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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철학 ㅣ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평점 :
1 의식과 신체를 살펴보자. 의식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항상 노예적임. 무리 속에서 발달하는, 근본적으로 무리본성에 다름 아님. “의식은 어떤 전체가 어떤 우월한 전체에 종속되길 원할 때만 습관적으로 나타난다. (...) 의식은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어떤 존재와 관련해서 탄생한다.” 예를 들어 운전을 배우는 운전자의 경우라든지 직장에 막 취직한 신참의 경우. 의식보다 항상 더 놀랍고 우월하고 심오한 것이 바로 신체다. (여기서 신체란 정치적 연합체일 수도, 사회적, 생물학적, 종교적 연합체일 수 있다. 담론의 연합체일 수도 있고.) “신체의 모든 현상은 (...) 지적인 관점에서의 우리 의식보다, 우리 정신보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의욕하는 의식적인 방식보다 우월하다.”
이러한 신체는 다수의 힘들이 투쟁하는 장(場)이다. 신체 속에서 신체를 구성하는 힘들은 맞닿은 다른 힘들과 우연적인 관계를 맺으며 복종하기도 하고 명령하기도 한다. 신체를 정의하는 것은 지배하는 힘들과 지배받는 힘들 간의 관계이다. 모든 힘은 관계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어떤 것이다. 또한 신체는 환원될 수 없는 다수의 힘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다수적 현상이다. 하나의 신체 속에서 우월하거나 지배하는 힘들은 소위 적극적이고, 열등하거나 지배받는 힘들은 소위 반응적이다.
2 복종하는 열등한 힘들은 명령하는 힘들과 구분되지만, 계속해서 힘으로 존재한다. 복종하는 것은 힘 그 자체의 성질이고, 명령하는 것만큼이나 권력에 관계한다. 어떤 힘도 자신의 고유한 권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열등한 힘들은 주로 삶의 조건들을 보존하거나, 삶의 조건들에 적응하거나, 실리를 위해서나, 또 그 외의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그 힘을 작동시킨다. 반면, 명령하는 우월한 힘, 적극적인 힘은, 사실은 이에 대한 진술 자체가 앞서 설명한 열등한 힘들의 경우보다 더 어렵다. 왜냐면 이렇게 진술하는 인간의 의식 자체가 반응적인데 적극적인 힘은 본성상 이미 의식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명을 하자면, 소유하고 탈취하고 좌지우지하며 지배하는 것이야말로 적극적인 힘들의 특징이다. 소유하는 것은 형태를 강요하는 것, 결과들을 활용해서 형태를 창조하는 것.
니체는 다윈을 비판하고 라마르크를 지지한다. 다윈은 변화된 환경에 적응을 잘 한 놈들이 생존경쟁에서 이겨 살아남았단 식으로 말하는데 여기서 그려지고 있는 개체는 완전히 수동적이고 반응적이다. 생물체를 그저 반응적인 힘의 담지자로만 그리고 있다. 반면에 라마르크는 용불용성을 주장하는데 이러한 이론은 다윈과 다르게 개체가 가진 조형의 힘, 변신의 힘,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목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니체가 보기에 생명체의 분화과정이라는 것은 환경에의 순응의 결과가 아니라 차이를 낳는 잠재성의 영역이 창조적으로 분화해간 결과이다. 유기체에게 새로운 기관이 생성되는 현상 또한 유기체 내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투쟁과 특정 부분의 승리 그리고 다른 부분의 위축의 결과인 것이다.
3 힘들은 양적이고, 양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물리학이 하듯이 그렇게 순수하게 양적인 규정은 추상적이고 불완전하고 모호하다. 양과 함께 질 또한 하나의 척도로서 고려되어야 한다. 양적인 차이는 질적 차이를 수반한다. 가령 6N과 2N은 양적으로도 다르지만, 질적으로도 다르다. 그리고 질은 양으로 환원될 수도 없다. 2N을 세 배 마련한다고 해서 그 질이 6N과 똑같아지는 게 아니다. 양과 질의 환원불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추상적으로 힘들을 셈할 수 없고, 어떤 현상이나 사건 또는 어떤 신체의 경우 속에서 그것들 각각의 성질과 그 성질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평가해야만 한다.
4 앞서 힘들이 양으로 환원 불가능하고 성질이 다양하게 존재하며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고 했던 바, 힘에 대해서 수치화하고 추상화하고 힘을 균등화, 균일화하여 다루는 과학은 힘의 참된 이론을 결여하고 있으며 심지어 힘의 이론을 위태롭게 한다. 비단 물리학뿐만 아니라, 니체는 인간의 의식, 정신, 철학, 심리학, 생물학을 비롯한 근대 학문, 근대문명, 민주주의, 사회주의, 실증주의, 인본주의, 변증법주의, 이 모든 것들을 모두 노예적이고 반응적인 힘들의 승리라고 싸잡아 비난한다.
5 니체는 태초에 신이 세계를 창조했고 종말이 있으며 구원이 있고 천국이 있다고 얘기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리켜 삶을 부정하는 금욕적이고 허무주의적이고 노예적인 발상으로 치부한다. 그런 니체가 상정하는 세계상이 영원회귀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좋을 듯하다. 또는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하는 반원의 끊임없는 회전운동, 그리고 그런 반복운동 속에서 비로소 입체적으로 현상하는 구의 이미지라든지. 그와 같이 니체는 이 세계를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목적도 없고 최종 도달점도 없는, 그저 끊임없는 변화를 낳는 영원한 생성 속에서 매순간 현상하는 어떤 것으로 본다. 영원회귀는 정태적인 게 아니다. 늘 생성 중에 있다. 지속되는 생성. 이것이 곧 존재다.
6 권력의지란 무엇인가. 권력의지는 힘과 분리될 수 없는, 힘에 결부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힘의 보완이며 동시에 힘에 내적인 것으로서 주어진 어떤 것이다. 힘이 생성되는 데 전제가 되는 내적 요소. 힘의 성질을 결정하는 내적 의욕. 힘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권력의지는 ‘원하는 것’이다. (크기와 방향을 동시에 갖는 물리적 단위인 벡터에서 ‘힘’이 벡터의 크기를 말한다면, ‘권력의지’는 벡터의 방향에 해당. 최초의 작용점. 마치 채찍을 휘두를 때의 그 손목스냅과도 같은.) 권력의지는 미분적인 동시에 발생적인 힘의 계보학적 요소이다. 정확히 말하면 권력의지는 힘의 계보학적 요소일 뿐만 아니라 힘‘들’의 계보학적 요소이다. 권력의지에 의해서 어떤 하나의 힘이 다른 힘들보다 우세하게 되고, 다른 힘들을 지배하거나, 다른 힘들에게 명령한다. 그리고 또 다른 어떤 힘은 그러한 관계 속에서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된다. 이 모든 힘들의 역학의 배후에 권력의지가 있는 것. 권력의지야말로 힘의 생산 요소이고 힘의 생성적 요소이다.
7-1 권력의지는 우연을 함축한다. 우연 없이는 힘들이 어떤 조형성도 갖지 못하며, 변화도 꾀할 수 없다. 우연은 힘을 관계 짓는다. 권력의지는 필연적으로 힘들에 부가되지만 우연에 의해서 관계 맺어지는 힘들에만 부가된다.
7-2 계보학적 요소로서의 권력의지로부터 관계 속에 있는 힘들의 양적 차이와 동시에 그 힘들 각각의 성질이 파생한다. 그것들의 양적 차이에 의해서 힘들은 소위 지배적이고 지배받는다. 그것들의 성질에 의해서 힘들은 소위 적극적이고 반응적이다. 적극적이거나 지배하는 힘들 속에서처럼, 반응적이거나 지배받는 힘들 속에도 권력의지가 있다. 그러니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해석한다는 것은 그러한 가시적인 총체를 만들어내는 힘들의 성질을 평가하고 힘들의 관계를 측정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극도로 예민한 지각이 요구된다.
7-3 긍정적임과 부정적임은 권력의지의 원초적 성질을 가리킨다. 행동하기, 반응하기가 힘을 표현하듯이, 긍정하기, 부인하기, 극찬하기, 비하하기는 권력의지를 표현한다. 어떤 건 좋고, 어떤 건 나쁘고, 어떤 것은 칭찬하고, 어떤 것은 비난하는 등 권력의지 자체가 하나의 가치평가를 수행하고 있는 것. 현상을 해석하는 것 또한 권력의지의 발현이다. 그러니 어떤 해석도 객관적일 수 없다. 해석 자체가 좋고 나쁨을 정하는 권력의지의 관철이기 때문에.
7-4 이 모든 이유 때문에 권력의지는 해석하는 것뿐만 아니라 평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계보학적 요소로서의 권력의지는 의미의 의미화와 가치들의 가치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착하게 여기는 행동들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왜 이 행동을 착하다고 가치 매기고 있는가. 착하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어떤 행동을 착하다고 가치 매기는, 의미부여하는, 우리의 그러한 행위가 어떤 힘들에 의해서 산출되었는지를 해부해 보면, 즉 가치들의 가치를 해부하면, 그 행위를 착하도록 여기게 만드는 하나의 권력의지가 있다.)
8 “기원의 전복된 이미지가 기원에 동반된다.” 즉 현상의 기원을 추적할 때는 항상 이미지의 전복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적극적인 힘들의 관점에서 긍정인 것이 반응적 힘의 관점에서는 부정이 되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힘들은 본디 귀족적이지만 반응적 힘들에 의해 반영된 그들의 모습은 평민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원래 차이를 기원에서부터 부인하고 일그러진 이미지를 제공하면서 전복된 사상으로 전염을 시켜서 기력을 소진시키는 것이야말로 반응적 힘들의 속성이자 전략이기 때문에, 어떤 사태, 신체, 사건, 현상이 반응적인 힘에 전적으로 점령당했을 경우 우리는 더더욱 이러한 이미지의 전복, 가치전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진화’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이 실제로는 ‘퇴락’일 수 있는 것이다.
반응적인 힘들은 적극적인 힘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키고 분해한다. 그것들은 적극적 힘으로부터 그것의 능력의 일부 혹은 거의 전부를 박탈해버린다. 쇠잔하게 만들어 버린다. 말하자면 에너지 흡혈귀다. 따라서 반응적인 힘들 자체가 적극적으로 되지는 않지만, 적극적인 힘이 반응적인 힘을 만나면 적극적인 힘 자체가 새로운 의미에서 반응적으로 되는 일이 생겨난다. 새로운 반응적 생성이 일어남. 이렇게 반응적인 힘들은 우월한 힘을 구성하면서 승리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인 힘을 ‘분리시키면서’ 승리한다.
매 경우에 있어 그 ‘분리’는 어떤 허구, 신비화, 혹은 왜곡에 근거한다. (천국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든지 현세를 지옥으로 왜곡한다든지) 그리고 여기서 허무주의, 즉 ‘무의 의지’가 그러한 부정적이고 전복된 이미지를 발전시킨다. 적극적인 힘을 함정 속으로 유인하는 무의 의지. 결국 적극적인 힘은 허구에 의해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되고, 실제로 반응적으로 된다.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된 힘의 상태도 반응적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 스스로를 제한시키는 상태야말로 반응적이다. 반면 자신의 능력 끝까지 갈 수 있는 모든 힘은 적극적이다.)
9 열등한 힘들은 여전히 열등한 채로, 반응적인 채로, 노예이길 그만두지 않은 채로, 승리할 수가 있다. 열등한 힘들이 승리하고 장악하고 지배적이게 되고 그럴 수가 있다. 그럴 수가 있는 게 아니라, 대체로 그런 경우가 많다. 소크라테스 이래로 인간 정신의 역사, 문명의 역사, 사회 체제의 역사 모두 열등한 것들의 승리가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하는 힘이 열등한지, 우월한지, 반응적인지, 적극적인지, 그것들이 지배받는 것인 한에서 승리하는지, 지배하는 것인 한에서 승리하는지를 판단해야만 한다. 그 영역 속에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해석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해석은, 현존하는 사회질서에 얽매이지 않은, 사회질서를 초월한 관점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가령 자신의 능력 끝까지 갈 수 있는 모든 힘은 적극적인데, 힘이 끝까지 가는 것은 법이 아니라 오히려 법의 반대이기조차 한 것이다.
10 자유로운 사유자들(실증주의자들)은 정작 실증적인 내용의 본성에 관해서, 상응하는 인간적 힘들의 기원이나 성질에 관해서는 전혀 탐구하지 않는다. 힘들의 성질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대세를 장악한 반응적인 힘들에 봉사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삼고 그것들의 승리를 표현할 뿐이다. 그러나 애당초 사실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해석에는 우월한 것과 저열한 것, 즉 서열만이 존재할 뿐이다.
11 앞서 권력의지가 어떤 건 좋고, 어떤 건 나쁘고, 어떤 것은 칭찬하고, 어떤 것은 비난하는 등 하나의 가치평가를 수행하고 있다고 했는데, 좋고 나쁨의 판별이라는 것은 한편으로 권력의지가 감수성, 감성, 기분, 감각의 문제라는 것도 뜻한다.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쁜 ‘원시적 정서 상태’, 모든 다른 감정들을 파생하는 원시적 정서상태, 이것이 곧 권력의지인 것. 힘의 감성, 힘의 미분적 감성으로서의 권력의지.
12 원한, 가책, 허무주의는 심리적 특징들이 아니라, 인간 속의 인간성의 토대와 같다. 그것들은 인간 존재 그 자체의 원리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노예적 속성을 띠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회귀조차도 특유의 반응적 힘의 관점에서 허무주의적인 사유로 만들어버린다. 반응적인 인간의 관점을 통해 인식되는 영원회귀는 역겹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영원회귀의 사유 역시 인간의 눈에는 전복된 이미지 속에 놓여있는 것이다.
13 의미와 가치들은 양면성을 갖는다. 가령 질병은 나를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키지만, 동시에 내게 새로운 능력을 부여한다. 팔을 다쳐서 팔을 쓸 수 없게 되면, 팔 대신 발을 자유자재로 쓰는 새로운 능력을 계발하게 된다. 즉 반응적인 힘은 우리를 우리의 권력에서 분리시키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또 다른 권력을 준다. 새로운 감정들을 가져다주고, 영향 받는 새로운 방식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니체가 소크라테스, 예수, 유태교와 기독교, 퇴락 혹은 퇴행의 형태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우리는 각각의 경우에서 그와 같은 양면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의미와 가치들의 양면성이 어떠하건 우리는 반응적인 힘이 그것이 할 수 있는 바의 끝까지 가면서 적극적으로 된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반응적 힘은 어디까지나 무의 의지와의 관계 속에서만 전개된다.
14 반응적 인간의 가치평가에 감염된 차라투스트라는 처음에 영원회귀를 혐오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내 ‘회복기 환자’, ‘위안받은 자’로 변신해 혐오를 극복하고 영원회귀를 긍정하게 된다. 그러한 드라마틱한 인식의 전환은 ‘선택적인 원리’로서 영원회귀를 사유함으로서 이루어진다. 어떤 의미에서 영원회귀가 선택적이라는 것인가? 먼저 영원회귀는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 입법에 타당하도록 행위하라’는 칸트의 윤리강령 만큼이나 엄격한 규칙을 제공한다. 바로 “네가 의욕하는 것, 그것을 네가 영원회귀를 의욕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원하라!” 딱 한 번만 하고 싶은 것이어도 안 된다. 약간만 하고 싶은 것이어도 안 된다. 영원히 또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을, 또 하고 또 해도 다시 또 원하게 되는 바로 그런 것을 원하라. 전적으로 원하라. 이것이 영원회귀의 사유가 부가하는 윤리 준칙이다.
영원회귀가 선택적인 원리라고 하는 데에는 또 하나의 다른 의미가 있다. 처음에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를 역겹게 느꼈던 이유는 그것을 허무주의의 극단적 형태로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무주의가 정말로 극단으로 치달으면 그것의 최종점은 자기소멸이다. 허무주의의 진정한 극단적 형태는 영원회귀가 아니라 자멸이다. 자멸이야말로 반응적 힘들이 적극적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무의 의지의 최종형태는 자멸인 바, 영원회귀의 운동 속에서 결국 반응적인 힘은 지속되지 못한다. 영원회귀의 원리 속에서는 긍정만이 살아남는다. 반응적인 힘들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마치 원심분리기가 그렇게 하듯이 영원회귀의 운동 원리 자체가 반응적인 힘들을 끊임없이 원 밖으로 날려버린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영원회귀라는 운동 자체가 존립할 수 있기 때문에. 영원회귀는 타오르는 불과 같은 끝없는 생성인데, 무의 의지가 장악한 영원회귀라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인 것. 운동 원리상으로 모순인 것.
15 영원회귀의 원리 속에서 반응적인 힘들은 지속되지 못한다. 결국 영원회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영원회귀는 생성의 보편적 존재이지만, 생성의 보편적 존재는 단 하나의 생성만을 뜻한다고. 바로 '적극적 생성'만이 전생성의 존재인 하나의 존재를 갖는다고. 사람들이 생성의 보편적 존재로서 영원회귀를 긍정하고, 거기에 더해서 '보편적 영원회귀의 산물'로서 '적극적 생성'을 긍정하는 한, 긍정은 점점 더 심오해진다. 선택적 존재론으로서의 영원회귀는 그 생성의 존재를 적극적 생성에 의해서 <자신을 긍정함>으로서 긍정한다. 이것이야말로 긍정의 긍정, 이중의 긍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