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나서 생각을 정리하거나 혹은 일기처럼 무어라 끄적거리고 있으면, 마치 '나'라고 하는 정당하고 확고한 무언가가 일시적으로나마 뚜렷하게 존재하는 듯한 환상에 빠지게 된다. 써놓은 글쪼가리의 질과는 상관없이 그냥 그런 과정 속에서 단단한 자기존재감 같은 게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구축되고 인식되는 '나'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환상적이다. 마치 상상계의 아이가 거울을 보고 홀로 즐거워하는 것처럼 서글픈 촌극이다. 그러나 실은, 텍스트로서 존재하는 '나' 따위는, 그러니까 텍스트를 통한 자기확인이라는 것은, 애당초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 지극히 무의미한 유희라는 생각... 그것은 마치 신기루 같다. 무언가를 읽는 일이 나에게는 진리를 구하는 일도 앎에의 의지도 아니라 그저 도피하는 일인 것만 같다. 도피하여 혼자만의 신기루를 지어내는 일만 같다. 아무 것도 읽지 않고 아무 것도 적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나보다 훨씬 더 하루를 충직하고 유의미하게 보내는 내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혐의가 점점 더 뚜렷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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