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철학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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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식과 신체를 살펴보자. 의식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항상 노예적임. 무리 속에서 발달하는, 근본적으로 무리본성에 다름 아님. “의식은 어떤 전체가 어떤 우월한 전체에 종속되길 원할 때만 습관적으로 나타난다. (...) 의식은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어떤 존재와 관련해서 탄생한다.” 예를 들어 운전을 배우는 운전자의 경우라든지 직장에 막 취직한 신참의 경우. 의식보다 항상 더 놀랍고 우월하고 심오한 것이 바로 신체다. (여기서 신체란 정치적 연합체일 수도, 사회적, 생물학적, 종교적 연합체일 수 있다. 담론의 연합체일 수도 있고.) “신체의 모든 현상은 (...) 지적인 관점에서의 우리 의식보다, 우리 정신보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의욕하는 의식적인 방식보다 우월하다.”

 

이러한 신체는 다수의 힘들이 투쟁하는 장(場)이다. 신체 속에서 신체를 구성하는 힘들은 맞닿은 다른 힘들과 우연적인 관계를 맺으며 복종하기도 하고 명령하기도 한다. 신체를 정의하는 것은 지배하는 힘들과 지배받는 힘들 간의 관계이다. 모든 힘은 관계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어떤 것이다. 또한 신체는 환원될 수 없는 다수의 힘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다수적 현상이다. 하나의 신체 속에서 우월하거나 지배하는 힘들은 소위 적극적이고, 열등하거나 지배받는 힘들은 소위 반응적이다.

 

2 복종하는 열등한 힘들은 명령하는 힘들과 구분되지만, 계속해서 힘으로 존재한다. 복종하는 것은 힘 그 자체의 성질이고, 명령하는 것만큼이나 권력에 관계한다. 어떤 힘도 자신의 고유한 권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열등한 힘들은 주로 삶의 조건들을 보존하거나, 삶의 조건들에 적응하거나, 실리를 위해서나, 또 그 외의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그 힘을 작동시킨다. 반면, 명령하는 우월한 힘, 적극적인 힘은, 사실은 이에 대한 진술 자체가 앞서 설명한 열등한 힘들의 경우보다 더 어렵다. 왜냐면 이렇게 진술하는 인간의 의식 자체가 반응적인데 적극적인 힘은 본성상 이미 의식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명을 하자면, 소유하고 탈취하고 좌지우지하며 지배하는 것이야말로 적극적인 힘들의 특징이다. 소유하는 것은 형태를 강요하는 것, 결과들을 활용해서 형태를 창조하는 것.

 

니체는 다윈을 비판하고 라마르크를 지지한다. 다윈은 변화된 환경에 적응을 잘 한 놈들이 생존경쟁에서 이겨 살아남았단 식으로 말하는데 여기서 그려지고 있는 개체는 완전히 수동적이고 반응적이다. 생물체를 그저 반응적인 힘의 담지자로만 그리고 있다. 반면에 라마르크는 용불용성을 주장하는데 이러한 이론은 다윈과 다르게 개체가 가진 조형의 힘, 변신의 힘,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목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니체가 보기에 생명체의 분화과정이라는 것은 환경에의 순응의 결과가 아니라 차이를 낳는 잠재성의 영역이 창조적으로 분화해간 결과이다. 유기체에게 새로운 기관이 생성되는 현상 또한 유기체 내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투쟁과 특정 부분의 승리 그리고 다른 부분의 위축의 결과인 것이다.

 

3 힘들은 양적이고, 양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물리학이 하듯이 그렇게 순수하게 양적인 규정은 추상적이고 불완전하고 모호하다. 양과 함께 질 또한 하나의 척도로서 고려되어야 한다. 양적인 차이는 질적 차이를 수반한다. 가령 6N과 2N은 양적으로도 다르지만, 질적으로도 다르다. 그리고 질은 양으로 환원될 수도 없다. 2N을 세 배 마련한다고 해서 그 질이 6N과 똑같아지는 게 아니다. 양과 질의 환원불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추상적으로 힘들을 셈할 수 없고, 어떤 현상이나 사건 또는 어떤 신체의 경우 속에서 그것들 각각의 성질과 그 성질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평가해야만 한다.

 

4 앞서 힘들이 양으로 환원 불가능하고 성질이 다양하게 존재하며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고 했던 바, 힘에 대해서 수치화하고 추상화하고 힘을 균등화, 균일화하여 다루는 과학은 힘의 참된 이론을 결여하고 있으며 심지어 힘의 이론을 위태롭게 한다. 비단 물리학뿐만 아니라, 니체는 인간의 의식, 정신, 철학, 심리학, 생물학을 비롯한 근대 학문, 근대문명, 민주주의, 사회주의, 실증주의, 인본주의, 변증법주의, 이 모든 것들을 모두 노예적이고 반응적인 힘들의 승리라고 싸잡아 비난한다.

 

5 니체는 태초에 신이 세계를 창조했고 종말이 있으며 구원이 있고 천국이 있다고 얘기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리켜 삶을 부정하는 금욕적이고 허무주의적이고 노예적인 발상으로 치부한다. 그런 니체가 상정하는 세계상이 영원회귀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좋을 듯하다. 또는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하는 반원의 끊임없는 회전운동, 그리고 그런 반복운동 속에서 비로소 입체적으로 현상하는 구의 이미지라든지. 그와 같이 니체는 이 세계를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목적도 없고 최종 도달점도 없는, 그저 끊임없는 변화를 낳는 영원한 생성 속에서 매순간 현상하는 어떤 것으로 본다. 영원회귀는 정태적인 게 아니다. 늘 생성 중에 있다. 지속되는 생성. 이것이 곧 존재다.

 

6 권력의지란 무엇인가. 권력의지는 힘과 분리될 수 없는, 힘에 결부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힘의 보완이며 동시에 힘에 내적인 것으로서 주어진 어떤 것이다. 힘이 생성되는 데 전제가 되는 내적 요소. 힘의 성질을 결정하는 내적 의욕. 힘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권력의지는 ‘원하는 것’이다. (크기와 방향을 동시에 갖는 물리적 단위인 벡터에서 ‘힘’이 벡터의 크기를 말한다면, ‘권력의지’는 벡터의 방향에 해당. 최초의 작용점. 마치 채찍을 휘두를 때의 그 손목스냅과도 같은.) 권력의지는 미분적인 동시에 발생적인 힘의 계보학적 요소이다. 정확히 말하면 권력의지는 힘의 계보학적 요소일 뿐만 아니라 힘‘들’의 계보학적 요소이다. 권력의지에 의해서 어떤 하나의 힘이 다른 힘들보다 우세하게 되고, 다른 힘들을 지배하거나, 다른 힘들에게 명령한다. 그리고 또 다른 어떤 힘은 그러한 관계 속에서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된다. 이 모든 힘들의 역학의 배후에 권력의지가 있는 것. 권력의지야말로 힘의 생산 요소이고 힘의 생성적 요소이다.

 

7-1 권력의지는 우연을 함축한다. 우연 없이는 힘들이 어떤 조형성도 갖지 못하며, 변화도 꾀할 수 없다. 우연은 힘을 관계 짓는다. 권력의지는 필연적으로 힘들에 부가되지만 우연에 의해서 관계 맺어지는 힘들에만 부가된다.

 

7-2 계보학적 요소로서의 권력의지로부터 관계 속에 있는 힘들의 양적 차이와 동시에 그 힘들 각각의 성질이 파생한다. 그것들의 양적 차이에 의해서 힘들은 소위 지배적이고 지배받는다. 그것들의 성질에 의해서 힘들은 소위 적극적이고 반응적이다. 적극적이거나 지배하는 힘들 속에서처럼, 반응적이거나 지배받는 힘들 속에도 권력의지가 있다. 그러니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해석한다는 것은 그러한 가시적인 총체를 만들어내는 힘들의 성질을 평가하고 힘들의 관계를 측정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극도로 예민한 지각이 요구된다.

 

7-3 긍정적임과 부정적임은 권력의지의 원초적 성질을 가리킨다. 행동하기, 반응하기가 힘을 표현하듯이, 긍정하기, 부인하기, 극찬하기, 비하하기는 권력의지를 표현한다. 어떤 건 좋고, 어떤 건 나쁘고, 어떤 것은 칭찬하고, 어떤 것은 비난하는 등 권력의지 자체가 하나의 가치평가를 수행하고 있는 것. 현상을 해석하는 것 또한 권력의지의 발현이다. 그러니 어떤 해석도 객관적일 수 없다. 해석 자체가 좋고 나쁨을 정하는 권력의지의 관철이기 때문에.

 

7-4 이 모든 이유 때문에 권력의지는 해석하는 것뿐만 아니라 평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계보학적 요소로서의 권력의지는 의미의 의미화와 가치들의 가치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착하게 여기는 행동들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왜 이 행동을 착하다고 가치 매기고 있는가. 착하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어떤 행동을 착하다고 가치 매기는, 의미부여하는, 우리의 그러한 행위가 어떤 힘들에 의해서 산출되었는지를 해부해 보면, 즉 가치들의 가치를 해부하면, 그 행위를 착하도록 여기게 만드는 하나의 권력의지가 있다.)

 

8 “기원의 전복된 이미지가 기원에 동반된다.” 즉 현상의 기원을 추적할 때는 항상 이미지의 전복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적극적인 힘들의 관점에서 긍정인 것이 반응적 힘의 관점에서는 부정이 되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힘들은 본디 귀족적이지만 반응적 힘들에 의해 반영된 그들의 모습은 평민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원래 차이를 기원에서부터 부인하고 일그러진 이미지를 제공하면서 전복된 사상으로 전염을 시켜서 기력을 소진시키는 것이야말로 반응적 힘들의 속성이자 전략이기 때문에, 어떤 사태, 신체, 사건, 현상이 반응적인 힘에 전적으로 점령당했을 경우 우리는 더더욱 이러한 이미지의 전복, 가치전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진화’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이 실제로는 ‘퇴락’일 수 있는 것이다.

 

반응적인 힘들은 적극적인 힘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키고 분해한다. 그것들은 적극적 힘으로부터 그것의 능력의 일부 혹은 거의 전부를 박탈해버린다. 쇠잔하게 만들어 버린다. 말하자면 에너지 흡혈귀다. 따라서 반응적인 힘들 자체가 적극적으로 되지는 않지만, 적극적인 힘이 반응적인 힘을 만나면 적극적인 힘 자체가 새로운 의미에서 반응적으로 되는 일이 생겨난다. 새로운 반응적 생성이 일어남. 이렇게 반응적인 힘들은 우월한 힘을 구성하면서 승리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인 힘을 ‘분리시키면서’ 승리한다.

 

매 경우에 있어 그 ‘분리’는 어떤 허구, 신비화, 혹은 왜곡에 근거한다. (천국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든지 현세를 지옥으로 왜곡한다든지) 그리고 여기서 허무주의, 즉 ‘무의 의지’가 그러한 부정적이고 전복된 이미지를 발전시킨다. 적극적인 힘을 함정 속으로 유인하는 무의 의지. 결국 적극적인 힘은 허구에 의해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되고, 실제로 반응적으로 된다.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된 힘의 상태도 반응적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 스스로를 제한시키는 상태야말로 반응적이다. 반면 자신의 능력 끝까지 갈 수 있는 모든 힘은 적극적이다.)

 

9 열등한 힘들은 여전히 열등한 채로, 반응적인 채로, 노예이길 그만두지 않은 채로, 승리할 수가 있다. 열등한 힘들이 승리하고 장악하고 지배적이게 되고 그럴 수가 있다. 그럴 수가 있는 게 아니라, 대체로 그런 경우가 많다. 소크라테스 이래로 인간 정신의 역사, 문명의 역사, 사회 체제의 역사 모두 열등한 것들의 승리가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하는 힘이 열등한지, 우월한지, 반응적인지, 적극적인지, 그것들이 지배받는 것인 한에서 승리하는지, 지배하는 것인 한에서 승리하는지를 판단해야만 한다. 그 영역 속에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해석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해석은, 현존하는 사회질서에 얽매이지 않은, 사회질서를 초월한 관점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가령 자신의 능력 끝까지 갈 수 있는 모든 힘은 적극적인데, 힘이 끝까지 가는 것은 법이 아니라 오히려 법의 반대이기조차 한 것이다.

 

10 자유로운 사유자들(실증주의자들)은 정작 실증적인 내용의 본성에 관해서, 상응하는 인간적 힘들의 기원이나 성질에 관해서는 전혀 탐구하지 않는다. 힘들의 성질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대세를 장악한 반응적인 힘들에 봉사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삼고 그것들의 승리를 표현할 뿐이다. 그러나 애당초 사실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해석에는 우월한 것과 저열한 것, 즉 서열만이 존재할 뿐이다.

 

11 앞서 권력의지가 어떤 건 좋고, 어떤 건 나쁘고, 어떤 것은 칭찬하고, 어떤 것은 비난하는 등 하나의 가치평가를 수행하고 있다고 했는데, 좋고 나쁨의 판별이라는 것은 한편으로 권력의지가 감수성, 감성, 기분, 감각의 문제라는 것도 뜻한다.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쁜 ‘원시적 정서 상태’, 모든 다른 감정들을 파생하는 원시적 정서상태, 이것이 곧 권력의지인 것. 힘의 감성, 힘의 미분적 감성으로서의 권력의지.

 

12 원한, 가책, 허무주의는 심리적 특징들이 아니라, 인간 속의 인간성의 토대와 같다. 그것들은 인간 존재 그 자체의 원리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노예적 속성을 띠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회귀조차도 특유의 반응적 힘의 관점에서 허무주의적인 사유로 만들어버린다. 반응적인 인간의 관점을 통해 인식되는 영원회귀는 역겹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영원회귀의 사유 역시 인간의 눈에는 전복된 이미지 속에 놓여있는 것이다.

 

13 의미와 가치들은 양면성을 갖는다. 가령 질병은 나를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키지만, 동시에 내게 새로운 능력을 부여한다. 팔을 다쳐서 팔을 쓸 수 없게 되면, 팔 대신 발을 자유자재로 쓰는 새로운 능력을 계발하게 된다. 즉 반응적인 힘은 우리를 우리의 권력에서 분리시키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또 다른 권력을 준다. 새로운 감정들을 가져다주고, 영향 받는 새로운 방식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니체가 소크라테스, 예수, 유태교와 기독교, 퇴락 혹은 퇴행의 형태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우리는 각각의 경우에서 그와 같은 양면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의미와 가치들의 양면성이 어떠하건 우리는 반응적인 힘이 그것이 할 수 있는 바의 끝까지 가면서 적극적으로 된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반응적 힘은 어디까지나 무의 의지와의 관계 속에서만 전개된다.

 

14 반응적 인간의 가치평가에 감염된 차라투스트라는 처음에 영원회귀를 혐오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내 ‘회복기 환자’, ‘위안받은 자’로 변신해 혐오를 극복하고 영원회귀를 긍정하게 된다. 그러한 드라마틱한 인식의 전환은 ‘선택적인 원리’로서 영원회귀를 사유함으로서 이루어진다. 어떤 의미에서 영원회귀가 선택적이라는 것인가? 먼저 영원회귀는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 입법에 타당하도록 행위하라’는 칸트의 윤리강령 만큼이나 엄격한 규칙을 제공한다. 바로 “네가 의욕하는 것, 그것을 네가 영원회귀를 의욕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원하라!” 딱 한 번만 하고 싶은 것이어도 안 된다. 약간만 하고 싶은 것이어도 안 된다. 영원히 또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을, 또 하고 또 해도 다시 또 원하게 되는 바로 그런 것을 원하라. 전적으로 원하라. 이것이 영원회귀의 사유가 부가하는 윤리 준칙이다.

 

영원회귀가 선택적인 원리라고 하는 데에는 또 하나의 다른 의미가 있다. 처음에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를 역겹게 느꼈던 이유는 그것을 허무주의의 극단적 형태로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무주의가 정말로 극단으로 치달으면 그것의 최종점은 자기소멸이다. 허무주의의 진정한 극단적 형태는 영원회귀가 아니라 자멸이다. 자멸이야말로 반응적 힘들이 적극적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무의 의지의 최종형태는 자멸인 바, 영원회귀의 운동 속에서 결국 반응적인 힘은 지속되지 못한다. 영원회귀의 원리 속에서는 긍정만이 살아남는다. 반응적인 힘들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마치 원심분리기가 그렇게 하듯이 영원회귀의 운동 원리 자체가 반응적인 힘들을 끊임없이 원 밖으로 날려버린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영원회귀라는 운동 자체가 존립할 수 있기 때문에. 영원회귀는 타오르는 불과 같은 끝없는 생성인데, 무의 의지가 장악한 영원회귀라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인 것. 운동 원리상으로 모순인 것.

 

15 영원회귀의 원리 속에서 반응적인 힘들은 지속되지 못한다. 결국 영원회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영원회귀는 생성의 보편적 존재이지만, 생성의 보편적 존재는 단 하나의 생성만을 뜻한다고. 바로 '적극적 생성'만이 전생성의 존재인 하나의 존재를 갖는다고. 사람들이 생성의 보편적 존재로서 영원회귀를 긍정하고, 거기에 더해서 '보편적 영원회귀의 산물'로서 '적극적 생성'을 긍정하는 한, 긍정은 점점 더 심오해진다. 선택적 존재론으로서의 영원회귀는 그 생성의 존재를 적극적 생성에 의해서 <자신을 긍정함>으로서 긍정한다. 이것이야말로 긍정의 긍정, 이중의 긍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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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 : 바이올린 소나타 Op.1 - 이 한 장의 명반
헨델 (George Friderich Handel) 작곡, 그뤼미오 (Arthur Grum / 유니버설(Universal)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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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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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ko Terashita - Romance
테라시타 (Mariko Terashita) 연주 / 론뮤직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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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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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 까치글방 138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 / 까치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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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의 설명

1절 존재에 대한 물음을 분명히 다시 제기해야 할 필연성
존재에 대한 물음은 오늘날 망각 속에 묻혀버렸다. (1)존재라는 개념이 너무나 보편적이고 공허하다는 편견 때문에. (2)정의가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3)정의를 필요로 하지도 않을 만큼 자명한 개념이라고 여기는 편견 때문에. 과연 그런가? 이러한 선입견에 대해 논의해보자.

 

(1)존재란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긴 하다. 그러나 존재는 모든 유(類)를 포괄하는 의미에서의 그러한 유가 아니다. 존재의 보편성은 모든 유적 형태의 보편성을 넘어선다. 존재는 중세 존재론의 관점으로 보자면 ‘초월자’이다. 존재는 초월적 보편의 단일성, 유비의 단일성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가 존재 개념을 명확히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존재는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 개념이 가장 명확한 개념이고 더 이상의 어떠한 논의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라는 개념은 오히려 가장 어두운 개념이다.

 

(2)존재라는 개념이 정의될 수 없기는 하다. 존재에는 어떤 다른 본성이 덧붙어질 수 없다. 존재는 거기에 존재자가 서술되는 식으로는 규정될 수 없다. 존재는 정의상 더 고차의 개념들로부터 도출될 수도 없고 하위의 개념들에 의해서 서술될 수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귀결될 수 있는 것은 단지 ‘존재는 존재자와 같은 그런 어떤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 뿐이다. 존재의 정의불가능성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던지지 않아도 된다고 면제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물음을 던질 것을 촉구하고 있다.

 

(3)존재는 자명한 개념이지만, 존재가 눈앞에 있기에 자명하다는 그런 평균적인 이해가능성은 단지 몰이해성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존재자들끼리 맺는 모든 행동관계와 존재 그 자체 사이에 선험적으로 하나의 수수께끼가 놓여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우리는 각기 이미 하나의 존재이해 속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존재의 의미는 어두움에 싸여있다는 이 사실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다시 제기해야 할 근본적인 필연성을 입증한다.

 

이상의 고찰은 존재에 대한 물음에는 대답만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그 물음 자체가 어둡고 갈피를 못 찾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기 전에 우선 물음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지 충분히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2절 존재에 대한 물음의 형식적 구조
존재물음은 세 가지 구조계기를 갖는다. (1)물음의 대상이 되는 것=존재. (2)궁극적으로 밝혀져야 할 것=존재의 의미. (3)물음이 걸리는 것=우리 인간인 현존재(물음이 여러 존재자들 중 특별히 우리 현존재에게 걸리는 이유는 4절에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2)존재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3)우리 자신 현존재에게 (1)존재에 대하여 물을 때, 이러한 물음은 이미 우리가 선험적으로 갖고 있는 어떤 존재이해에 입각해서 행해진다. 완벽한 백지상태라면 물음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가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히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존재가 무엇인지 묻고 있을 때, 이미 우리는 “이다(있다)”에 대한 이해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 “이다(있다)”가 무엇을 뜻하는지 개념적으로 확정할 수 없으면서도 말이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분명하고 투명하게 제기하기 위해서는 존재이해를 갖는 존재자인 현존재의 존재구조를 구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분석을 실마리로 하여 존재의 의미를 묻는 것은 일종의 순환논법이 아닐까. 현존재의 존재도 하나의 ‘존재’인 이상, 현존재의 존재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미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 선정한 실마리인 현존재 역시 존재를 전제로 해야만 탐구 가능한 그런 것이 아닌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존재’는 분명히 지금까지의 그 모든 존재론에서 ‘전제되었다’. 그렇지만 정확한 개념으로서가 아니다. 즉 찾고 있는 그것으로서가 아니다. 존재를 ‘전제함’은 존재에 대한 앞선 관점취득의 성격을 띤다. 잠정적인 선이해, 막연한 선이해. 이러한 이해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존재물음은 막연한 이해를 투명하게 하고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뿐 어떤 명확하게 확정된 원칙에서 연역적으로 논증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

 

3절 존재물음의 존재론적 우위
역사, 자연, 공간, 삶, 현존재, 언어 등 다양한 사태분야들은 저마다 하나의 학문적 대상으로서 그에 상응하는 학문적 탐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탐구의 진보는 사태에 대해 실증적으로 탐구하고 그에 따라 증대되는 지식과 확장되는 범주체계로부터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각 사태분야의 근본 구조에 대한 물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근본개념들은 각각의 학문 분야를 구체적으로 열어 밝히는 실마리이자 모든 실증적인 탐구를 주도하는 규정들로서, 각각의 학문이 주제로 삼는 대상의 밑바탕에 놓여있는 사태영역 자체를 선행적으로 철저히 탐구할 때에만 증명될 수 있다. 근본개념들을 길어내는 선행적인 탐구란 각 사태영역의 존재 구조에 대해 분석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역존재론’적 물음은 존재 일반의 의미가 제대로 규명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소박하고 불투명한 것으로 끝나고 만다. 각각의 존재영역이 갖는 고유성을 사태 자체에 입각하여 드러내려고 하면서 그것들 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존재영역들 간의 관계를 밝히는 계보학이 필요한 까닭이다. 존재물음은, 이미 하나의 존재이해 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각 학문들의 선험적 가능조건뿐만 아니라, 개별 학문들 존재자에 선행하면서 그것들에 기초를 부여하는 영역존재론들 자체의 가능조건까지도 명확히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점에서 존재물음은 실증적인 학문들이나 영역존재론에 대해서 우위를 갖는다. 

 

4절 존재물음의 존재적 우위
현존재는 어떠한 방식과 명확성에서건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있다. 이 존재자에게 고유한 점은 자신의 존재와 더불어 자신의 존재에 의해서 그 자신에게 그의 존재가 열어 밝혀져 있다는 사실이다. 존재이해는 그 자체가 곧 현존재를 규정하는 성질 중 하나이다. 현존재의 존재적인 뛰어남은 ‘현존재가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는 데 있다. ‘존재론적으로-존재한다’는 말은 아직 명확한 존재론을 형성한 건 아니지만 존재론의 맹아랄 만한 어떤 것을 갖고 있다는 얘기. 단순히 ‘존재적으로-존재하는’ 정도는 넘어선, 그 이상의 어떤 이해를 갖고 있다는 뜻.

 

현존재가 다른 존재자들과 갖가지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 이미 관계를 맺고 있는 그러한 존재 방식 자체를 우리는 실존이라 말한다. 현존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그의 실존에서부터, 즉 그 자신으로 존재하거나 그 자신이 아닌 것으로 존재하거나 할 수 있는 그 자신의 한 가능성에서부터 이해한다. 현존재는 이러한 가능성들을 그 스스로 선택했든가, 아니면 그 가능성들 안으로 빠져들게 되었든가, 아니면 각기 이미 그 안에서 성장해왔다. 이렇게 주도적인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우리는 ‘실존적 이해’라고 한다.

 

(‘실존적 이해’와 구분하여 생각해야 할 것이 ‘실존론적 이해’다. ‘실존론적 이해’는 실존의 존재론적인 구조에 대한 이론적 통찰이다. 인간존재가 갖는 존재론적인 구조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작업. 각자적인 실존을 구성하는 근본구조들에 대한 분석.)

 

실존적 이해를 갖는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이다. 즉 현존재에 속하는 존재이해는 세계와 세계 내부의 존재자들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들을 주제로 하는 모든 영역존재론은 존재이해를 갖는 존재자인 현존재 자신의 존재적 구조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영역존재론을 기초 짓는 기초존재론은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5절 현존재의 존재론적 분석론은 존재 일반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한 지평을 파헤쳐 드러냄이다
시간성은 현존재의 존재 의미를 탐구하기 위한 지반이다. 현존재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지평으로서의 시간. 시간이야말로 모든 존재이해 및 모든 존재해석의 지평으로서 밝혀져야 하며 진정으로 그 개념이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 현존재의 존재의미인 시간성은 통속적 시간 이해(=‘지금’이라는 시점들의 연속으로서의 시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시간이 ‘지금이라는 시점들의 연속’이 아니라면, 현존재의 존재의미로서의 시간이란 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가? 무엇을 뜻하는가?)

 

6절 존재론의 역사를 해체해야 하는 과제
시간성은 현존재 자신의 시간적 존재양식인 역사성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역사성을 갖는 현존재는 과거로부터 전승되어온 현존재 해석 속에서 성장한다. 대부분의 경우 현존재는 전승된 현존재 해석에 의거해서 자신을 이해하며, 이러한 이해는 현존재의 존재가능성을 개시하고 규제한다. 따라서 현존재의 과거는 현존재의 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를 앞서서 인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존재가 역사성에 의해서 규정된다면, ‘존재물음’ 그 자체도 역사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존재물음 이전에 존재물음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선행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의 근거에 있어서 역사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 현존재는 자각적으로 전통을 발견하면서 그것과 대결하기도 하는데, 앞으로 내가 서술하려는 존재물음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고찰 역시 그러한 의도로 수행하는 것이다. (이후로 칸트, 데카르트, 고대 그리스 철학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존재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서 존재론의 역사를 소급적으로 해체해 나가는 내용이 이어진다.)

 

7절 탐구의 현상학적 방법
현상학은 존재물음을 수행하는 방법론이다. 현상학의 몇 가지 예비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현상’이란 스스로를 그 자신에 입각해서 드러내는 것이다. 어떤 것이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을 경우에만, 즉 현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경우에만 그것은 그 자신이 아닌 어떤 것으로서, 즉 ‘가상’으로서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다. 이때 가상이란 현상의 결여적 변양이라고 할 수 있다. 사태 그 자체를 드러내는 현상이 있고, 현상의 결여적 변양으로서 가상이 있다면, ‘나타남’은 현상이나 가상과는 또 다른 종류의 개념이다. 나타남이란 징후, 상징, 지시, 알림이다. 드러나지 않는 것, 은닉되어 있는 것, 본질적으로 결코 드러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방사되어 나오는, 끄집어져 나오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나타남 역시 가상과 마찬가지로 현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현상, 가상, 나타남과 더불어 검토해 봐야 할 것으로 ‘로고스’가 있다. 로고스란 말을 통한 드러남이다. 음성으로 발설함으로서 밝혀지는 어떤 것. 어떤 것을 지시하면서 비로소 보이게 되는 그 무엇, 언어로서 발견되는 그 무엇. 로고스는 드러냄이기 때문에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

 

현상학의 기초개념들이 위와 같다면, 현상학이 보이게 해주어야 할 그것은 무엇인가? '현상'이라고 지칭되어야 할 그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 본질상 필연적으로 명시적 제시의 주제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내보이지 않고 있는 것, 자기 자신을 내보이고 있는 그것에 비추어볼 때 은폐되어 있는 것, 그럼에도 동시에 자기 자신을 내보이고 있는 그것에 본질적으로 속하여 있는 것이다. 은폐된 채 남아있거나, 전에 한 번 발견되었으나 다시 은닉 속에 빠져버렸거나, 위장되어서만 자신을 내보이는 그것은 이 존재자 또는 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이다. 존재자의 존재는 아주 심하게 은닉되어 그것이 망각되고 그것 또는 그것의 의미에 대한 물음조차 제기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바로 이것이 현상학이 손아귀에 넣어야 할 학문적 대상이다.    

 

현상학은 존재론의 주제가 되어야 할 그것(존재)으로 나가는 접근양식이며 그것을 증명하며 규정하는 양식이다. 존재론은 오직 현상학으로서만 가능하다. 존재론이 철학의 대상을 가리키는 용어라면, 현상학은 철학의 방법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8절 논구의 개요

존재의 기본개념을 획득하고 그 기본개념에 의해 요구되는 존재론적 개념성 및 이 개념성의 필연적 변양들을 소묘하기 위해서는 어떤 구체적인 실마리가 필요하다. 현존재라는 특정한 존재자에 대한 해석을 발판으로 하여 존재 개념으로 전진해 나가는 탐구의 특수성은 존재 개념의 보편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도리어 존재의 이해와 해석을 위한 지평은 현존재에게서 획득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존재는 그 자체로 시간성을 가지며 역사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 존재자를 존재론적으로 철저하게 조명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역사적인 해석이 된다. 따라서 존재물음의 수행은 먼저 현존재를 시간성을 겨냥해서 해석하고 시간을 존재에 대한 물음의 초월론적 지평으로서 제시하는 1부, 그리고 존재론의 역사를 현상학적으로 해체하는 2부로 나뉜다. 2부에서는 6절에서 간단히 살폈던 칸트와 데카르트 아리스토텔레스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제1부 현존재를 시간성으로 해석하고 시간을 존재에 대한 물음의 초월론적 지평으로 설명함
제1편 현존재에 대한 예비적 기초분석

제1장(9절~11절)의 주요내용: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은 유사한 여느 다른 분석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어떤 점이 무엇 때문에 구별되는가?
제2장(12~13절)의 주요내용: 현존재의 기초적 구조는 ‘세계-내-존재’이다. ‘세계-내-존재’란 무엇인가?
제3장~제5장(14절~38절)의 주요내용: 2장에서 더 심화되는 논의 전개.
제6장(39~44절)의 주요내용: 현존재의 실존론적 의미는 ‘염려’이다.

 

9절 현존재분석론의 주제(앞으로 내 생각은 []로 묶어 구분)
현존재분석론의 주제는 당연히 현존재, 즉 나 자신이다.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있다. 현존재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그 존재는 각기 나의 존재다. 현존재마다 그의 고유한 존재가 그에게는 떠맡겨져 있다. 현존재에게 떠맡겨져있는 그의 고유한 존재, 이것을 실존이라 지칭한다. 현존재가 관계 맺고 있는 자기의 존재는 곧 실존이고, 실존이 바로 현존재의 본질이다. 실존이라는 말은 현존재한테만 쓴다. 현존재 외의 다른 존재자들의 존재에는 실존이라는 말을 안 쓰고 ‘눈앞에 있음’이라고 해두자.

 

현존재의 본질은 그의 실존에 있다. 실존이란 존재자의 눈앞에 보이는, 현존재에게 이미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런 저런 고정된 속성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실존이란 ‘그때마다 각기 현존재에게 가능한 존재함의 방식들’이다. 실존이란 구체적으로 처해있는 삶의 국면들 속에서 매 순간마다 또 매 상황마다 현존재에게 주어지는 가능성이다. 이미 완성된 무언가가 아니라, 완성해야 할 하나의 과제로서 주어져 있는, 구현해야 할 하나의 가능성. 이렇게 현존재는 그의 존재에 대해서 그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 관계한다. 현존재는 각기 그의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현존재는 그의 존재에서 자기 자신을 선택할 수도 있고 획득할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겉보기로만 획득할 수도 있고 반대로 자기 자신을 상실할 수도 있다.

 

[인간은 돌이 아니다. 개, 돼지도 아니다. 인간은 강물이 범람하면 뗏목을 만들고 추우면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운다. 사랑하고 투쟁하고 노동하고 춤추고 지배하고 매매하고 배신하고 속이고 헌신한다. 세계와 매순간 뜨겁게 상호작용하면서,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자기 앞에 주어진 무수한 가능성들을 펼쳐내면서,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구현하며 산다. 이것이 바로 현존재의 존재의 본질이다. 따라서 현존재의 실존은 항구적이거나 고정된 게 아니다. 정적인 게 아니라 동적인 것. 미래적이고 변화하는 것. 능동적인 것, 주도적인 것, 참여적인 것, 끊임없이 형성되어져 가는 도래하는 어떤 것이다.]

 

자기 자신을 획득한다는 건 무엇이고 상실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본래성과 비본래성이라는, 현존재를 규정하는 두 가지 존재양태로서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적인 실존이라 함은 현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구현하면서 사는 존재방식을 말한다. 현존재가 비본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존재양태가 도피의 양태일 수도 있고 망각의 양태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존재의 존재양태가 비본래성을 띤다고 해서 그것이 모자라거나 낮은 차원의 존재등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본래성을 띠는 현존재는 그 누구보다도 세상일로 분주하고 각종 사건에 흥분하고 다방면에 관심 많고 곳곳에서 향락을 누리는 존재자다. 어쨌든, 도피든 망각이든 현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존재와 평균적인 일상성의 양태에서 관계를 맺고 있다. 현존재는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태도'를 취하고 있다.

 

현존재분석론의 주제인 현존재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로 마치고, 이제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이 여느 유사한 다른 분석들과 구별된다는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범주와 실존범주의 차이를 설명해보자. 먼저 범주라는 것은 눈앞의 사물들의 존재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특성들을 말한다. 반면에 실존범주라는 것은 현존재가 자신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방식, 즉 현존재의 존재를 구성하는 구조계기들을 말한다. 왜 이렇게 구분하느냐면, 앞서도 말했지만 현존재의 존재는 존재자가 갖는 눈앞에 존재하는 특성들을 단순히 기술하고 분류하면서 그것에서 공통된 특성들을 끌어들이는 (기존의 서양철학이 존재자를 이해하는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로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현존재가 자신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방식들, 즉 현존재가 실존하는 방식들과 관련하여 기술되어야만 한다. 사물이 존재하는 것과 현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눈앞의 사물들의 존재를 파악하는 범주와 현존재의 존재를 파악하는 실존범주는 전적으로 달라야 하고 또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현존재는 현존재 아닌 것과 구별되어야 하고(실존범주 vs 범주, 실존 vs 눈앞에 있음, 현존재 vs 존재자), 현존재분석론 또한 인간학, 심리학, 생물학과 구별되어야 한다. 후자에 대한 내용은 다음 절에서 한다.

 

10절 현존재분석론을 인간학, 심리학, 생물학과 구별지어서 한정함
데카르트는 ‘나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지만 그는 사유에 대해서만 논의할 뿐 존재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지 않다. 사실 사유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실존적인 삶이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유한다’가 옳다. 의식작용은 현존재의 존재방식에 의해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또한 데카르트의 생각처럼 자아나 주관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화되거나 실체화할 수 있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현존재는 그렇게 여느 사물적인 존재방식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재는 그때마다의 역사적인 세계 안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든지 아니면 실현하지 못하는 식으로 살고 있다. 현존재가 갖는 이러한 실존방식에 대한 분석은 의식작용에 대한 내적인 반성이 아니라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삶 전체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수행되어야 한다. (이후 딜타이, 후설, 셸러까지 차례차례 까대는데 이는 생략) 이처럼 근대철학이 현존재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까닭은, 전통적 인간학의 두 원천인 고대그리스와 그리스도교의 인간학이 인간을 여느 다른 존재자와 똑같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를 ‘실존’이 아니라 그저 다른 사물들의 경우와 같이 ‘눈앞의 존재’로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듯이 보이지만 기실 현존재의 존재가 그 어떤 물음 아래에도 놓이지 않고 있기로는 인간학(철학)뿐만이 아니다. 심리학, 생물학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인간과학들은 인간에 대한 선이해를 전제로 하여 인간을 연구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 모두 선이해 자체는 문제 삼지 않고 있다.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은 모든 인간과학에 선행하여 그것들에 기초를 마련하는 작업이다.

 

11절 실존론적 분석론과 원시적 현존재의 해석. “자연적 세계개념” 획득의 어려움
내가 현존재를 그의 일상성에서 해석한다고 말할 때의 그 일상성이란, 현존재가 고도로 발달되고 세분화된 문화 속에서 움직이고 있을 때의 현존재의 한 존재양태이다. 그러나 원시적인 현존재도 그들 나름의 일상성을 가지고 있을 테고, 때로 원시적 현존재는 현상들에 근원적으로 몰입하여 더 직접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우리 측에서 볼 때 서툴고 거친 개념성이 현상들의 존재론적 구조를 순수하게 끄집어내오는 데 더 유익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원시인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온 민속학 역시 인간 현존재에 대한 특정한 개념과 해석 안에서 움직이고 있고, 이 학문이 가지고 있는 맹점도 앞서 비판한 여느 인간과학의 경우와 다를 바 없다.

 

인간을 주제로 한 여러 방면의 지식이 풍부해진다고 해서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존재자에 대한 지식 획득을 넘어서 존재에 대해서 묻는 것이 모든 학문적 추구의 궁극점이라면, 존재론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독자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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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아이처럼 - 아이, 엄마, 가족이 모두 행복한 프랑스식 육아
파멜라 드러커맨 지음, 이주혜 옮김 / 북하이브(타임북스)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부모와의 정신적 분리(자립심), 공중도덕, 예의를 중시하고 인내심과 자제력을 함양토록 하는, 단호하고 엄격한 프랑스식 육아법. 육아서라는 것도 결국엔 새로운 지식 습득이라기보다는 이미 나름으로 내면화되어 있는 양육에 대한 주관을 재차 확인하고 강화시키는 용도밖에는 안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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