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디자인 - 미의식이 만드는 미래
하라 켄야 지음, 이규원 옮김 / 안그라픽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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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디자인>에 이어 읽었다. 여기서도 하라 켄야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디자인은 정신을 구현하는 강력한 시각적 수단이며 우리는 디자인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깨우치고 미의식을 확장할 수 있다는 것. 원제가 <일본의 디자인>인 만큼 이 책에서는 섬세, 공손, 세밀, 간결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일본 고유의 감각 자원이 갖는 미래적 가치에 주목하고 이를 어떻게 산업화하여 운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주로 모색하고 있다. 자국의 문화예술적 전통을 가능케 한 독자적 미의식이 세계적 문맥 속에서 창조적 가치를 낳을 수 있는 중요한 원천 기술임을 자각하고 그 구체적 활용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나라 디자인 업계 종사자들에게도 충분히 자극이 될 만한 내용이겠다. 부러운 일이다. 일본에 이런 디자이너가 있다는 건.

 

한때 조선이라는 나라에 빠져들어 그 나라의 문화, 역사, 예술, 사상, 전통, 생활사 등등 각 방면의 책을 열심히도 읽었었다. 늘 그렇듯 얼마 지나지 않아 주마간산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그때 분명히 느꼈던 것 한 가지는, 잘은 몰라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보통 나라(?)는 아닌 것 같다는 실로 막연한 충격이었다. 잘은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이 나라에는 뭔가가 있다. 함부로 가늠할 수 없는 묵직함이 있다. 심오한 깊이가 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쩐지 근대화의 폭우 속에서 사라져버린 비운의 아틀란티스 제국처럼 느껴졌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라 켄야의 제안처럼 우리도 우리의 과거에서 얼마든지 오래된 미래를 발견해내어 이를 현대적으로 세련되게 응용해 볼 수 있을 텐데. 제국은 여전히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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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는 아파트 옥상에서 누가 투신자살을 했다. 경찰차가 도착하고 시신이 수습되는 동안 산 자들의 호들갑으로 주변이 잠시 떠들썩하였으나 이내 모든 상황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게 되었다. 어딘가를 향해 그토록 맹렬한 속도로 돌진해본 것은 그로서는 아마도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리라. 그가 온몸을 내던져 지구상에 최후의 방점을 찍은 곳은 놀이터 구석이었다. 한때 시신이 누워있던 그곳에서 이제는 꼬마들이 깔깔대며 논다.

 

흔히 신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허락한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거야말로 선뜩한 얘기가 아닌가. 신의 매서운 눈길에 의해 우리 각자 심신의 내구력이 정밀하게 측량되어 최고치의 형벌이 저마다에게 고유한 값으로 주어진다니, 이 얼마나 잔혹한 놀이의 법칙인가. 자살은 이 가혹한 놀이판을 스스로 걷어차 버리는 일이다. 초유의 결단이다. 대-우주적 반칙이다. 궁극의 저항이다. 신을 향해 인간이 지어보일 수 있는 가장 매서운 비웃음이다.

 

상황이 불리할 경우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시작된 이 잔혹한 놀이를 자진하여 종결시켜 버릴 수도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아울러 우리가 처한 이 세계라는 것이 본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얼마든지 퇴장할 수 있는 열린 계(界)라는 사실을, 그날 아침 그가 내 앞에서 명쾌하게 실증해 보였다.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뎌라. 여의치 않으면 죽어라. 죽음은 금기가 아니다, 라고 하얀 천에 덮인 그의 죽음이 선언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어떤 의미에서 영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는 위엄 있게 이 놀이를 거부한 것이니까. 죽음으로써 신 앞에 당당히 의사 표현을 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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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4 1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14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19 1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작업실, 구경 - 엿보고 싶은 작가들의 25개 공간
행복이가득한집 엮음 / 디자인하우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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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생활하는 물리적 공간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단순히 환경미화 차원을 넘어선. 공간은 그곳을 점유한 집단의 가치와 철학과 사고관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되려 사람을 포박하고 지배하기도 한다. 우리는 생각하는대로 살기도 하지만 사는대로 생각할 때가 더 많고, 그런 면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곧 어떤 방식으로 구축된 물리적 환경 속에서 어떤 동선에 따라 움직이며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최근 살펴본 인테리어 관련서 중에서 자극을 가장 많이 받은 책이다. 인테리어에는 정답이 없고, 다만 일상의 미의식을 유지하며 각자의 삶의 방식과 취향에 따라 소신있게 고유의 양식을 개척해나가면 될 뿐이라는 걸, 25인 예술가들의 작업실 풍경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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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다지 총명하지도 못하면서 자꾸 공부를 하려고 하는 까닭이 뭘까. 생각해보면 결론은 역시 공허감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나야말로 전형적인 히스테리 자아가 아닐까. 히스테리적 자아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엄청난 공허감이다. 거대한 무(無)로 이루어진 유(有)인 그들은 몸과 마음을 다 바칠 ‘어떤 것’을 찾아내어 그것으로 무(無)라고 하는 자기를 덮어 씌워버림으로써 오로지 그 윤곽으로 자기 존재를 확인한다. 때문에 그 ‘어떤 것’은 무엇보다도 강력해야 한다. 공허를 제대로 덮어 씌워버리기 위해서. 쉽게 구멍이 뚫리거나 벗겨지면 안 되므로 또한 견고하고 튼튼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이 남편이나 가정이나 직업 따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결국 관계의 산물인데, 관계라는 건 허물어지기가 너무도 쉬우니까. 강력하고 안전하고 견고한 어떤 것. 내가 찾는 그것이 현재로서 학문인 것 같다. 이런 생각이 계속 이어진다면 나는 아마도 모든 학문 중에서도 가장 형이상학적인 학문에 목매달게 되지 않을까. 철학이나 신학 같은.

 

2 삶이라는 총체적인 비의에서 오는 고독과 단순히 인간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고독은 다른 종류의 것일진대 나는 자꾸만 그 둘을 혼동한다. 견고한 자폐의 성 안에 틀어박혀 그간 수집한 몇 되지도 않는 책들을 세계의 전부인 양 끌어안고 마이 프레시어스를 연발하며 사는 것이 내 모습은 아닐까. 그러면서 내가 만들어낸 이 국지적인 공간의 어둠과 음습함을 존재자의 서글픈 필연이라고 거창하게 착각하며 사는 것은 아닐까. 내부로 파고드는 습벽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럼으로써 실재로서의 주변을 외면하는 것, 아니 심지어 냉소하고 경멸하는 것, 나와 주변을 대립적 관계로 인식하는 그 편협한 생각의 틀이 잘못된 게 아닐까. 배움이 결코 자폐의 성을 축조하는 작업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인데, 오히려 배움이란 궁극적으로 세상을 향한 가교를 놓는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인데, 나는 왜 자꾸만 골룸이 되어가는지. 앎이 계속될수록 책에 대한 집착과 탐욕은 늘어나고 심지어는 책에 대한 물신화 증세까지 생겨난다. 더욱 더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다.

 

3 지금 이 순간이 고독하다면 그건 내가 전적으로 사랑이 고갈된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에게도 상처주지 않으면서 또한 아무로부터도 상처받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단단한 껍질을 두른 채 나는 지금 그 안에 단단히 갇혀있다. 가능하면 부딪힘의 횟수를 줄이고 내부로 은신하려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배팅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지금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성만이 안전하고 나는 오로지 그것만을 견딜 수 있다. 독서는 사실 배팅하지 않은 데 대한 알리바이인 것이다. 알리바이가 술이나 춤이 아니라 책이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일 뿐이다. 부유하는 선택지들 사이를 아무렇게나 휘저어 낚아챈 것이 때마침 책이었을 뿐이다.

 

4 내가 풀 수 없는 문제에 관해서는 집착을 버려야 할 것이다. 흐릿한 추정과 상상 속에서 스스로를 옭아매지 말자. 무엇보다도 과거의 사건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행동은 현재로의 투신을 지연시킬 뿐이다. 아니, 과거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영원히 메울 수 없는 검고 슬픈 틈 앞에서 더 이상 하릴없이 서성이지 말자. 정념에서 벗어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몫의 생을 꾸려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절망 속에서 진군할 것. 일체의 희망 없음 속에서 미소 지을 것. 현재로서는 확실히, 탐닉하고 몰두할 만한 순수하고 지고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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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로 보는 구약 성경 이야기 명화로 보는 성경 이야기
헨드릭 W. 반 룬 지음, 원재훈 편역 / 그린월드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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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비기독교인의 처지로 서양미술사를 살펴보려니 여러모로 답답한 점이 있어서 대략적인 이야기라도 알아두고자 읽었다. 성서 내용을 모르고서는 서양미술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까닭에 읽어보기는 하였으나 읽고 나서 드는 의구심은 과연 구약에서 어떤 종교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인간의 충성을 시험하기 위해 가혹한 요구를 하는가 하면, 인간사에 일관성 없이 개입하여 편파적으로 자비를 베푼다. 그는 공평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포악하고 심술궂기마저 하다. 유대의 영웅들 역시 인격적으로 썩 고상해 보이지 않는다. 동방의 영웅이 덕스럽다면, 그리고 그리스로마 영웅이 용감무쌍하다면, 유대의 영웅은 영리하고 재주와 수완이 좋아 보인다. 도덕에 크게 구애함이 없어 일견 교활해 보이기도 한다.

 

구약은 그야말로 불가해하고 가차 없는 자연과 범속한 인간 세계의 풍경을 풍부한 신화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더도말도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이러한 구약이 과연 인류의 성서가 될 만큼 독자적이고 심원한 종교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부족 설화 혹은 소수민족사 이상의 가치가 있는가?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차차로 시편과 잠언 및 전도서 부분만 따로 떼어 엮은 책을 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책 끄트머리에 나오는 아래 대목 때문이다.

 

<시편>의 주제는 지난 6세기 동안 지어졌던 시의 주제만큼이나 다양하다. 선악과 복수의 장엄함에서부터 자연에 이르기까지가 가장 오래 전에, 그리고 가장 아름답게 기록되어 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바라고 기도했는지가 희망과 위안을 노래하는 시들 속에 녹아들어 있다. <시편>은 (...) 후대의 위대한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서양 최고의 작곡가들이 여기에 곡을 붙였다. 그 장엄함은 우리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경우에도 도드라진다. (...)

 

<잠언>은 다르다. 여기에는 비전이나 열정이 없다. 다만 현명한 옛사람들의 지혜로운 격언들이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 <잠언>은 보통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며, 고대 유대인들의 관점에 대해 여러 역사서나 예언서보다 더 많이 말해준다.

 

그 다음 책인 <전도서>는 순전히 종교적인 책이다. (...) 저자는 묻는다. 평균적인 인간의 삶을 나타내는 70년 동안의 고통과 근심은 과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든 것의 끝은 무덤일 뿐이다. 착한 사람도 주고, 악한 사람도 죽는다. 모두 죽는 것이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정의로운 사람은 박해를 받으며, 세속적인 사람은 부유해진다. 인간의 고통에는 아무 의미가 없단 말인가?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도다.” 20장 전체가 모두 이 말이다. -400~401쪽 中에서

 

흥미롭게도 구약이라고 하는 이 도저한 대하극에서 여호와는 결코 주인공이 아니다. 차라리 비중은 적으나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조커 역할에 가깝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납득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여호와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봉합하기 위해 동원된다. 봉합이 끝나면 그는 다시 이야기에서 사라진다. 마치 배우가 대사를 까먹어서 헤매고 있을 때 감독이 돌연 스크린에 등장하여 상황을 수습하고 다시 사라지는 형식의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이다.

 

예전에 완행버스를 타고 지방의 소도시에서 소도시로 여행을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구약을 읽으면서 난데없이 그때 일이 생각났다. 서울에서는 버스를 타더라도 딱히 용건이 있지 않는 한 운전기사에게 말을 붙이는 승객이 거의 없다. 사실상 운전기사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승객들이 대부분이라고 해야 하리라. 그런데 내가 탔던 그 완행버스에서는 아주머니 승객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사과를 깎아 먹으면서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기사님한테까지도 사과를 마구 입에 넣어 먹여주는 것이 아닌가. 맛나지라우, 하면서.

 

도로는 구불구불하고 버스는 수시로 출렁대는 와중에 보자기를 풀어헤치고 사과를 깎는 승객들하며, 클클대며 그 사과를 받아먹는 기사님하며, 그들이 주고받는 시시껄렁한 농담하며, 하여간 이 모든 것들이 나로서는 뭐랄까 그야말로 구수한 문화충격이었다. 아, 수많은 방법 중에 이렇게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구나. 왜 여태까지 이런 생각을 못했지. 구약이 내게 준 신선함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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