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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제주도 여행을 떠올려 보면 비행기 타본 일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본 나로서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까마득한 풍경이 실로 오금이 저리는 비현실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부터 착륙하는 순간까지 창유리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도저히 떨어질 수가 없었다. 신문물에 전율하던 구한말 개화파들의 심정도 이보다 더 강렬하지는 못했으리라.

기내에서 이토록 과도한 반응을 보이는 승객은 (내가 봐도) 나밖에 없었다.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을까 손에 땀을 쥐며 노심초사하는 동안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신문을 보거나 심지어는 아예 창을 닫아놓고 잠을 자고 있더라. 우주의 신비가 목전에서 펼쳐지는데 저토록 태연하다니 저들은 대체 비행기를 얼마나 밥 먹듯이 탄 사람들이란 말인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순간에도 비행기는 창공을 우아하게 날고 있었다. 아니, 우아하다 못해 그것은 심지어 약간은 게으른 편이었다. 창밖으로는 그 어떤 물체도 휙휙 지나가지 않았다. 몽글몽글한 구름 덩어리들과 장난감 같은 도시들, 주름진 산맥까지도 비행기 못지않게 우아해서 그저 서서히 자리를 이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내도 별 움직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천 미터 상공에서 시속 몇 백 킬로로 날고 있는 물체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 치고는 다들 너무나 태평했다. 놀랍게도 이 모든 정체된 상황 속에서 비행기는 한 시간 만에 벌써 제주도였다.

믿거나 말거나, 비행기를 타는 동안 나는 잠시 인간 아닌 다른 생명체가 되어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인간보다 더 장수하는 것들, 이를테면 나무나 암석의 시간을 일시적으로나마 간접 체험한 기분이었달까. 허풍이라 해도 어쩔 수 없지만, 간접 체험을 통해 나는 작게는 하루살이의 시간과 크게는 성운의 시간까지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흔히 신이라고 말하는 무시간성의 존재를 떠올려보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도무지 비행기 따위에는 견줄 수도 없이, 지극히 빠르고 또한 지극히 느릴 그 존재에게는 시공을 초월한 만물의 부단한 생멸이 어떻게 그려질까? 이런 생각들을 하느라 나는 기내에서 그 누구보다도 과도하게 흥분한 승객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얼마나 정적인 상태로 있었는지. 얼마나 느리고 고요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머물러 있었는지. 아, 이 글을 쓰고 있으려니 또 다시 비행기를 타고 싶다. 돌 속에서 흐르는 것만 같던 그 오묘한 시간을 또 다시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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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의 자연 치유 - 진정한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자연건강식과 치유식, 요가, 명상
문숙 지음 / 이미지박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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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간소하고 청빈한 삶을 권장하는 글이 지나치게 화려한 편집 디자인을 거치는 바람에 다소 부조리한 책이 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감동을 주는 글이다. 산문이나 수필이 글쓴이의 삶을 얼마나 반영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장르의 글 역시도 삶에 대한 일종의 훼이크 같은 거 아닐까. 자기 이야기를 하는 글은 많은 경우 삶을 윤색하거나 아니면 결정적인 곳에서 기만하고 심지어는 배반한다. 장르가 어찌 되었든 글은 그저 그 자체로 독자적일 뿐이다. 이것이 여태까지의 생각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선 그래도 글에서 풍기는 향 만큼은 예외적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담백하고 소박한 식사, 명상과 산책 정도는 하와이에서 대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아도 마음만 먹으면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활동이겠다. 건어물녀 생활을 이제 그만 청산하고자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강한 의욕을 심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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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0-09-29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읽지 않았지만, 자기 삶을 전시하는 글의 가장 윤리적인 방식은 위악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수양 2010-09-29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잘 모르겠지만 다만 위악적인 글이 흔하지 않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생각을 정리하거나 혹은 일기처럼 무어라 끄적거리고 있으면, 마치 '나'라고 하는 정당하고 확고한 무언가가 일시적으로나마 뚜렷하게 존재하는 듯한 환상에 빠지게 된다. 써놓은 글쪼가리의 질과는 상관없이 그냥 그런 과정 속에서 단단한 자기존재감 같은 게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구축되고 인식되는 '나'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환상적이다. 마치 상상계의 아이가 거울을 보고 홀로 즐거워하는 것처럼 서글픈 촌극이다. 그러나 실은, 텍스트로서 존재하는 '나' 따위는, 그러니까 텍스트를 통한 자기확인이라는 것은, 애당초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 지극히 무의미한 유희라는 생각... 그것은 마치 신기루 같다. 무언가를 읽는 일이 나에게는 진리를 구하는 일도 앎에의 의지도 아니라 그저 도피하는 일인 것만 같다. 도피하여 혼자만의 신기루를 지어내는 일만 같다. 아무 것도 읽지 않고 아무 것도 적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나보다 훨씬 더 하루를 충직하고 유의미하게 보내는 내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혐의가 점점 더 뚜렷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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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아나토미 시즌 1 - Grey's Anatomy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오랫동안 세상의 모든 방면의 테크니션들에게 존경보다는 차라리 경멸과 거부감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지적 기형에 대해 냉소하고 연민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내 직업의 어떤 부분에서 오는 자괴감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했고, 제너럴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개인적인 허영심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고 마음을 조금은 고쳐 먹게 된 것 같다. 어떤 한 분야에서 능숙한 처신과 유능한 기술을 보여주는 사람의 모습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지고 아름답다. 다만, 그가 자신의 일이 세계의 모든 가치로운 것들의 전부라고 착각하지 않는 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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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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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어보면, 60년대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면 뿐만 아니라 사유의 깊이나 정신성에 있어서도 확실히 후진국 수준을 면치 못했던 것 같다. 그 시절 한국사회에서 그나마 일관된 어떤 정신적 기조를 찾자면 아마도 '다위니즘'이 아니었을까. 철학이 부재한 사회에서는 약육강식의 동물적 인간 본성이 굉장히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발휘된다. 당시 사회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잘 살아보겠다는 그악스런 의지, 그리고 바지런한 기질이다.

명분으로 내걸 철학조차 필요없는 야만적 정치 체제, 원칙과 정의 따위는 실종된, 흡사 정글과도 같은 이전투구식 사회 분위기... 이 책을 통해 엿본 60년대 한국사회의 풍경이다. 마치 남의 나라 이야기인 듯 새삼스레 치를 떨게 되지만, 실상은 그 비루한 과거가 오늘날 우리 사회를 존재케 한 토대인 것이다. 저자는 6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으로 기회주의를 꼽고 있지만, 시대정신이라는 게 결코 십여 년을 주기로 변화하는 성질의 것은 아닐 게다. 어쩌면 기회주의는 강국들로 둘러싸인 불안정한 지정학적 위치 속에서 급격한 역사적 정치적 변동을 겪으면서 한국인이 체화한 뿌리깊은 습속 같은 것인지도. 

높은 인문학적 소양과 뛰어난 철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유럽의 역사 역시 야만적이고 추잡하기는 매한가지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인간성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대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확실히, 진창 속에서도 무언가 정신적으로 반짝이는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면, 영국 정치사에서 의회민주주의가 정착되기까지의 과정이라든가 하는 그런 부분들...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에서는 반짝이는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만한 인물들이 모조리 고문당하거나 처형되거나 암살당한다. 한국현대사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오욕과 슬픔이다. 대단히 자학적인 심정에 빠지게 된다. 소국의 역사라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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