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의 질서 - 개정판
미셀 푸코 지음, 이정우 옮김 / 중원문화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강연을 책으로 펴낸 것이라고. 푸코는 이 강연에서 자신이 어떤 메타철학적 밑그림 위에서 어떤 방법론에 기대어 책들을 써나가고 있는지 밝히고 있다. 강연의 전반부는 담론이 어떤 과정 속에서 생성되는가, 담론의 질서가 어떻게 구축되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담론 형성의 외부적인 과정들
(1)금지(금기, 터부, 억압): 예를 들어 성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이 보여주는 금기들. 금기는 그것을 둘러싼 욕구와 권력의 관계를 드러낸다.

(2)분할 및 배척(배제, 침묵): 예를 들어 이성과 광기의 분할. 
(3)진위대립(진리에의 의지): 담론의 내부가 아닌 다른 인식론적 층위에서 본다면 언제나 진리에의 의지를 지배하는 배제의 체계가 존재한다. 특정 사회, 특정 시대에 진리의 의지를 지배하는 배제의 체계는 자의적이고, 제도적이고, 폭력적이고, 구성적이고, 수정 가능하고, 강제적이다.

 

담론 형성의 내부적인 과정들(일단 외부적인 과정들을 거쳐서 걸러진 사물들은 이제 분류되고 정돈되고 분배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류되고 정돈되는가?)
(1)주석: 끊임없이 매일매일 계속해서 말해지는 것들.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하고, 그를 반복하고 또 변이시키는 주된 이야기들, 사람들이 일정한 상황들에 따라 말하는 담론들의 의례화된 집합들, 텍스트들, 언어 표현들”. '이야기'라는 실천들의 놀이. 말해지는 것들의 내용 자체는 사실 별 의미가 없다. “새로운 것은 말해진 것 안이 아니라 그의 재귀라는 사건 안에 존재한다.”
(2)저자의 원리: 어떤 일차적인 텍스트가 있고 그에 따라 갖가지 주석들이 증식하는 경우. 여기서 ‘저자’라는 것은 텍스트를 썼다는 뜻에서의 저자가 아니라, “담론의 분류의 원리로서, 그들의 의미 작용들의 통일성과 시원의 원리로서, 그들의 정합성의 핵으로서” 이해되는 저자.(예를 들어 성경이나 푸코 등을 저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학문의 영역에서 주로 저자의 원리가 적용되지만 어디서나 항상적으로 작용하는 원리는 아니다. 저자로서의 유효성이나 의미를 보유하지 않은 채 익명으로 돌아다니는 담론들도 존재한다.
(3)과목들(수학이나 물리학 등의 고도 과학과 일상적 담화 사이에 존재하는, 과학을 지향하고 있는 담론들. 일종의 지식. 앎의 층위. ex. 정신병리학, 식물학, 범죄심리학 등등): 한 명제가 하나의 과목에 속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유형의 이론적 지평 위에서 새겨질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하나의 명제가 한 과목에 속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복잡하고 무거운 조건들을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틀리다 또는 맞다고 말해질 수 있기 이전에 ‘맞는 것’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멘델은 진리를 말했지만, 그는 그의 시대의 생물학적인 담론의 '맞는 것 안에' 있지 않았다. 멘델이 맞는 것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인식론적 층위의 전적인 변화, 대상들의 전혀 새로운 평면의 전개가 필요했다. 결국, 우리가 진(眞)안에 있게 되는 것은 담론적 공안(police, 내치)의 규칙들에 복종할 때뿐이다.

 

이렇게 한 시대의 담론은, 금지와 분할과 배척의 과정을 통해, 진리에의 의지를 지배하는 특정한 분할의 유형에 의해, 한 저자의 다산성 속에서, 주석들의 다수성 속에서, 과목들의 전개 속에서 생성되고 구축된다.

 

주체의 희박화(차이성의 희박화?)
담론의 장 안에서 주체는 길러진다. 규칙을 습득하고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익히고, 그렇게 길러짐으로써 담론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고 구속된다. 여기서 푸코가 들고 있는 일화: 17세기에 일본의 쇼군은 유럽인들의 우월성이 수학 때문이라는 풍문을 듣고 영국 선원을 억류해서 그에게 수학을 배웠는데, 정작 수학이 일본 사회에 정착한 것은 19세기가 되어서였다. 영국 선원에게 수학이란 학문 기관에 들어가 따로 공부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그저 조선소에서 근무하면서 생활의 필요에 의해 저절로 익히게 된 실용 기술이었지만, 일본에서는 애초에 담론의 장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즉, 수학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담론이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아무리 영국 선원을 억류해서 일부러 번거롭게 배워본들 그 지식이 유통조차 되지 않는 것.

 

분할과 배제, 금지와 분배를 거쳐 형성된 담론의 질서 위에서 사법, 의료, 교육 등의 제도가 구축된다. 사법, 의료, 교육의 모든 체계들은 담론들이 점유하는 지식들, 권력들과 더불어 그들의 전유를 유지하고 수정하는 각각의 정치적인 수단이다. 사법, 의료, 교육 등의 체계를 통해 주체는 사회적 주체로서 만들어지고(희박화:특정 언표적 장 속에서의 주체의 자리잡음, 일군에 속한 개인으로 만들어지기), 말하는 주체의 자격을 얻게 되며, 특정 모습을 띤 주체로 고착화된다. 담론에 예속되는 주체.

 

초험적 주체들의 철학들
철학도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담론을 전유하고 강화하는 수단이다. 철학은 구체적으로 그 전개의 원리로서 내재적인 합리성을 제시하고, 진리 자체를 원하고, 사유의 힘을 통해서만 진리를 약속하는 인식의 윤리학을 갱신함으로써, 이러한 일련의 부단한 과정을 통해서 제한들과 배제들의 놀이에 응답한다.

 

철학적 주체는 기호와 문자들을 배열함으로써 이미 발견되어 있는 의미를 ‘재포착’해서 명제화시킨다. 이 과정은 담론의 심급을 거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담론의 현실성을 생략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렇게 철학적 인식과 경험들은 이미 말해지고 있었던 것들, 이미 취해진 담론을 가시화한다. "사실상 이 로고스는 이미 취해진 담론에 불과하다." 따라서 푸코는 다음의 세 가지 작업들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1)우리의 진리에의 의지를 문제 삼는 것: ‘진리에의 의지’가 배제의 다른 체계들처럼 제도적 토대 위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진리인가를 문제 삼을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것을 진리로 삼으려 하는지 그 의지를 문제 삼아야 한다.
(2)담론에 그의 사건적 특성을 복구시켜주는 것: 푸코는 기존에 통용되던 담론의 범주를 확장시킨다. 즉, 담론은 사건과 행위와 실천까지도 담지하는 어떤 것이다. 어떤 실천은 금지하고 배제시키면서 특정한 방식의 실천은 강제하는, 그런 실제적인 영향력, 힘, 실증적인 효과를 낳는 사건.
(3)시니피앙의 지고함을 제거하는 것: 담론을 단순히 라캉 식으로 ‘특정한 방식으로 대상을 분절하여 표상하게 해주는 표상체계’로 국한하는 게 아니라, 실천적 사건과 실증적인 효과까지 아우르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언어, 시니피앙의 지고성을 제거함으로써 푸코는 기호로 이루어진 고요한 표상 모델로부터 벗어나 전략, 투쟁, 세력 관계가 드러나는 역동적인 권력 모델로 나아간다.

 

고고학과 계보학
푸코는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분석들이 고고학과 계보학이라는 두 집합들에 따라 배열된다고 말한다. 이 두 작업들은 대상이나 영역의 차이에 따른 방법론이 아니라 관점의 차이에 따른 방법론이며, 이 두 작업을 완전하게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히려 각각의 방법이 상호 교환 가능하며 상보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1)고고학은 “그들이 어떤 요구들에 답하기 위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그들이[인식의 가능 조건들이, 담론들이] 어떻게 수정되고 위치 이동되는가, 그들이 결과적으로 어떤 제약들을 행하는가, 그들이 어느 정도로 전복되는가”를 분석한다. 인식의 가능 조건들의 구성과 배치의 변화. ex) 광기의 역사, 성의 역사, 지식의 역사, 임상의학의 역사
(2)계보학은 담론의 현실적인 형성을 다룬다. “담론의 계열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들 각자의 특이한 규범은 무엇이었으며, 그들의 출현, 성장, 변이의 조건들은 무엇이었는가”를 분석한다. ex) 감시와 처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셸 푸코의 휴머니즘 - 진정한 휴머니즘을 향한 푸코의 사유와 실천의 여정 철학 스케치 2
디디에 오타비아니 지음, 심세광 옮김, 이자벨 브와노 삽화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푸코의 정신을 계승한 것 같은 삽화 스타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유명사들의 공동체 - 김정환 예술 산문집
김정환 지음 / 삼인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거침없이 술술, 때로는 아슬아슬, 날아오를 것 같은 일필휘지의 문장들. 글을 이렇게 자유롭게 쓸 수도 있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스 로마 철학사
F. C. 코플스턴 지음, 김보현 옮김 / 철학과현실사 / 1998년 11월
평점 :
절판


헤라클레이토스는 흔히 '만물은 유전한다'는 명제로 알려져 있지만, 이 책의 저자인 코플스톤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에 대한 주장은 그의 철학의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측면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책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양성이나 변화'에 대해 말했다기보다, '다양성과 변화 속에서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하는 단일성'에 대해서 말했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이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의 본질로 '불'을 꼽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불'은 탈레스의 '물'이나 아낙시메네스의 '공기'와는 다른 차원의 의미를 갖는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있어서 불은 만물의 본질을 이루는 '물질적 원소'가 아니라,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는 하나의 '상징적 이미지'였다. 불이 이질적인 물체를 태우고 그것을 그 자신으로 변형시킴으로써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듯이, 유전하는 세계 역시 존재자들의 끊임없는 갈등과 긴장을 '연료'로 삼아 지속된다고 본 것이다. 그의 '불'은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정도에 따라 타올랐다가 정도에 따라 소멸하는[잦아드는] 영원히 살아있는 불"이다.

 

갈등과 긴장에 대해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는 전쟁이 만인에 공통이며, 투쟁이 정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만물은 투쟁을 통하여 생성되고 소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 시대의 호전적 분위기를 감안하여 생각해 보면, 그는 대립과 긴장, 갈등을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유전하는 세계의 지속을 가능케 하는 다양성으로서, '한데 어우러짐'으로서 보았던 것 같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있어서 만물의 대립과 갈등은 일자의 존재에 필수적이며, 대립하는 만물은 또한 상호 불가분성을 갖는다. 마치 사물이 극단에 이르면 반드시 반대로 돌아온다는 주역의 가르침처럼 그도 "선과 악은 하나"라고 말하고, "상향의 길과 하향의 길은 같다"고 말한다. 일자 속에서 모든 차이와 긴장들은 이렇게 불가분의 관계로서 역동적인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문화비평은 계몽을 재계몽하는 전략이다. (...) 문화비평은 계몽 이후 그 계몽의 물화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 실증적 논박에만 익숙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공론장에서 울퉁불퉁하게 불경한 상상력을 삽입하는 사유들은 저널리즘적 사유로 계몽되어 있는 독자들을 재계몽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재계몽의 작업은 (...) 섬광 같은 "충격의 사유"를 조장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p.19~20

 

그렇다면 그래, 이것은 문화비평이다. 저돌적인 제목이 전혀 무색하지 않다. 날 선 지성은 나 같은 이에게도 당대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주는구나! 이 책에서 저자는 '정치적인 것을 관리하고 배제하기 위해 발명된 공동체적 도덕성의 구현물'로서의 대중문화를 읽어내고, 그 읽기에서 일상에 파묻혀 있는 정치적 사유의 계기들을 찾아낸다. 저자의 진단에 따르면, 근대세계의 가치체계 내면화가 이제 막 진행되고 있는 단계인, 즉 ‘형식’이 아닌 ‘내용’에 있어서 근대국가로의 도약의 와중에 있는 한국사회의 풍경은, 탈정치적 보수주의, 쾌락의 평등주의(실제로는 불평등의 구조를 용인하는), 탈권위주의(실제로는 일상의 권위주의를 용인하는), 계급 적대와 이를 무마하는 민족주의 판타지, 가족주의 이데올로기, 자본주의라는 상징질서를 준수함으로서 유지되는 ‘먹고사니즘’이라는 쾌락원칙, 반지성주의 등등의 핵심어로 요약될 수 있겠다.

 

드라마 소재인 불륜을 정치적 맥락으로 옮겨 자본주의 너머의 체제에 대한 타나토스적 열망으로 읽어낸다든가, 온갖 '희대의 살인마 사건'이 보여주는 이면의 욕망(절대악에 분노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차선의 악에 물들어 있는 우리 자신을 용서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우리가 주기적으로 호명해 내는 서사적 판타지라고)을 꼬집어 내거나, 계급 적대를 봉합하기 위한 민족주의 판타지의 연장선상에 '신성한 가족 판타지'가 놓여있음을 명시하면서 신성 가족 판타지에 근거한 일련의 사회적 사건들이 역설적이게도 민족의 이름으로도 통합될 수 없는 계급갈등의 지점을 가시적으로 지시하고 있다는 지적, 낸시 랭의 존재론적 역설을 얘기하는 대목 등 신선하고 명쾌한 통찰에 빠심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혹시 '나꼼수'에 대한 멘트도 있지 않을까 하고 뒤늦게 저자의 블로그에 찾아가 봤다가, 윽, 완전 할퀴어 놓은 글을 읽었다. 내가 그 글에서 갑자기 또 하나의 새로운 '모두까기 인형'의 출현을 예감했다고 한다면, '향락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대중'의 알러지 반응 쯤이 되려나. 하지만 나는 나꼼수에 대한 그의 태도가 더 근엄 ‘쩌는’ 알러지 반응 같은데... 비평은 본디 엄정해야 할 테지만, 엄정함이 지나치면 통쾌함을 넘어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다. 날카로운 지성은 '무학의 통찰'이 건네는 질펀한 유머를 받아칠 수 있을 정도로만, 딱 그만큼만 좀 더 여유로워질 수는 없는 걸까. 그럼에도 어쨌든, <이것이 문화비평이다>라고 하신다면 이의가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