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1
한승원 지음 / 열림원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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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의 ‘추사’를 읽고 추. 사. 라고 천천히 발음해봤다. 미세하게 공기가 흔들리는 것 같다. 손을 내밀어 추. 사. 라고 써봤다. 분명하게 공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림 사이로 쓸쓸함이 물 밀듯이 밀려온다. 추. 사. 당신은 그곳에 있는 것인가요? 나는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 말하고 만다. 다시 책을 본다. 이것이 무엇이기에, 내 마음을 이리 쓸쓸하게 흔들리게 하는 이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낱 책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고도 야릇한 이것에 처음 손을 뻗었을 때, 묘한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내 행위가 ‘독서’의 그것이 아니라 벽 하나를 뚫고 지나가는 듯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추사라고 불렸던 그 사람을 바로 옆에서 또렷이 쳐다보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문장을 읽으면 읽을수록 추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 했다. 가까웠다. 너무 가깝게 느껴져 이게 바로 한승원의 소설이구나, 하는 감탄을 하면서도 소름이 돋기도 했다. 만져서는 안 되는 금기를 만진 듯 한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 

놀라면서 책을 읽고 또 읽을 무렵, 나는 ‘추사’가 다른 역사소설들과 많이 다르다는 걸 알았다. 역사소설의 주인공은 착하다. 좋게 평가받게 된다. 어찌할 수 없이, 작가들이 그들에게 동정표를 던져주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런데 한승원은 추사를 비난받게 만들기도 했다. 저 무엄한 녀석!, 하는 생각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었다. 좋게 보일 때도 있지만 분명히 비난도 받도록 했다. 무슨 조화일까. 어째서 그렇게 한 것일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 그것이 독자를 향한 최대한의 친절이라는 것, 바로 이것이다.

써놓고 보니 뻔한 말 같다. 인정한다. 뻔하다. 결론은 독자가 만들고 유추하고 상상을 더해가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역사소설들은 그렇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암묵적으로 결론을 만들어놓고 있다. 그러고 나니까 독자들이 그것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꼴이 된다. 독자들은 작가가 원하는 대로 소설을 읽고 마는 것이다. ‘추사’는 아니었다. 판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추사는 오만한 천재인가?, 시대의 불우한 희생자인가? 그 답을 독자가 내릴 수 있게 만들어주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쓸쓸하다. 내가 응원하고 싶은 이 사람이 내 소망과 달리 ‘불우’한 인생이라고 낙인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불러본다. 추. 사. 이 이름은 쓸쓸하다. 그러나 소설의 제목 ‘추사’를 불러볼 때는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제대로 된 역사소설 만났다는 생각에 그렇다. 처음부터 끝까지 과거-현재 구조를 반복한 것이 조금은 섭섭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추”/“사” 떠오르는 사람 이름과 책 제목에 가슴이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다. 다시 생각해도 이 책을 읽는 건 단순히 독서한 것이 아니었다. 과거로 걸어갔다 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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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창비청소년문학 2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 / 창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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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호수 캠프. 이름은 예쁘다. 하지만 그곳은 아이들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는 곳이다.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일종의 소년원 같은 곳. 그곳에 뚱뚱하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놀림 받던 스탠리가 누명을 쓰고 들어가게 된다. 벌칙은 단 하나. 매일같이 구덩이를 파는 것이다. 이름과 달리 호수가 없는 그곳, 땡볕 아래서 삽을 들고 구덩이를 파야 쉴 수가 있다. 처절한 강제노동, 아동학대! 그런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그 끔찍함에 가슴 속이 뻥 뚫린 것 같았다. 아이들은 도대체 왜 구덩이를 파고 있는가. 소장이 시켜서다.

끔찍함을 느끼면서도 의아했다. 다른 이야기가 나올 때야 그 이유를 알았다. 여기서 이유를 쓸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소장의 탐욕 때문이다. 그로 인해 아이들만 고생해야 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끝에서는 진한 감동을 줬다. 구덩이를 파는 스탠리, 돈을 잃어버렸던 스탠리의 조상, 사랑을 하다가 비참한 최후의 맞이했던 백인여자의 이야기가 합쳐지면서 그렇게 된다. 처음에는 이야기가 세 개가 동시에 나와서 약간 당황했는데 그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가슴 속에서 감동의 축포가 마구 터지는 것 같았다. 후후후. 정말 굉장하다.

소설을 보고 좋아하면서도 그걸 남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별로 안한다. 하지만 ‘구덩이’를 보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청소년문학이라고 하지만, 오래토록 기억돼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구덩이’는 그렇게 되도 부끄럽지 않은 책이다. 이런 책이라면, 세상은 그렇게 대접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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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11-24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리뷰 당선 축하합니다.
저도 며칠 전에 이 책 읽고 리뷰 썼는데, 정말 재미있고 괜찮은 책이라 추천하는 책입니다!

오월의시 2007-12-01 00:5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거 정말 좋은 책이죠.^^

순오기 2008-10-24 19:27   좋아요 0 | URL
제가 님의 구덩이 리뷰당선 축하 댓글을 달았었네요.^^
이때는 전국구 까탈님인줄 몰랐네요~~ 하여간 더 반갑네요. 즐찾하고 갑니다~

2008-03-17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월의시 2008-03-18 22:57   좋아요 0 | URL
네^^
 
폼페이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
로버트 해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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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 팩션’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공상적인 내용이 너무 많고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하지만 “폼페이 최후의 날 카운트다운,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라는 문장에 끌려 ‘폼페이’를 보고 그런 생각은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신뢰를 안 한다니! ‘폼페이’정도의 소설만 있다면 히스토리 팩션은 부활할 지어다! 책을 덮은 뒤에 나는 그런 확신을 하고 말았다.

‘폼페이’는 폼페이가 멸망하기 이틀 전에 일어난 일들을 소설화했다. 책을 보기 전에 나는 폼페이에 관한 지식이라고는 화산이 폭발해서 망한다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이틀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당연히 몰랐다. 그래서 궁금했다. 이틀 전부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인간의 욕심, 끝없는 물욕… 그것이 있었다. ‘폼페이’의 부자들은 미쳐있었다. 노예들을 부려먹고 자신의 재산을 불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이 나오지 않는 이상한 일이, 화산 폭발과 같은 재앙이 곧 들이닥칠 것임을 암시하는 징후가 있었는데도 그것 때문에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의 눈과 귀에는 오로지 돈과 아부하는 소리만 들렸다. 아! 한 남자가 그것을 막아보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폼페이에 들이닥치는 멸망의 전주곡은 신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인간이 무얼하겠는가. 화산 폭발, 그리고 멸망.

가슴이 저렸다. 속상했다. 마음이 아팠다. 로버트 해리스는 어쩌자고 그 순간을 실감나게 묘사해서, 가슴들이 비명을 지르고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것을 상상하게 만들었는지… 그들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었다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었다. ‘폼페이’에서 그 부분을 읽을 때는 소름이 끼쳤다. 뭔가에 홀린 듯 심장이 떨리는 순간까지 맞이하고 말았다.

아프다. 이 소설은 나를 아프게 만든다. 하지만 희망을 이야기해서 나는 웃을 수 있었다. 그 남자,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살아남아서 비극을 이야기하기로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말하려고 계속 걷는다. 그들의 뒷모습을 상상하자 기뻤다. 그 재앙에서도 인간이 나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내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소름끼치게 생생한 묘사가 압권이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다시 읽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히스토리 팩션에 대한 신뢰감까지 생겼다. 엄청난 스케일로 나를 압도한 ‘폼페이’, 쉽게 잊혀 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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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ck 스틱! - 뇌리에 착 달라붙는 메시지의 힘
칩 히스.댄 히스 지음, 안진환.박슬라 옮김 / 웅진윙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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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로써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 널린 메시지만 해도 얼마나 많은가. 홍수다. 신촌에 있는 건물 하나에만 걸린 메시지만 해도 한 두 개가 아닌데 그런 건물은 또 덕지덕지 붙어있다. TV광고만 해도 그렇고 신문을 장식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인터넷도 사정은 비슷하다. 여기저기에 메시지가 수두룩하다. 뭐 메시지가 ‘강렬’하다면 전달될 수는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도 않다. 메시지는 왜들 그리 진부한가. 금연광고의 메시지는 몸에 나쁘다는 소리만 하고 책 광고의 주요 메시지는 ‘아마존 베스트 1위’타령만 하고 있다. 지겹고 지루한 광고의 메시지들. 한번 보면 잊어버리고 만다.

내가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어떨까. 잠시 생각해봤다. 어렵다. 어려운 일이다. 돈 많이 주고 만드는 것일 텐데, 쓸데없이 버려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하기는 해야 할 것 같고… 어쩌지?

머릿속에서 뭔가 번쩍하는 것이 있었다. ‘스틱’이었다. 알라딘 뉴스레터에서 책을 알게 됐다. 정말 도움이 될까? ‘뇌리에 착 달라붙는 메시지의 힘’을 알려줄까? 속는 셈 치고 보기로 했는데 어느새 나는 메모를 하고 있었다. 오, 스틱! 구세주였어!

메시지를 착 달라붙게 하는 원칙이 있다. 1. 단순성 2. 의외성 3. 구체성 4. 신뢰성 5. 감성 6. 스토리. ‘스틱’은 이것들을 하나씩 설명해주고 있는데 그 설명이 금은보화 못지않다. 왜 이런 걸 몰랐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무릎을 몇 번이나 쳤던가. 다양한 예시들이 있어서 이해하기는 또 왜 그리 쉬운지. 감탄, 감탄, 몇 번이나 감탄했는지 모르겠다.

너무 감탄한 나머지, 나는 이런 생각도 했다. 내가 갖고 있는 책 한권만 남기고, 모든 ‘스틱’이 사라져버리면 안될까? 나만 보고 싶고 나만 갖고 싶다! 이 어마어마한 예시들과 단순명료한 원칙 설명, 두고두고 나만 보고 싶다! 는 생각이 들 정도로 훌륭하다. 이쪽 분야의 책을 몇 권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올해 ‘이기는 습관’과 함께 이 분야 최고의 책으로 손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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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장 쪽으로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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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을 내어 교외의 전원주택에 사는 평범한 월급쟁이. 사육장에게 탈출한 개가 월급쟁이의 자식을 습격한다. 월급쟁이는 병원을 찾아야 한다. 사람들은 다들 “사육장 쪽으로” 가면 병원이 있다고 말한다. 월급쟁이는 이리 저리 헤매다가 ‘개’의 소리를 발견한다. 그곳은 병원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월급쟁이는 안도한다. 병원 같은 것은 둘째 치고, 월급쟁이는 안도하고 만다. 아, 불쌍한 월급쟁이, 비정규직 인생이여!
 
편혜영의 소설집에서 ‘사육장 쪽으로’부터 봤다. 소설을 보고 난 뒤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광폭하다니! 문장이 그런 것이 아니다. 단어가 그런 것도 아니다. ‘월급쟁이’라는 소시민으로 그들의 무기력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소설의 목소리가 나를 두렵게 했다. 이런 소설을 봤다는 사실에 나는 두 번 세 번 놀라고 말았다.

편혜영의 첫 소설집 ‘아오이가든’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악몽’같은 소설이었다. 하지만 ‘사육장 쪽으로’는 ‘악몽 같은 현실’을 담아낸 소설이다. 진일보했다. 앞으로 한 걸음 나갔다. 좀 더 세련되게 소설의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전에는 ‘특이’하다는 생각을 들게 했는데 이번 소설집은 특이하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듣는 이를 두렵게 만든다. 날카로워졌다. 현실의 문제를 소설에 장착시켜 사람들의 심장을 겨누고 두려움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소설집에 있는 소설들 대부분이 마음에 들지만, ‘분실물’도 ‘사육장 쪽으로’만큼 높게 평가하고 싶다. 무기력한 직장인에게 찾아온 승진의 기회, 그것은 일종의 범법행위였다. 그는 동참했지만, 중요한 순간에 그것을 분실하고 만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그 남자의 마음을 편혜영을 너무 실감나게 그렸다. 책을 들고 있는 손까지 떨리게 만들 정도로… 두려운 소설이다.

그저 독특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읽으려 했지만 결국 나는 편혜영 소설이 ‘업그레이드’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다른 여성 작가들은 고독한 척, 쓸쓸한 척하면서도 은밀하게 예쁘고 아름다운 소설을 쓴다. 그런데 편혜영은 정말 고독과 쓸쓸함을 말하고, 나아가 현대인의 두려움을 콕 찍어 말하고 있다. 편혜영이라는 소설가가 있다는 것과 ‘사육장 쪽으로’라는 소설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보람이다.

후후후. ‘사육장 쪽으로’를 인정한 뒤, 나는 이제 편혜영 쪽으로 방향을 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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