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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가 본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나누리 옮김 / 필맥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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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생애가 유독 흥미롭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세계 만방에 평화와 사랑, 인류애, 형제애를 천명하면서 내적으로는 극도의 자기 절제와 자기 재판, 자기 검열을 반복했던 사람이었다. 안과 밖으로 모두 지독한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이 책 관련해서 친구와 나눴던 채팅을 요약하는 것으로 리뷰를 갈음한다. 

나: 슈테판 츠바이크의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를 읽고 톨스토이가 남긴 일기에 관심이 생겨서 어제 학교 가서 톨스토이의 일기를 빌렸다. 나는 톨스토이의 소설보다도 톨스토이라는 사람 자체에 더 관심이 간다. 톨스토이는 확실히 나와 비슷한 인간형인 것 같다. 물론 그 사람은 거장이고 나는 한갓 필부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친: 그 책에서 톨스토이는 어떤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나?
나: 그는 굉장한 이상주의자였다. 대외적으로는 작품을 통해 세계 만방에 평화와 사랑, 인류애, 형제애를 천명했지만 내적으로는 극도의 자기 검열과 자기 재판을 반복했던 사람이었다. 가혹하리만큼. 스스로를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채찍질했던 사람이다.
친: 빡센 인생을 살았겠군.
나: 난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뭐랄까, 나 역시 이상적 자아와 현실의 자아 간에 끝없이 어떤 괴리감을 느낀다는 점에서 톨스토이의 고통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 츠바이크의 책에서는 톨스토이의 일기가 자주 인용되는데 스스로를 너무나 자학하는 듯한 그의 일기에 기가 찬다. 
친: 어떤 이야기가 있길래?
나: 12시부터 2시까지 비기체프와 보냄. 너무 거리낌 없이 말함. 허영심이 강하고 자기기만적이었음. 2시부터 4시까지 운동. 지구력과 인내력 부족. 4시부터 6시까지 식사, 불필요한 것들을 사들임. 집에 와서는 글을 쓰지 않았음. 게을렀음. 볼콘스키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웠음. 거기 가서 거의 말을 하지 않음. 비겁함. 옳지 못한 행동을 함. 비겁함, 자만심, 경솔함, 나약함, 게으름.
친: 장난아닌데.
나: 츠바이크는 톨스토이가 소설을 통해서 굉장히 이상적인 사상을 이야기했으면서도 스스로가 일상에서는 그러한 이상을 따르지 못해서 내심 고통받았던 점을 무척 위대하게 묘사하면서 참으로 인간적인 인간이었다고 평가한다. 나는 카사노바랑 스탕달은 별로 매력을 못 느끼겠지만 이 톨스토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참 흥미를 느꼈어.
친: 그런데 츠바이크는, 톨스토이를 나머지 두 사람과 함께 놓은 이유를 뭐라고 했지?
나: 왜 세명을 한데 묶었냐면, 모두 일생의 많은 부분은 자기묘사에 할애했던 사람들이거든. 소설이나 일기를 매개로 하여 자기 묘사를 보여준 사람들인데 그 질적 수준이 카사노바에서 스탕달, 스탕달에서 톨스토이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거야. 카사노바는 자기 보고, 스탕달은 자기 관찰, 톨스토이는 자기 재판에 가깝지. 그런 점에서 나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반성하게 된 책이기도 해. 나 역시 지금은 카사노바에 가까운 것 같아.
친: 그런데 너는 스탕달의 자기 묘사가 자기관찰의 수준이라고 했는데 정확히 그게 어떤 것인지?
나: 사실 스탕달의 경우를 자기관찰이라고 하긴 했는데 잘은 모르겠다. 카사노바와 톨스토이의 중간적 단계 정도인 것 같긴 한데, 스탕달이 자기 기만의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카사노바보다 한 수 위였던 것 같다. 기만을 의도하는 어떤 장치조차 없이 그저 천진난만하고 생각없이 자기를 기술한 게 카사노바였고, 최소한의 어떤 자아상 같은 게 있어서 거기에다 맞추어 자기를 윤색했던 게 스탕달인 것 같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모든 저열한 차원을 뛰어넘은 사람이고.
친: 그렇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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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에 관하여 - 프로이트전집 13 프로이트 전집 13
프로이트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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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이라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캐고 싶었다. 감정을 분석적으로 들여다 보는 과정을 거치고 나면 나의 우울에 대해서 보다 담담해질 수 있지 않을까. 절실한 개인적 필요에 의해 읽은 책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울증 환자들의 상실감이란 전적으로 자아와 관련된 상실감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뱉는, 자신을 비하하고 비난하는 말들은 사실상 다른 사람, 즉 그가 현재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했던 사람,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와 같다.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이렇다. 한 대상을 향해 리비도를 집중시키는 일이 한때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에게서 냉대를 받거나 실망을 하게 되면 대상과의 관계가 깨지고 만다. 정상적인 결과라면 대상에게 집중되었던 리비도가 철회되어 새로운 대상에게 전위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여타 조건 때문에 다른 식의 결과가 초래된다. 자유로운 리비도가 다른 대상을 찾는 대신 자아 속으로 들어가버리는 것. 나르시시즘적 성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이렇게 되기 쉽다. 그러나 자아 속에서도 그 리비도는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아를 포기된 대상과 '동일시'하는 데만 기여할 뿐이다. 그 결과, 대상 상실은 자아 상실로 전환된다.

우울증 환자들이 괴로워 하면서도 즐기는 듯이 보이는 자기 고문은 사실상 위에서 언급한 '대상을 향한 가학증과 증오심 및 복수심'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대상에 대한 원망이 자기 징벌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원래의 대상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이고, 자신이 직접 그 대상에게 공개적으로 적대감을 표현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우울증이라는 질병을 매개로 사랑하는 사람을 고문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 환자의 정서적 장애를 불러일으킨 사람, 즉 환자의 질병 발발에 계기를 마련해 준 사람은 보통 환자의 가까운 주변에 있는 사람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울증이 심한 사람이 자살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필연적인 단계일 수 있다. 대상을 자기와 동일시하고 자기를 대상화하여 대상에 대한 리비도를 자신에 대한 리비도로 바꾸는 것, 그래서 대상에 대한 원망 증오 복수심을 자기에게 풀어내는 이러한 우울증이 심해지면 대상으로 향해 발산되었던 그 모든 적개심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자기가 자기를 죽여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자아는 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철저히 압도당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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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과학 인문학 - 유럽 지적 담론의 지형
이종흡 지음 / 지영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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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오늘날의 주된 과학사 연구가 논리실증주의적 인식론에 근거한 '휘그적 역사관'에 기반해 있다고 말한다. 휘그식 관점에서 보면 과학에서 이론의 계승 과정은 항상 합리적이고 의도적인 정신에 의해 추진되어왔기 때문에 결코 비합리적일 수 없으며, 과학 이론은 언제나 경험세계를 더욱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진보적 방향으로 나아간다. 또한 이러한 진보성은 이론 선택의 주체인 과학자의 합리성에 의존한다.

그러나 논리실증주의 인식론은 인식의 시초 단계인 가설의 설정 과정이 대단히 비과학적이라는 자기모순을 태생적으로 안고 있다. 가설은 논리가 아니라 직관이다. 포퍼는 가설의 형성이 우리 정신의 자유로운 창조물이요, 거의 시적 직관의, 즉 자연법칙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의 결과라고 말한다. 특정 가설을 정립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창조적 상상력의 작용으로서 논리적으로 설명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난점 때문에 논리실증주의 인식론은 착안(가설) 자체보다 착안에서 비롯한 절차(방법)나 결과(이론)에 관심을 둔다. 말하기 곤란한 부분에 대해서는 함구하거나 회피해 버리는 것이다. 마찬가지 지점에서 논리실증주의적 인식론에 근거한 휘그적 역사관 또한 모순에 빠지게 된다. 과학사에 나타나는 '단절'(패러다임의 전환)이 그것이다. 휘그식 과학사는 자신의 모순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클리셰를 등장시킨다. 즉 과학사가 일순간 도약하는 껄끄러운 순간마다 '천재'들을 만들어 해명하는 것이다.

비학 연구자들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순간을 느닷없이 쏟아져나온 무수한 천재들의 업적으로 돌리는 휘그식 과학사를 지양한다. 그들은 과학사에 있어서 전환과 도약이 개인의 천재적 재능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상황적인 담론에 의해서 서서히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과학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서 뉴턴 같은 천재들에 관심을 두기보다 자연마술, 점성술, 연금술, 헤르메티시즘 등 근대과학이 쓰레기로 치부했던 비학을 하나의 담론으로서 탐구한다.

 

그러나 중세에서 근대로의 도약을 설명하기 위해 비과학적 담론을 끌어들이려는 비학연구자들의 시도가 과연 휘그식 역사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또한 근본적으로는 논리실증주의적으로 역사를 이해하려는 대단히 휘그적인 태도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들 역시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한 시기에 발견되는 인식론적 단절을 매끄럽게 봉합하기 위해, 즉 '천재론'보다 좀 더 수긍할 만한 논리적 절차와 과정과 맥락을 찾기 위해 비학이라는 담론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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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3-04-09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이 절판되어서 너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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