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현대의 지성 118
다케우치 요시미 지음, 서광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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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전쟁 당시 소집 명령을 받고 중국 전선으로 떠나기 전 지은이가 유언의 심정으로 남긴 책이라 한다. 중국에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 중국문학 연구자의 운명이란 얼마나 얄궂은가. 삶이 던지는 잔혹한 물음에 응답하기 위한 방편으로 무엇보다 저자 본인을 위해 써내려갔던 책이어서일까. 읽기가 쉽지 않다. 다소 난삽하게 느껴지기마저. 친절한 위인전 같은 걸 기대했다가 예상 밖에 루쉰이라는 한 인간의 심층에 도달하기 위한 지난한 여정으로서의 글쓰기를 만났다. 다양한 각도와 거리에서 이리저리 가늠해 보면서 조심스럽게 수정하고 덧붙여 나가는 조형적 글쓰기. 실마리를 추적해 들어가다 막다른 골목이 나오면 되돌아 나오기도 하는 그런 글쓰기. 그 쉽지 않은 글쓰기를 뒤좇다 보면 서서히 루쉰이라는 인물의 상(像)이 떠오른다.

 

내면 깊은 곳에서의 루쉰은 개인주의자이고 회의주의자였으며, 과감히 말하면 비관주의자요 허무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낡은 사회의 위선을 고발하고 자유에의 갈구를 호소하는 소설을 썼다는 것은 "작가가 작품에서 불거져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처음부터 작품 밖에 서서 작품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루쉰은 애당초 자신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 소설의 세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허무의 심연을 내면에 포함한 고독의 정신이 어떻게 현상으로서 계몽가가 될 수 있었을까.” 여기서 저자는 ‘계몽가 루쉰’을 부단히 생성해내는 근원적 동력으로서 '문학가 루쉰'을 불러낸다.

 

문학가란, 혹은 문학가로서의 자세란 무엇일까. 저자의 언설을 추려보면 그것은 고통을 예민하게 지각하고 그 고통과 쉼 없이 대결하는 삶의 태도를 일컫는다. 이를 위해서는 불편과 고통을 낳는 모든 가치들에 대해 끊임없이 부정하고 저항해야 한다. 결코 머물러서는 안 된다. 루쉰은 그렇게 살았다. 그는 과거의 낡은 가치뿐만 아니라 당대의 모든 진보적 가치들 또한 부정했으며 종국에는 ‘절망이 허망한 것은 바로 희망이 그러함과 같다’는 깨달음을 통해 모든 것에 절망하는 자기 자신마저 부정했다.

 

심층의 기저에 완고한 뼈대를 이루고 있는 무(無)에 대한 근원적 자각에도 불구하고 루쉰은 결국, 자신과 철저하게 대립하는 소설을 써낸다. 그것은 곧 자기반역이자 자기희생이다. 게다가 연후에는 엄정한 자기 추궁 끝에 소설마저도 버려버린다. 그는 그렇게 끊임없는 부정성의 운동 속에서 혼돈과 모순을 살아내었다. ‘사람은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성실한 생활인으로서, ‘쩡짜’적으로 살았다. 저자는 여기서 어떤 순교자적인 에토스를 읽어낸다.

 

다케우치가 그려내는 루쉰은 하나의 육중한 슬픔으로 와 닿는다. 차라리 그것은 강철로 된 무지개 같은 슬픔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 슬픔의 질감과 규모를 머리로밖에 헤아리지 못했다고 적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아직 온전히 가슴으로는 실감하지 못했다고, 그렇게 적는 편이 정직할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나는 얼마나 더 깊어져야 할까. 얼마나 더 깊어질 수 있을까. 이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은 원래 쉽게 읽어버릴 수 없는 책이라야지 옳다. 루쉰이라는 사람의 내면의 내용에 부합하는 타당한 형식으로서, 안개 낀 깊은 숲처럼 그렇게 이루어져 있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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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정치적으로는 차라리 좌우를 초월한 아나키스트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는 민주주의를 비롯한 모든 '정의로운' 근대 정치개념 자체에 회의적이며, 정치적 주장들의 올바름을 논하기보다 그것들 저마다를 하나의 힘으로서 가치평가하고 그 힘을 어떻게 활용할 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국가체제 자체의 붕괴를 전망하는, 어찌 보면 정치적 염세주의자, 견유주의자에 가까워 보인다. <반시대적 고찰>에서 니체가 전망한 이상 국가는 "천재공화국"이었다. 천재공화국이란 아마도 거리에의 파토스를 지닌 천재들로만, 오로지 강자들로만 이루어진, 에고이스트들의 느슨한 연합체 같은 형태가 아닐까. -일주일 전에 쓴 글

 

아니다, 결국 니체는 야만사회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시대착오적 반동주의자일 뿐이다. 정치사상가로서의 니체는 덜 떨어진 미치광이에 불과하다. 니체는 철저히 개인윤리 차원에서만 읽고 치워버려야 할 것이다. 영원회귀에 관해서는 종교적으로 변용하여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만이다. 심리적인, 정신적인, 영적인 차원에서만 효용이 있다. 거기서도 취할 것만 취하는 게 좋겠다. 갈가리 찢어서 젓가락으로 날렵하게 발라먹고 나머지는 개나 줘버리는 게 낫겠다. 헛소리의 일인자. 정서가 불안한 조증 환자의 경박한 정신상태로 인해 출항할 당시부터 이미 인식의 망망대해에서 난파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자. 정신의 무게중심을 찾지 못해 이카루스처럼 추락해버린 자. 깨달았으나 깨달음을 감당할 그릇이 못되었던 자. 위대하지만 나쁜 예. 허세와 자뻑의 제왕. 백년이 지나도록 텍스트로 살아남아 자신이 비난했던 딱 그 유대인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전염시키는 괴물. 철학자가 되고 싶었으나 결국은 너무나 문학적이었던 인간. 그야말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 경멸하고 싶으나 경멸할 수 없는, 열광하고 싶으나 열광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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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에 만원권 지폐를 주웠다. 내 평생 언제 또 이런 큰 돈을 길바닥에서 줍게 될 날이 오련가 싶어 눈시울을 글썽이며 떨리는 손으로 돈을 줍고 있을 때 등 뒤에서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짧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행운이 따랐다면 간발의 차이로 나 대신 만원을 주웠을 어느 중년 여인이 뱉어낸 소리였다. 괄약근 단속을 소홀히 하여 얼떨결에 방출되어버린, 흡사 방귀 같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갑자기 쾌감이 배가되어 한 삼만원 쯤 주운 기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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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1-05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양님 넘 재미나요ㅎㅎ 솔직하게 기뻐하는 심정. 아흑 올해 대박행운의 조짐인거야요.^^

수양 2013-01-05 16:02   좋아요 0 | URL
그런 거라면 프레이야님께도 대박행운을 나눠드릴게요ㅋ

2013-02-24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 뒷사람은 아마 어딘가 블로그에 '간발 차에 의한 불운'을 투덜거리는 페이퍼를 썼을 거예요.

수양 2013-02-25 00:1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마저마저요 그렇겠군요 ㅋㅋㅋ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책세상 니체전집 7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미기 옮김 / 책세상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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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다윈의 자연도태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꼭 그것만이 생태계의 변화를 설명하는 유일한 관점은 아니라고 본다. “퇴화, 불구, 나아가서는 악덕 그리고 신체적 또는 도덕적 결손까지도 다른 한편으로는 때때로 하나의 장점이 되기도”(226) 하는 까닭이다. “예를 들어 더 심하게 병든 인간들은 아마 호전적이고 침착하지 못한 종족 속에서 혼자 있을 계기를 더 많이 가지게 됨으로써 더욱 침착하고 현명해지며, 외눈을 가진 사람은 더욱 강한 한쪽 눈을 가지게 될 것이고, 눈먼 사람은 한층 더 깊이 내부를 보고 어쨌든 더욱 날카롭게 듣게 될 것이다.”

 

약한 것들이라고 해서 마냥 속수무책으로 도태되지는 않는다. 약한 것들은 약한 것 나름으로 변화하고 적응한다. 변화하고 적응하는 개체가 생존하는 데 있어서 전제가 되는 것은 “새로운 것의 감염을 받아들여 장점으로 동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병원균을 접종받은 후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항체를 생산해낼 줄 아는 능력. “운명이 그에게 입힌 상처를 이용”하는 능력. 상처를 통해 “고상”해질 수 있는 능력. 그러고 보면 약하다는 것은 관점주의적이고 일면적인 개념일 뿐, 지금 이 순간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 이런 능력을 생존의 기본 조건으로 갖추고 있는 셈이 아닌가. 그러니까 살아있음이 곧 강함의 명백한 실증적 증거가 아니겠는가. 심장이 뛰고 있는 한, 강하지 못한 생명이란 없는 것이다.

 

진화론과 관련해서 니체는 자연도태설보다는 차라리 용불용설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강자’의 의미를 유추해볼 수 있겠다. 아마도 니체가 말하는 강한 개체라는 것은, 예컨대 백악기 시대의 티라노사우르스 같은 종류는 결코 아닐 것이다. 니체는 아마도, 좀 더 포괄적으로, 자생자활능력을 가지고 제 고유의 개성과 활기와 기쁨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모든 개체를 강한 개체로 여기는 듯하다. 니체가 말하는 천재란, 이러한 표현이 극도로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개체의 경우를 일컫는 것이리라.

 

“만약 (...) 완전한 국가[사회주의 국가]가 실제로 달성되면, 위대한 지성과 대체로 강한 개체가 성장하던 땅은 유복한 삶에 의하여 파괴될 것이다. 나는 위대한 지성과 강한 개체를 강한 활력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러한 완전한 국가가 이루어지면, 인류는 너무나 힘이 빠져 천재를 더 이상 산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삶이 그 강제적인 특성을 유지하고 항상 새로운 것에 의하여 격렬한 힘과 활력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따뜻하고 동정적인 마음은 삶의 강제적이고 격렬한 성격을 제거하고자 한다. (...) 가장 따뜻한 마음은 자기 기초가 제거되기를, 자기 자신이 파멸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 마음은 비논리적인 그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현명하지 못하다.” -p.236

 

니체는 사회주의자들을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했지만, 시장자유주의자를 비난하는 데도 위와 동일한 논리를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근본적으로 수치화할 수 없는 가치들이 자본의 강압적 폭력에 의해 물질적 척도로 환산되어 갈수록, 자유경쟁 속에서 독점시장이 비대해져 갈수록, 비교불가한 고유의 개성을 자랑하던 개체들은 점차 그 활력이 감소할 것이며, 소수성과 다양성은 위축되고, 그 결과 ‘위대한 지성과 강한 개체들이 성장하던 땅’은 자본의 수탈구조 속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황폐화될 것이다. 니체는 사회주의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는 “따뜻하고 동정적인 마음”이 삶의 격렬한 성격을 제거해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의 파멸을 자초하고 있다고 일갈하지만, 자본주의의 미덕인 자유경쟁 역시 공동체의 다채로운 존재방식을 파괴함으로써 '삶의 격렬한 성격'을 고갈시키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파멸을 자초하는 화근이 될 요소이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니체가 비난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사회주의라기보다는 국가체제가 되었든 시장질서가 되었든 개체를 통제하고 표준화시키고 순응화, 획일화시키는 모든 구조적 강제력 그 자체라고 봐야 하겠다. “국가란 개인을 서로서로 보호하게 하려는 현명한 실행이다. 만약 국가가 지나치게 고상해진다면, 개인은 결국 국가에 의해 약화되고 해체된다. 즉 국가의 근본적인 목적이 가장 철저하게 무효화된다.”(237) 여기서 말하는 국가 역시 꼭 사회주의국가로 국한하여 생각하기보다는 모든 사회적 질서와 체제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이는 편이 옳겠다. 어떤 사회 체제든 그것이 지나치게 고도화되고 정교해질수록 개체의 자유정신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모순과 모호함으로 점철된 니체를 관통함으로써 우리는 니체를 이해하게 되기보다 도리어 우리 자신의 내적 지향과 마주하게 된다. 언젠가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뉴라이트식 독법으로 니체를 해석해놓은 글을 읽고 식겁한 적이 있다. 아무리 니체가 우리의 내적 풍경을 정치하게 보여준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해석은 해석의 마지노선을 넘어선 오독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자연도태설을 불완전한 이론으로 보는 니체의 견해가 그 명쾌한 반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정치적으로는 차라리 좌우를 초월한 아나키스트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는 민주주의를 비롯한 모든 '정의로운' 근대 정치개념 자체에 회의적이며, 정치적 주장들의 올바름을 논하기보다 그것들 저마다를 하나의 힘으로서 가치평가하고 그 힘을 어떻게 활용할 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국가체제 자체의 붕괴를 전망하는, 어찌 보면 정치적 염세주의자, 견유주의자에 가까워 보인다. <반시대적 고찰>에서 니체가 전망한 이상 국가는 "천재공화국"이었다. 천재공화국이란 아마도 거리에의 파토스를 지닌 강자들로 이루어진, 에고이스트들의 느슨한 연합체 같은 형태가 아닐까 싶다. 그런 니체를 뉴라이트식으로 이해한다면, 그건 니체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도용한 것이리라. 이 또한 내가 니체를 통해 바라본 내 얼굴에 불과한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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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2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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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조선이란 나라는 덕치를 치세의 모범으로 여겼지만, 그 전성기는 정작 영조와 정조 같이 마키아벨리적인 군주들에 의해 구가되었다. 역사가 역설적으로 말해주듯이 조선 사회에서 유교적 가치란, 끊임없이 칭송되면서도 정작 그 존재는 좀처럼 증명되지 않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의상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근대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가 그렇듯이. (명쾌하게도 니체는 그런 것들을 '사랑스런 허영심'이라 불렀다.)

 

존재하지 않는 의상을 실재하게 만드는 것은 제스처다. 마치 옷을 입고 있는 듯이, 지금 여기 소매에 달린 레이스가 몹시도 거추장스러운 듯이 행동하는 과장된 제스처. 이 책에서 예를 들면, 정조가 대신들 앞에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떠올리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지극히 효성스런 제스처. 그러니까, 중요한 건 제스처다. 허구를 기능하게 만듦으로써 더 이상 허구를 허구가 아니게 하기 때문에. 이때의 제스처라는 것은, ‘허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구하는’ 시지푸스 식의 비장한 류와는 좀 다른 것 같다. 추구함으로서 비로소 허망한 걸 허망하지 않게 만드는 거니까. 

 

덧_

이 책을 읽어봐도 역시 이덕일은 역사학계의 황우석인 듯. 학계의 자정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인 듯. 어쨌든 그의 책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어떻게 의심을 할 수가 있을까!)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독자로서는 뒤통수 맞은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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