 발휘하여 에스키모 인과 파타고니아 인을 찾아내고 인구가 밀접한 인도와 중국의 촌락들을 포옹한다. 이렇게 몇 년 동안 자선활동을 벌이고 나면(강대국들은 그런 그를 자기들 목적에 이용한다) 그의 소화불량은 낫게 되고 지구는 흡사 익어 가는 과일처럼 볼이 발그레해지며 삶은 미숙함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감미롭고 살 만한 것이 된다. 결국 내가 저지른 짓이야말로 극악무도한 행위인 셈이다. 또한 나보다 더 악한 자는 과거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 P90

인간의 관습은 성자들과의 관계로 오염되고 말았다. 우리의 찬송가집은 하느님에 대한 저주와 영원한 인내의 선율을 반향하고 있다. 예언자와 구원자들조차 인간의 희망을 확립시켰다기보다는 두려움을 달래주는 데 그쳤던 것 같다. 생명이라는 선물에 대한 소박하면서도 억누를 길 없는 만족감이나 하느님에 대한 기념할 만한 찬미를 기록한 내용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건강이나 성공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내게 유익한 것이지만, 모든 질병과 실패는 그것이 내게 또는 내가 그것에 아무리 많은 동정을 품더라도 결국 나를 슬프게 하고 유해한 것이다. 요컨대 만약 진실로 인디언답게, 또는 식물답게, 혹은 매혹적이거나 자연스러운 수단을 동원해서 인류를 회복시키고자 한다면 우선 자연 그 자체처럼 소박하고 넉넉해지도록 하자. 우리의 이마에 드리워진 먹구름을 몰아내고 숨구멍마다 조금이나마 생명력을 불어넣어 보자. 가난한 자의 감독이 되려 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자. - P91

내가 숲속에 들어간 이유는 신중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생에서 꼭 알아야 할 일을 과연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삶이란 그처럼 소중한 것이기에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았고, 도저히 불가피하기 전에는 체념을 익힐 생각도 없었다. 나는 깊이 있게 살면서 인생의 모든 정수를 뽑아내고 싶었고, 강인하고 엄격하게 삶으로써 삶이 아닌 것은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 숲속에 널찍하고 반들반들하게 길을 닦아 삶을 맨 안쪽까지 몰아붙인 다음 가장 비천한 상태까지 내몰아 그 삶이 정말 비천하다고 판명날 경우 삶의 모든 천박함을 있는 그대로 뽑아서 온 세상에 공표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 그 삶이 숭고한 것이라면 직접 체험함으로써 그 숭고함을 알고 싶고 다음번 여행 때에는 그것에 대하여 진정한 얘기를 할 수 있기를 원했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악마의 것인지 하느님의 것인지 이상하리만큼 확신하지 못하면서 다소 성급하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영원토록 기쁘게 하는 일’이야말로 이승을 사는 인간의 주된 목적이라는 식의 결론을 내리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 P108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 쫓기듯이 삶을 영위해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일까? 우리는 허기가 지기도 전에 벌써 굶어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제때의 한 바늘이 아홉 바늘의 수고를 덜어 준다고 하면서 내일 아홉 바늘의 수고를 덜기 위해 오늘 천 바늘을 꿰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정작 중요한 일은 하나도 없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그저 무도병(舞蹈病)에 걸려 도저히 머리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불이라도 난 것처럼 교회에 걸린 종줄을 몇 번 당기기만 해도 채 종이 울리기도 전에 콩코드 외곽 농장에 있던 남자든(오늘 아침만 해도 수없이 온갖 약속을 둘러대며 바쁜 시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애든 여자든 할 것 없이 모든 일을 팽개치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올 것이다. 그것은 주로 화재에서 재산을 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솔직히 말하자면 불난 구경을 하기 위해서(왜냐하면 어차피 불이 난 이상 타버릴 테고 우리가 불을 지른 것은 아니니까), 또는 불끄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면 한몫 거들기 위해서일 것이다(그 일이 제대로 된다면 말이지만).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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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어느 누구도 속일 수 없는 보편적인 법칙이며 철도에 관해서도 결국은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다. 모든 인류가 이용할 수 있도록 세계 곳곳에 철도를 까는 일은 곧 지구 표면을 평평하게 만드는 일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주식으로 자금을 모아 삽질을 계속하기만 하면 마침내 모두가 어디든 순식간에 무료로 갈 수 있는 날이 온다는 식으로 애매하게 생각하지만, 군중이 역에 몰려들고 차장이 "발차!"를 외치고 기관차의 김이 물방울로 가라앉고 나면 기차에 탄 사람은 몇 명 되지 않고 나머지는 모두 기차에 치이는 사건이 생길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그 일은 ‘하나의 슬픈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요행히 그때까지 살아 있고 차비도 벌어놓은 사람이라면 기차를 탈 수 있을 테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신체적 탄력을 잃고 여행 의욕도 사라져 있을 것이다. 인생의 가치가 어느 때보다도 줄어들었을 노년기에 불확실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 돈을 버느라 인생의 황금기를 탕진한다는 것은, 훗날 고국으로 돌아가 시인으로 살겠다는 생각에서 먼저 돈을 벌기 위해 인도로 가는 영국인을 연상시킨다. 그 영국인은 인도에 갈 것이 아니라 당장 다락방으로 올라가야 했다. 이 땅의 판잣집에 사는 수많은 아일랜드 인들은 놀라 외칠지 모른다. "뭐라고? 우리가 건설한 철도가 좋은 게 아니란 말인가?" 하고 말이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아니, 철도는 좋은 것이다. 비교적 좋단 말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들은 이보다 더 무가치한 일에 종사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동포인 여러분에게 바라건대, 지금 이렇게 땅을 파는 것보다는 좀더 나은 일에 인생을 보낼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것이다." - P63

나는 사람이 가축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가축이 사람의 주인이며, 가축 쪽이 사람보다 훨씬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사람과 소는 서로 일을 교환하는 것이지만, 필요한 일만 생각해 볼 때는 소가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농장이 더 넓은 것이다. 사람은 교환한 일의 일부로 6주 동안 건초 작업을 하는데 그건 결코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모든 면에서 소박한 삶을 영위하는 나라, 즉 철학자의 국가라면 가축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 같은 엄청난 실수는 범하지 않으리라. 물론 철학자의 국가는 과거에도 없었고, 조만간 생겨날 가망도 없으며, 또 그런 국가가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내게 해 줄 노동의 대가로 말이나 소를 길들여 내 집에 하숙시키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자칫하면 내가 마부나 목동으로 전락하고 말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설혹 그 일에서 사회가 이득을 보는 듯이 보인다면 이렇게 자문해 보자. 한쪽의 이득이 다른 쪽에게는 손실이 되지 않는다고, 마부소년이 주인과 똑같이 만족할 이유가 있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어떤 공공사업을 가축의 도움 없이는 이룩할 수 없었다고, 그래서 그 사업의 영광을 소와 말과 더불어 누리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경우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 좀더 가치 있는 사업을 이룩할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이 가축의 도움을 받아 불필요하고 기교적인 일뿐 아니라 사치스럽고 무익한 일까지 하기 시작한다면, 그 중 몇몇은 소와 맞바꾼 노동을 전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가장 강한 자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동물을 위해 일할 뿐 아니라 그 상징물인 외부에 있는 동물을 위해서도 일을 한다. - P66

간단히 말해서 나는 신념과 경험 두 가지 모두에 의해, 소박하고 현명하게만 산다면 이승에서 한 사람이 먹고사는 일은 힘겨운 일이 아니라 유희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것은 보다 소박한 민족이 영위하는 직업이라는 것이 아직도 인위적인 민족의 경우에는 스포츠인 것과 마찬가지다. 나보다 더 쉽게 땀을 흘리는 사람이 아닌 한 꼭 이마에 땀을 흘려 가며 생계비를 벌 필요는 없다.
내가 아는 한 젊은이가 유산으로 몇 에이커의 땅을 물려받았는데, 자기는 그럴 방도만 있다면 나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결코 누구도 내 생활방식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다. 그것은 그 사람이 내 생활방식을 제대로 익히기도 전에 나는 또 다른 생활방식을 찾아낼지도 모른다는 이유말고도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부모나 이웃의 생활방식이 아니라 자기만의 생활방식을 신중하게 찾아서 추구하기를 바란다. 젊은이는 건축가도 농부도 선원도 될 수 있다. 다만 그가 하고 싶다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만은 없도록 하자. 선원이나 도망중인 노예가 북극성을 지표로 삼듯이 우리는 정확한 한 점을 지표로 삼을 때만 현명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평생의 길잡이로 삼기에 충분하다. 그것만 있다면 예정된 시일 안에 목표로 삼은 항구에 도착하지 못할지는 몰라도 올바른 항로를 유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 P83

그러나 그런 삶은 너무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마을 사람들도 있다. 사실이지 나는 지금껏 자선사업에 그다지 관여한 적이 없음을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하는 바이다. 나는 일종의 의무로 몇 가지를 희생시켰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자선의 즐거움을 희생시켰다. 마을의 몇몇 가난한 가정을 돕도록 만들려고 온갖 방법으로 나를 설득하려 한 사람들이 있다. 내가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었다면 어쩌면 심심풀이 삼아서라도 그 일에 손을 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가한 자에게는 악마가 일거리를 주니까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이 일에 관여하여 모든 면에서 내가 자립한 것만큼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의 삶에 의무를 지워볼 생각을 하고 또 그렇게 제안해 보기까지 했지만, 모두들 주저없이 가난한 채로 그대로 살겠노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처럼 많은 방법으로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으니 한 사람쯤 인도적인 일과는 거리가 먼 다른 일을 해도 좋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이 자선에도 재능이 있어야 한다. 선행이라는 일자리는 이미 만원이다. 게다가 나도 그 일이라면 꽤 해본 편인데,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 일이 내 체질과 맞지 않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사회가 내게 요구하는 선행을 하기 위해, 또는 세상을 파멸로부터 건지기 위해 나만의 소명을 의식적으로, 또 고의로 저버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는 어딘가 이 세상과 비슷하면서도 거의 무한대로 더 큰 어떤 불변성이 있어 현재의 세상을 지켜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 일에 소질이 있다면 막을 생각이 없다. 뿐만 아니라 내가 사양하는 이 일에 성심껏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지만 훗날 세상이 그 일을 나쁘다고 하더라도 결코 굴하지 마시오, 라고.
난 결코 내 경우가 특별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독자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변명을 늘어놓을 것으로 의심치 않는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는(이웃들이 그 일을 선한 일이라고 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나는 내가 그 일에 적임자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지만, 그 일이 어떤 것인지는 내 고용주가 찾아내야 할 것이다. 평범한 의미에서 내가 어떤 좋은 일을 하느냐는 내게는 논외의 일이며, 설혹 그것이 좋은 일이 된다 해도 그 대부분은 전적으로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좀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든가 친절한 마음으로 선행을 하려 들지 말고 현재 있는 그 위치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대로 시작하라고들 말한다. 만약 내가 그런 엄숙한 어조로 설교를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보다는 먼저 착해지라고 말하고 싶다. 흡사 따뜻하고 자애롭던 그 빛이 점점 강해져 결국 너무 눈부시게 된 나머지 어떤 인간도 그것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그와 동시에 한편으로는 궤도를 따라 세상을 돌며 선행을 하는 게 아니라(또는 새로 밝혀진 원리에 의하건대 세상이 선행을 하는 그 주위를 도는 게 아니라), 달이나 6등성에 자신의 불을 옮겨붙이고, 요정 로빈처럼 이집 저집 기웃거리면서 광인들을 미치게 만들고, 고기를 썩히고, 어둠을 어둡지 않게 만드는 태양은 없애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선행을 베풀어 자신이 신의 아들임을 입증하려 했던 파이톤이 하루 동안 태양의 전차를 타고 엉뚱한 길로 모는 바람에 하늘 아래에 있던 동네를 불태우고 지상을 그을렸으며 샘물이란 샘물은 모조리 말라붙게 만들고 거대한 사하라 사막을 만들어 결국 주피터가 벼락으로 그를 땅에 동댕이쳤고 태양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1년 동안 빛나지 않는 일까지 일어났던 것이다.
변질된 선(善)에서 솟는 것만큼 지독한 악취도 없다. 그것은 인간에게도 신의 경우에도 한낱 썩은 고기일 뿐이다. 만약 의식적으로 내게 선을 베풀려는 계획을 품고 내 집으로 누군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될 경우 나는 그의 선행이 내게 베푸는 결과, 즉 그 선이라는 것이 내 핏속에 섞일까 두려워 입과 코와 귀와 눈을 흙먼지로 가득 채워 질식하게 만드는 저 아라비아 사막의 건조하고 뜨거운 모래폭풍을 피하듯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날 것이다. 그건 안 될 일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연스러운 악행을 당하는 것이 낫다.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추위에 떨 때 따뜻하게 해주고, 또는 수렁에 빠졌을 때 (정말 내가 수렁에 빠지는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끌어내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게 선을 베푼 사람이 아니다. 그 정도의 일은 뉴펀들랜드 종의 개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자선은 인간애가 아니다. 하워드는 분명 나름대로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고 훌륭한 사람이었고 나름대로 그 보답도 받았다. 그러나 비교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가장 유복하게 살고 있을 때야말로 바로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그리고 그 경우 우리를 돕지 못한다면 그런 하워드 같은 사람이 백 명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나 또는 나와 비슷한 인간에게 진심으로 선을 베풀려고 한 자선 모임에 대해선 들어 본 적도 없다. - P85

가난한 이들에게는 설혹 그들에게는 요원한 본보기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도움을 주도록 하라. 돈을 주려면 그들에게 직접 건네지 말고 당신이 그들을 위해 그 돈을 쓰도록 하라. 우리는 종종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가난한 사람이 더럽고 남루하고 추해 보이더라도 그렇게 춥고 배고픈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닌 경우가 많다. 그건 어느 정도는 그 사람의 취향이며 단순히 불운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그럴 때 그에게 돈을 준다면 그는 그 돈으로 누더기를 더 사 입을지도 모른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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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컴퓨터가 이번에는 다른 것, 이를테면 야생 꿀벌의 집을 연구할 경우를 생각해 보자. 거기에서는 명백히 인공에 기인하는 모든 기준이 발견될 것이다. 즉 밀와와 그것을 구성하는 밀방에서는 단순하며 반복이 많은 기하학적 구조가 발견되고, 그 때문에 벌집은 발비존의 집들과 같은 범주로 분류될 것이다. 이 판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벌집이 벌의 활동의 소산이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그것이 ‘만들어진 것(인공으로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는 이유도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즉 이 활동은 엄밀히 자동적이고 직접적이지만 의식적으로 기도된 것은 아니다. 한편 양식 있는 박물학자로서의 우리는 꿀벌을 ‘자연으로 된‘ 존재로 보고 있다. 이 ‘자연으로 된‘ 존재의 자동적 활동의 산물을 ‘만들어진 것(인공적)‘으로 본다면 명백한 모순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좀 더 검토해 보면 알겠지만 모순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프로그램을 짤 때의 잘못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판단의 애매성에서 오는 것이다. 즉 만약에 그 기계가 이번에는 벌집이 아니라 꿀벌 그 자체를 검사한다고 하면, 거기에서 발견되는 것은 극히 주의 깊게 제작된 인공적인 물체일 것이다. 극히 표면적인 검사만으로도 꿀벌에게서는 좌우상칭과 평행이동 등의 단순한 대칭요소가 명백히 발견된다. 또 꿀벌을 한 마리씩 검사해 가는 동안에, 그 컴퓨터는 다음과 같은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의 구조의 극단적인 복잡성(이를테면 복부의 털의 수와 위치, 시맥(날개맥) 등)이 개체마다 충실히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러한 존재가 깊이 고려되고 건설적이며 또 가장 세련된 활동의 산물이라는 증거가 된다. 그 기계는 이러한 결정적인 자료를 토대로 화성의 NASA 관리에게 이러한 보고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ㅡ지구에서 한 기술을 발견하였는데, 그와 비교하면 화성의 기술 같은 것은 거의 원시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라고.
이상에서 우리는 공상과학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는데, 이렇게 길을 우회한 것은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명백한 듯이 보이는 ‘자연으로 된‘ 물체와 ‘인공으로 된‘ 물체의 구별을 확정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예시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구조적(거시적) 기준을 기초로 하면 인공적이란 어떤 것인가를 완벽히 정의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즉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인간은 기술의 산물과 같은 ‘진짜‘ 공예품의 전부를 포함하면서, 다른 편에서는 결정 구조와 같이, 생물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명백히 자연스런 물체를 배제할 수 있는 정의다. 우리는 결정 구조도 생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연 체계 속에 분류하고 싶기 때문이다. - P24

그러나 우리는 바로 객관성이 가리키는 바에 의하여 생물이 갖는 합목적적 성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생물이 제각기 구조와 성능을 통해서 어떤 목적을 실현하고 또 추구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거기에는 외견상 심각한 인식론상의 모순이 있다. 생물학의 중심적 문제는 바로 이 모순 자체며, 만일 이 모순이 외견상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문제를 풀어야 하고, 만일 실제로 모순된 것이라면 그것이 근본적으로 해답할 수 없는 것임을 입증해야 한다. - P42

도태이론은 지금까지 제출된 모든 이론 중에서 객관성의 원리와 양립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은 불변성을 유일한 근본적 특성으로 보고, 합목적성을 불변성에서 파생되는 제2차적 특성으로 보고 있다. 또한 도태이론은 단지 현대 물리학과 양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며, 또 그에 아무런 제한이나 부가도 붙이지 않는 유일한 이론이다. 도태적 진화의 이론이야말로 생물학의 인식록적 수미일관성을 결정적으로 보증하고, ‘객관적 자연‘에 대한 제과학(諸科學) 사이에 그것을 정립시키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이론을 떠받들기 위한 유력한 논거는 되지만, 이것만으로 그 이론을 충분히 정당화할 수는 없다. - P44

따라서 한편에서는 생물권, 즉 ‘생명을 가진 물질‘ 속에서만 명백히 작용한다고 생각되는 합목적성의 원리를 인정한다는 일군(一群)의 이론을 정의할 수가 있다. 내가 지금부터 ‘생기설(生氣說)‘ 이라 부르는 이들 이론은 생물과 무생물의 세계 사이에 근본적인 구별을 마련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보편적·합목적적 원리에 입각하는 일군의 생각이 있는데, 그에 의하면 이 원리는 생물권의 진화뿐만 아니라 우주의 진화도 지배하고 있으며 생물권의 내부에서는 다만 보다 정밀하고 또 강렬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들 이론은 생물 속에서, 보편적으로 방향이 정해져 있는 진화에서 생겨난 더욱 세련되고 더욱 완벽한 산물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진화의 도달점이 인간과 인류며, 거기까지 도달한 것은 그렇게 미리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ㅡ나는 이것을 ‘물활설(物活說)‘이라 부르기로 한다ㅡ는 많은 점에서 생기설보다도 흥미 있다. 그러므로 생기설에 대해서는 간단히 일별을 던지는 데 그치기로 한다. - P45

이러한 생각에 베르그송이 근본적인 것으로 보았던 또 하나의 생각이 결부되어 있다. 즉 합리적 지성은 비생명 물질을 지배하는 데는 매우 적합한 수단이지만 생명 현상은 전혀 파악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단지 본능만이 생명의 약동과 동질적인 것으로서 생명 현상에 관해 직접적이며 전체적으로 직관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분석적·합리적인 논문은 모두 무의미한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에 있어서의 합리적 지성의 고도한 발달에 따라 그 직관력은 중대하고 또 유감스러울 정도의 빈곤화를 초래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직관력의 부(富)를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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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나는 종종 우리가 흑인 노예제라는 이 야비하고도 이질적인 노예 행태에 빠질 수 있을 정도로 천박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실제로 남부와 북부 모두에는 그 제도에 전념하는 교활한 노예 주인들이 적지 않다. 남부의 노예 감독은 거칠다고 하는데 북부의 노예 감독은 한술 더 뜬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쁜 것은 자신이 자신의 노예 감독이 되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신성에 대해서 떠들다니! 밤낮으로 장터를 찾아다니는 저 큰길의 짐꾼을 보자. 그의 내면에 어떤 신성이 작용하고 있는가? 그의 가장 거룩한 의무는 자기 말들에게 사료와 물을 먹이는 일이다! 운송으로 얻는 이익과 비교할 때 그에게 있어서 자신이 처한 운명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는 지금 평판 좋은 시골 지주 나리가 되기 위해 마차를 몰고 있을까? 그는 얼마나 존엄하며, 또 어느만큼이나 불멸의 존재일까? 하루 온종일 움츠리며 굽실거리는 꼴을, 뭔지 모르는 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라. 그것은 그가 불멸이나 신성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자신에 대해 스스로 내린 평가, 자신의 행위에서 얻게 된 평가의 노예이며 죄수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평가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내린 평가에 비하면 나약한 폭군에 불과하다.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서 하는 생각, 그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짓거나 방향을 지시한다. 공상과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 서인도제도에서 자기 해방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윌버포스가 필요할 것인가? 또한 자신들의 운명에 지나친 관심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죽는 날까지 화장대 방석이나 짜고 있는 이 땅의 숙녀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라! 마치 영원을 손상시키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시간을 죽일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 P13

사치품 대부분, 그리고 이른바 생활 편의품이라고 하는 것들 중 상당수는 없어서 안 될 물건이 아닐 뿐 아니라 인류의 발전에 확실한 장애물이기도 하다. 사치와 편의에 대해 말하자면, 현인들은 가난한 이들보다 훨씬 더 소박하고 빈약한 생활을 누려왔다. 중국,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 등지의 고대 철학자들은 외적인 부라는 면에서는 누구보다도 가난하면서 내적인 부에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부자였던 계층이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별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지금 알고 있는 정도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들과 같은 부류로 좀더 현대적이었던 개혁자와 자선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자유의사에 의한 가난이라 할 수 있는 그 유리한 지점에 오르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인생에 대하여 공정하거나 현명한 관찰자가 될 수 없다. 농업이든 상업이든 문학이든 예술이든 간에 사치스러운 삶의 열매는 사치일 뿐이다. 요즘에는 철학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는 대학교수직이 찬탄의 대상인데, 그것은 한때 산다는 일이 찬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 P21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심오한 사상을 갖는다거나 학파를 세우는 일뿐만 아니라 지혜를 너무도 사랑하여 지혜가 지시하는 바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이며 관대하고 믿음성 있게 산다는 것이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인생의 제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학자나 사상가들의 성공은 대체로 왕이나 남자다운 성공이 아니라 아부하는 신하로서의 성공에 불과하다. 실제로 그들의 조상이 그랬듯이 영합함으로써만 겨우 삶을 영위해 나가는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고귀한 인간의 본보기라곤 할 수 없다. 하지만 어째서 인간은 이토록 끊임없이 타락하고 있는 걸까? 무엇이 가문을 영락케 만드는 걸까? 국가를 쇠약케 하고 파멸로 몰아가는 사치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의 삶에 사치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철학자는 외적 삶의 양태에서조차 시대를 앞서는 사람이다. 그는 동시대인들처럼 배불리 먹거나 편안히 자거나 좋은 옷을 입거나 따뜻하게 지내지 못한다. 어떻게 철학자이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자기 자신의 생명의 열을 유지하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 P22

그런 식으로 나 역시 섬세한 재료로 일종의 바구니를 엮었지만 결국 남이 살 만한 물건으로 만들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것들을 엮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남들이 내 바구니를 살 만한 것으로 만들 궁리를 하는 대신에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팔지 않아도 될까를 궁리했던 셈이다. 사람들이 찬미하고 성공했다고 여기는 삶은 한 가지뿐이다. 어째서 우리는 다른 삶들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어느 한 가지 삶만을 과장하는 것일까? - P26

또는 식초 한 방울에 든 세균을 들여다보는 사이에 자기 주위에서 우글대는 괴물에 먹혀버릴 수도 있다. 자신이 캐내어 녹인 광석에서 잭나이프를 만든 아이와(그는 그 과정을 배우기 위해 필요한 책을 읽는다), 대학에서 야금학 강의에 출석하면서 아버지에게서 로저스제 주머니칼을 선물로 받은 아이 둘을 놓고 한 달이 지나면 어느 쪽이 더 많은 발전을 이룩했을까? 둘 중 어느 아이가 손가락을 베기 쉬울 것인가?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내가 재학중에 항해학을 수강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만약 내가 한 번이라도 항구로 나간 적이 있다면 항해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을 텐데 말이다. 가난한 학생들조차 정치경제학만 공부하고 또 수업 받고 있는데, 정작 철학과 동의어인 삶의 경제학은 오늘날 대학에서 진지하게 교습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학생이 아담 스미스와 리카르도와 세이의 저술을 읽는 동안 그의 아버지는 갚을 길 없는 부채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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