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근한 감동과 함께 결코 쉽지 않은 과제를 남겨준 책. 그런데 저자 소개 알라딘 링크가 잘못된 듯.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라 발달심리학자라고 하는데. 찾아보니 <언스쿨링>(황기우 옮김, 박영스토리, 2015)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나와있다. 여기저기서 한국의 언스쿨링 모임도 눈에 띈다. 하지만 언스쿨링이라는 것도, 이상만 좇는 낭만주의 실험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자식을 담보로 모험을 할 순 없잖은가), 조직화된 현대사회에서 체계적이고 규모있게 실효성을 가지고 지속되려면, 그 취지와 철학에 공감하는 어른들이 적극적으로 기획하고 운영하는 ‘언스쿨링 스쿨’의 형태가 되어야지 않을까. 이 책 5장 서드베리 스쿨의 사례가 좋은 참조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유전적으로 수렵채집인의 습성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어쨌든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더 이상 수렵채집사회는 아니니. 잃어버린 원시 자연의 본능과 자발적 놀이의 즐거움을 일깨우면서도 결코 반사회적 방임으로 흐르지 않는, 체제보완형 언스쿨링의 길을 잘 찾아봐야 하겠다.
각오를 하고 봐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실주의 영화의 칼날 같은 매서움을 각오해야 한다. 다만 부자를 적 혹은 악인(사이코패스)으로, 젊은 여성을 어리숙한 희생양으로 그리는 설정이 도식적이고 구태의연하게 느껴지고(이런 틀에 박힌 설정이야말로 오히려 사실을 단순화시키는 반리얼리즘 아닐까), 방화와 살인이라는 결말도, 주인공의 상상일지 모른다는 암시를 감안하더라도, 너무 극단적이지 않나. 뭔가 좀 올드한, 1920년대 사회주의 소설의 결말 같기도 하고. 영화 전반에 음습하게 스며있는 불안과 모호함을 끝까지 일관되게 그대로 (뭐 섬뜩한 암시 정도로만) 남겨두는 편이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훌륭한 영화라는 데는 이견 없다. 검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상의를 탈의한 여주인공이 흐느적대며 추던 그레이트 헝거 댄스는 잊지 못할 명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