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21 | 22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그늘의 발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몰랐지 / 늦가을을 제일로 / 숨겨놓은 곳은 / 늦가을 빈 원두막 / 살아도 살아갈 곳은 / 늦가을 빈 원두막 / 과일을 다 가져가고 / 비로소 그 다음 / 잎사귀 지는 것의 끝을 / 혼자서 / 다 바라보는 / 저곳이 / 영리가 사는 곳 / 살아도 못 살아본 곳은 / 늦가을 빈 원두막 /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못 살았지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전문

 

시인은, 과일 떨어지고 난 빈 밭은 아직 제대로 된 늦가을이 아니라고 말한다. 과일 다 떨어진 다음에, 그 다음에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자잘한 잎사귀들마저 하나 둘 지기 시작하고 종내는 제일 마지막으로 남은 잎사귀마저 스러지는 것, 그게 진짜 늦가을이라고 한다. 시인에게 있어 빈 원두막은 그런 광경을 혼자서 오롯이 다 바라볼 수 있는 장소이고, 그래서 늦가을이라는 계절을 가장 진정으로 보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원두막은 '영리'가 사는 곳이다. 

시를 읽다가 아무래도 시인이 '영리'라는 시어를 일부러 (한자어로 쓰지 않고) 한글로 남겨놓아서 뜻을 모호하게 처리해놓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리'의 한자어를 찾아봤는데 웬걸, 날카로운 의혹이 무색하게도 그냥 '영리할 영'에 '영리할 리'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영리할 영'이라는 한자가 영리하다는 뜻과 함께 '지혜롭다, 불쌍히 여기다, 가엾게 여기다, 어여삐 여기다, 귀여워하다, 사랑하다'의 뜻도 있더라. 옛날엔 '가엾게 여길 줄 아는 것'이 '영리'한 거였구나. 아, 그렇구나.

 

늦가을 지나기 전에 빈 원두막에 가고 싶다. 단 하루라도 잎사귀 지는 것의 끝을 바라보고 나서 아주 조금은 영리해져 돌아오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꼭 동해가 아니어도 좋았다.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미지의 소도시라면 굳이 동해가 아니라도 별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청량리발 동해행 무궁화호 열차표를 끊고 나자 어쩐지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반드시 동해 여야만 할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비 개인 다음 날이었으나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했고 보도블럭이 꺼진 자리마다 물웅덩이가 복병처럼 숨어있었다. 배낭을 지고 카메라를 목에 맨 나는 누가 보아도 주5일제의 특혜를 얻은 여행객의 차림이었겠지만 나는 어쩐지 나 자신이 유배지로 향하는 유생이나 근신할 곳을 찾아 유랑하는 난민처럼 여겨져서 설레기보담은 그저 담담하고 약간은 헛헛한 기분이었다.

미놀타와 몇 판 남지 않은 일회용 카메라 두개, 샴푸, 린스, 로션 등속을 챙기고 기차간에서 읽을 책으로 이문구의 <관촌수필>과 프리조프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을 넣었다. (후자는 아무래도 동해 여행보다는 정독 도서관이 어울린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였으나 읽던 책이라서 미련을 못 버리고 챙겨 넣었다. 여행지에서 그다지 많은 페이지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굳이 들고 간 까닭은 시험 전날 동아전과를 베고 자면 올백 맞는다는 어린 시절의 미신이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일까) 그리고 욕심 많게도 CD를 여섯 장이나 넣었다. 버리려고 떠난 여행인데 등짐만 한가득 이어서 여간 볼썽사나운 꼴이 아니었다.  

저녁 여덟 시 쯤에 동해역에 내렸더니 추암 바닷가 가는 버스가 벌써 끊긴 모양이었다. 택시 타고 십분 정도 가니 바닷가였다. 나는 방 하나에 2만 5천 원에다가 대전엑스포 기념 자수가 박힌 초록색 수건을 서비스로 제공해주는 민박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민박집 바깥쪽은 구멍가게랑 연결되어 있었는데, 으슥한 가게 안에 골동품 가구처럼 박혀있던 주인 할머니가 날더러 혼자 왔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하였더니 혀를 끌끌 차셨다. 측은해서 그러시는지 한심해서 그러시는지 종시 짐작할 수 없었다. 내가 묵은 곳은 말하자면 남신의주 유동 박씨봉방 같은 방이었다. 이 작고 괴괴한 낯선 방이야말로 나의 본질에 다름없는 것 같다는 기묘한 기분 때문에 나는 몹시 뭉클했다. (너무 길어져서 그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ei mir bist du schon- 당신은 아름다워요. 스윙빠에서 틀어주는 음악 중에 가장 사랑스러운 곡을 꼽으라면 영화 스윙키즈에 나왔던 이 노래를 꼽겠다. 곡이 중반부에 접어들었을 때 박자가 느려지기 시작하면 우리들의 춤동작은 일제히 슬로 모션으로 바뀐다. 이 때가 장관이다. 그 순간 우리는 마치 바람 부는 방향으로 몸을 누이는 갈대들 같고, 추위를 피해 대열을 이루어 남쪽으로 날아가는 철새 무리 같다. 음악이 되었든 자연의 섭리가 되었든 절대적인 어떤 것에 일제히 조응하는 생명체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숨막히는 풍경이다.

 

늘어난 박자에 맞추어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는 동안 누군가는 땀을 닦고 누군가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때로는 손을 맞잡은 상대를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음악이 장난을 걸어서 웃음이 나고, 무언가에 심취하여 땀 흘리는 서로의 모습이 아름다워서 웃음이 난다. 아니면 느려진 음악에 스텝을 헛밟아서 민망한 웃음이 새어나오거나. 어떤 연유로든- 잠깐의 여유를 부리며 웃을 수 있는 그 때가 나는 참으로 좋다. Bei mir bist du schon에 맞추어 춤을 출 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이다.

 

그다지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고 심지어는 말 한번 주고 받은 적이 없는데도, 바에서 오랫동안 얼굴을 마주치는 동호회 사람들에게는 일방적인 친근감이 생기는 것 같다. 상대를 속속들이 알지 못해도 무한한 호감과 신뢰를 가지고 대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다. 아마도 춤과 음악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견고하게 만드는 매개가 되어주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스윙에 심취하는 까닭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국 공론장의 구조 변동 - 미디어사상총서 1
손석춘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에서는 한국 근현대 언론의 전개 양상을,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공론화 요구의 내부적인 배제’와 ‘외부 정치 세력에 의한 공론장의 왜곡’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맞물려 갈등하는 형국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구조 속에서 ‘체제 안의 공론장’에 맞선 ‘민중 차원의 저항 공론장’이 억압과 분출의 변증법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 확대되어 왔다고 분석한다. 이상이 5장까지의 내용이며, 내가 주의깊게 읽었던 부분은 하버마스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6장이다.

6장에서 저자는 하버마스의 ‘공론장 구조 변동 이론’을 소개한다. 하버마스는 국가와 사회, 혹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체계’와 ‘생활세계’라는 개념으로 분류하여 각각의 특질을 고찰한다. 그에 따르면, ‘생활세계’가 점차 합리화됨에 따라 ‘체계’ 역시 자체 내적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분화하며 확장해 나간다. 그러나 ‘생활세계’가 합의 도출적 의사소통의 절차를 지향함에 비해, ‘체계’는 신속하고 일방적인 상명하달의 성격을 가지며, 이런 차이 때문에 체계가 점차 생활체계를 침투, 잠식해 들어간다. "목적 합리적 ‘체계의 논리’가 의사소통 절차를 거쳐 합의를 도출해내는 생활세계의 내적 구조를 침탈, 대체함으로써 생활세계의 고유한 특성과 상호이해의 통합적 구조가 붕괴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사회는 빈부격차 심화, 신중상주의정책으로 인한 국가 간섭, 매체의 상업화 등으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공론장이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공론장의 재봉건화).

이 책은 하버마스의 이론을 도입해 한국의 언론 지형을 분석하고 있지만, 하버마스에 대해 생소한 나로서는 하버마스 입문서나 다름 없었다. 논문을 윤색하여 출판한 글에 쉼없이 순우리말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상적이다. 지며리, 밑절이, 시나브로, 허투루, 비금비금 등 문맥에서 떼어놓고 보면 여간 낯선 단어가 아니다. 저자가 소신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순우리말을 채택하고 있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며칠 전에 언니랑 음악회에 갔었다. 포르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의 밤이라는, 여간 해선 외우기 힘든 긴 제목의 음악회였다. 그날 무대에 오른 바이올린 연주자는 예순 살의 정형외과 전문의였고 포르테 피아노를 연주했던 할머니는 아무개 대학의 음대 교수였다. 연주회 팜플렛에는 남매가 한 무대에서 연주하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이라고 씌어있었다.     

바이올린 연주자는 무대에 서 있는 내내 경직된 상태였다. 그는 연주를 쉬는 동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난 땀을 닦곤 했다. 아마도 그는 무대에 선 것이 처음이었을 테고, 어쩌면 그것이 그의 평생의 소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날 바이올린 연주자는 평생의 소원 중 하나를 성취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누구나 생의 전복을 꿈꾸지만 많은 이들이 그저 단편적이고 일면적인 삶을 산다. 그래서 나는 잘 나가는 대기업 간부가 별안간 일식 요리사가 되었다거나, 초등학생 자녀를 둔 평범한 회사원이 직장을 작파한 뒤 가족을 이끌고 세계 여행을 떠났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괜스레 오금이 저린다. 뭐랄까, 우리네 삶의 다원성과 입체성에 대한 어떤 희망적인 가능성을 그들을 통해 엿보게 된다고 해야 할까.    

그날 무대에서 정열적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노년의 정형외과 전문의는- 일식요리사가 된 대기업 간부와 세계여행을 떠난 회사원 못지않게 경이롭고 아름다웠다. 잠시 마음 깊은 곳에서 뭉클한 경외감마저 일었던 것 같다. 연주가 끝나자 객석에서는 우렁찬 갈채가 터져 나왔다. 나도 손바닥이 아프도록 손뼉을 쳤다. 그것은 바이올린 연주자의 인생을 향한 박수였다. Bravo your lif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21 | 22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