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철학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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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러 종류의 허무주의가 있다. 먼저 ①부정적 허무주의: 초감각적 세계의 관념, 삶보다 우월한 가치들의 관념이라는 허구를 창안함으로써 삶 전부를 무가치한 것으로, 외관에 불과한 것으로 비하함. 삶보다 우월한 것으로 창안된 허구적 가치들 속에서 의지가 없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바로 거기에 강력한 ‘무(無)의 의지’가 관철되고 있음. 권력의지를 부정하는 바로 그 의지.

 

②반응적 허무주의는 부정적 허무주의가 대체된 혹은 연장된 형태이다. 반응적 허무주의는 부정적 허무주의에서 창안된 허구적 가치들조차 부정한다. 현실보다 우월한 가치들 자체의 가치 박탈. 신, 선, 진리, 모든 형태의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부정. 모든 의지의 부정(부정적 허무주의가 반응적 허무주의로 나아가도록 이끈 동력이었던 무의 의지조차 부정, 무의 의지와의 동맹의 결렬). 삶의 혐오. 나약성의 비관주의. 신의 살해자.

 

2 반응적 허무주의 속에서 신은 죽었다. 어떻게? 연민으로 질식해 죽었다. 연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영(zero)에 근접하는 삶의 상태에 대한 관용, 다시 말해 약하고 병들고 반응적인 삶에 대한 사랑이다. 소위 반응적 삶만을 감내하는 자, 반응적 삶의 승리를 필요로 하는 자, 삶 속에서 적극적인 모든 것을 증오하는 자만이 연민을 느낀다. 허무주의의 실천으로서의 연민. 한마디로 신이 반응적 삶에 감염되어버린 것이다. 감염되어 연민하다 질식해서 죽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신이 죽은 자리는 여전히 비어있다. 반응적 인간이 바로 그 빈자리를 꿰찬다. 그리고는 진화, 진보, 만인의 행복, 공동체의 선, 개혁, 자유사상,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등 그의 고유한 가치를 파급시킨다. 신이 죽고 천국도 없어졌지만 그에 버금가는 또 다른 허구적 진리들이 양산된다. 신 대신에 도덕적 인간, 진실한 인간, 사회적 인간이 등장한다.

 

마지막 단계로서 차라리 고귀하기까지 한 일종의 불교적 상태인 ③수동적 허무주의가 있다. 수동적 허무주의는 반응적 허무주의의 극단적 완성으로, 모든 허무주의의 최종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밖으로 인도되기보다는 오히려 수동적으로 소멸하는 것이다. 무의 의지가 아니라 의지의 무. 신의 살해자의 자손인 수동적 허무주의의 인간은 이제는 죽기에도 너무나 지쳐버린 최후의 인간이다. 극도로 지친 삶은 수동적으로 꺼지듯 소멸을 바란다.

 

3 신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유대적인 증오의 신에서 기독교적 사랑의 신으로 거듭난다. 포악했던 구약의 신 대신 사랑을 설파하는 온화한 신의 탄생. 사랑의 신의 탄생과 더불어 반응적 삶에 대한 사랑이 시작된다. 이때 바울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을 독점하고 기독교를 구성하는 해석을 제공한다. 바울의 해석에 따르면 예수가 빚 많은 채무자인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니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에 대하여 영원한 죄의식(가책)을 가져야 한다. 영원히 죄의식과 부채의식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이렇게 증오가 사랑으로 은폐되는(=무의 의지가 좀 더 유혹적이고도 세련된 형태로 나타나는), 원한에서 가책으로 방향전환이 되는 길목에 신의 죽음이 있다.

 

그러나 예수 그 자신은 사실 또 하나의 부처였다. 허무주의의의 최종형인 수동적 허무주의, 그 고귀하기까지 한 수동적 허무주의를 체현한 자였다. 그의 죽음은 반응적 삶에서 침착하게 죽는 법을, 수동적으로 스스로 소멸하는 법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에게 죽는 법을 가르쳤다. 그는 가장 흥미롭고 가장 유순한 타락자였다. 그는 불교도였다.

 

4 니체 저작은 세 가지 방식으로 변증법을 반대한다. ①변증법은 구체적으로 현상들을 소유하는 힘들의 본성에 무지하기 때문에 현상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또 그것은 ②힘들, 그것들의 성질들, 그것들의 관계들이 파생하는 현실적 요소에 무지하기 때문에 본질을 알지 못한다. 게다가 그것은 ③추상적이고 비현실적 항들 사이에서의 교대, 이를테면 신학적 가치에서 휴머니즘적 가치로, 신에서 인간으로, 그렇게 신의 빈자리에 계속해서 다른 것들을 앉히는 그 끊임없는 바꿔치기를 행하는 데 만족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변화와 변형을 알지 못한다. 이 모든 불충분성은 동일한 기원을 갖는다. 즉 변증법은 ‘누가?’라는 의문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 때문에 변증법은 해석에 실패하고 언제나 징후들의 영역을 뛰어넘지 못한다.

 

5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는 중세에 와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말씀으로 변형되고, 칸트에게서는 도덕적인 정언명법이나 양심의 소리로 변형된다. 헤겔에게서는 절대정신으로 변형되고, 포이어바흐에게서는 보편 인류로, 마르크스에게서는 민중 혹은 프롤레타리아로 변형된다. 기독교의 피안을 대신하여 이상적인 시민사회, 공산주의 사회가 등장한다. 예전에 신의 이름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단죄되고 자신을 학대하고 죄책감에 시달렸듯이 근대에는 도래할 이상사회와 인류와 민중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단죄되고 억압되고 학살된다. 이 모든 변주는 바로 변증법적 운동의 양상이다. 변증법은 소외→소외의 제거→소외의 재점유로 작동한다. 격파되어야 할 가치들이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경건하게 보존된다. 가치들이 포장만 바뀐 채 끝없이 회수된다. 

 

6 니체는 끊임없이 독일 철학의 신학적이고 기독교적인 특징, 신을 죽인 뒤에도 여전히 자아와 인간과 거대 관념들 이외에 그 어떤 것에도 도달할 수 없는 철학의 무능함, 변증법적 변형들의 기만적 특징에 대해 비난한다. 헤겔, 포이어바흐, 슈티르너에 이르기까지 독일 변증법 철학자들을 열렬히 비난한 끝에 니체가 들고 나온 것은 초인과 가치전환이다. 초인의 관심은 무엇이 신의 자리를 대체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러한 연쇄적 자리바꿈의 패턴을 극복할 것인지, 반응적 힘들이 가면을 바꿔써가며 끝없이 보존되고 전승되는 이 고질적인 시스템 자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이다.

 

그러나 니체의 초인이 변증법적 인간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한 인간인 것은 아니다. 그는 본성상 인간과 다르고, 자아와도 다르다. 초인은 새로운 감각 방식에 의해서 정의된다. 인간과는 다른 주체이고 인간적 유형과는 다른 유형이다. 그는 새로운 사유 방식을 보여주는 자이다. 초인의 새로운 사유방식, 새로운 평가 방식은 바로 가치전환이다. 가치전환이란 가치들의 변화도, 추상적 교대나 변증법적 전복도 아니라, 가치들의 가치가 파생하는 요소 속에서의 변화와 전복을 말한다. 힘에의 의지의 성질 그 자체의 전복. 노예적인 권력의지에서 강자적인 권력의지로의 전복. 심층 해류 자체의 변화. 세상을 다르게 보기 위해서는 안경의 색깔을 바꿀 것이 아니라, 관점 자체를 변화시켜야 하는 것처럼.

 

7 니체는 차라투스트라 4부에서 우월한 인간들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우월한 인간이란 반응적 인간이며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이다. 니체가 묘사한 갖가지 인간 군상들은 공통적으로 두 측면을 갖는다. 즉 인간은 ①반응적 힘과 그것들의 승리의 대표자인 동시에 ②종적(種的) 활동(문화적 활동)과 그것의 산물의 대표자다. 차라투스트라의 적이면서 또한 동료이기도 한, 우월한 인간의 이중적 측면. 니체는 이렇게 갖가지 반응적 인간 군상들을 묘사하면서 반응적인 힘들의 승리를 인간과 역사 속에서 필연적이고도 본질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다시 말해 원한과 가책은 심리가 아니라 인간의 인간성을 구성한다. 그리고 허무주의는 역사의 한 국면이 아니라, 보편사의 선험적 개념이다. 반응적 힘들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원한, 가책, 허무주의 이 모든 요소 자체가 바로 인간이기 위한 조건, 인간으로서의 조건인 것.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본질 자체가 질병이다. 따라서 허무주의를 정복하는 것, 즉 사유를 가책과 원한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인간을 극복하고 인간을 파괴하며 가장 선한 인간조차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의 비판은 인간의 본질 자체에 도전한다.

 

8 그런데 인간은 본질적으로 반응적인가?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 훨씬 더 심오하다. 힘들이나 그 힘들의 성질보다 더 심오하게 힘들의 생성이나 권력의지의 성질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힘들의 유형만이 아니라 ‘힘들의 생성’이기도 하다. 강자는 약자들에는 대립할 수 있지만, 정작 자신 안에서 나오는 약한 생성 혹은 반응적 생성에는 대립할 수 없다. (왜? 자기 자신의 것이니까) 

 

이론적 인간에 의해 전복된 그리스 세계, 유대에 의해 전복된 로마, 종교개혁에 의해 전복된 르네상스처럼 적극적 인간들에게는 이렇게 반응적 생성이 운명처럼 약속되어 있다. 종적 활동이 있지만 그것은 반응적 힘들에 의해 금방 반응적 생성으로 전환된다. 사람들은 그저 가치들을 전복시키는 대신에 가치들을 바꾸고, 그것들을 교대시킬 뿐이다. 그것들이 파생되는 허무주의적 관점을 지키면서 말이다. 물론, 인간의 적극적 힘들은 분명 존재한다. "인간사조차 적극적인 시기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모든 힘들의 반응적 생성의 자양분이 되고 만다. 우월한 인간이 두 측면을 갖는 건 이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왜 종적 활동은 대부분 반응적 힘들에 의해서 반응적 생성으로 전환되어버리는가. 종적활동은 왜 결국 실패하고 마는가. 적극적 힘이 부정의 의지에 의해 인도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적극적 힘이 반응적으로 오염, 변질, 전락하지 않으려면, 적극적 힘의 우월성을 담지해낼 수 있는 성질, 바로 ‘긍정하는 의지’가 요구된다. 무의 의지에 의해서만 반응적 생성이 존재하듯이, 긍정하는 의지에 의해서만 적극적 생성이 존재한다. 긍정하는 힘에까지 고양되지 않는 활동, 부정의 노동에만 기대는 활동은 실패가 약속되어 있을 뿐이다. 긍정하는 의지라고 하는 바로 이 긍정의 요소야말로 인간에게 결여된 것이고, 초인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니체가 인간에 결여된 그 긍정을 표현하는 네 가지 방식이 있다. 우선 웃음과 놀이와 춤. 웃음은 삶을 그 고통 속에서조차 긍정하는 것이다. 놀이는 우연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춤은 생성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음.

 

9 허무주의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가치들의 가치가 파생되는 요소들을, 가치들의 가치 자체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무의 의지의 개종이 바로 변화의 개시점이다. 균형이나 화해가 아니라 개종, 전환, 회심. 임계점에 도달한 후 일거에 이루어지는, 갑작스럽고 극적인, 혁명에 가까운 어떤 형질 변환.

 

수동적 허무주의의 인간, 최후의 인간이 허무주의의 극단에 도달하면 이제 그는 멸망하길 원하는 인간이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파괴하고자 한다. 이 적극적 파괴는 무의 의지의 변환의 지점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완성된 허무주의=전환의 지점. 허무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은 곧 허무주의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파괴는 ‘반응적 힘들’과 ‘무의 의지’ 사이의 동맹이 결렬될 때 후자가 개종하고, 긍정의 편으로 가면서 반응적 힘들 자체를 파괴하는 ‘긍정하는 힘’과 관계 맺는 순간에 적극적이 된다. 파괴는 부정이 긍정적인 힘으로 전환되고, 개종됨에 따라 적극적이 된다. 어떤 순간에 나타나는 ‘생성의 영원한 기쁨’, ‘무화의 기쁨’, ‘무화와 파괴의 긍정’이 바로 디오니소스적 철학의 결정적 지점이다.

 

10 가치전환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①권력의지 속의 성질의 변화. 가치들의 가치는 더 이상 부정이 아니라 긍정에서 파생된다. ②권력의지 속에서 ‘인식 이유’의 ‘존재 이유’로의 이행. ③권력의지 속에서의 요소의 개종. ④권력의지 속에서의 긍정의 군림. 긍정만이 독립적인 힘으로 존속한다. ⑤알려진 가치들에 대한 비판.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가치들은 그 가치를 상실한다.

 

11 긍정과 부정의 관계: 긍정과 부정은 권력의지의 두 성질, 권력의지 속의 두 이유로서 서로 대립한다. 한편 부정과 긍정은 원인과 결과로서 이어져 있기도 하다. “자기 자신만큼 어마어마하고 무제한적인 부정이 직접적으로 뒤따르지 않는 긍정은 없다.” 마찬가지로 긍정이 뒤따르지 않는 부정도 없다. 부정은 긍정과 대립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서로가 서로의 직접적인 결과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반례로 나귀의 경우를 보자. 나귀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긍정할 수도 없다. 나귀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의욕이 없다. 나귀의 긍정은 거짓된 긍정일 뿐이다. 긍정이 아니라, ‘무거움을 견디고 감당하는 것’일 뿐이다. 짊어지기에 무거운 것이 원래 삶이기라도 한 듯이 나귀는 짐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현실을 예찬한다. 인간 역시 신을 대신하면서 모든 가치들을 스스로 짊어진다. 국가든 교회든 모든 것들을 자신의 등 위에 올려둔다. 모든 도덕에 대한 수락. 무게가 나가는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고, 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긍정이고, 모든 것이 현실적이고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동의, 복종, 수락, 자족, 인내로서의 긍정. 나귀의 긍정은 삶을 부정의 노동에 종속시키고, 삶에 가장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 삶을 반응적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이러한 나귀의 거짓된 긍정은 곧 인간을 보존하는 방식에 속한다.

 

세계는 참되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지만, 살아 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세계는 권력의지이며, 다양한 힘들 아래서 실현되는 거짓의 의지이다. 어떤 힘 아래서든지 거짓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은 항상 평가하는 것이다. 사는 것은 평가하는 것이다. 사유 세계의 진리도, 감각 세계의 현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 진리, 현실 자체는 평가로서만, 말하자면 거짓말로서만 가치가 있다.

 

지금까지 해왔던 우리의 모든 평가들, 그 평가하는 힘에 깃들어있던 의지는 삶을 삶에 대립시키고 삶을 총체적으로 부정하게 만든 “권력의지의 성질로서의 부정”의 의지였다. 평가하는 힘들이 이제까지는 부정의 의지에 봉사해왔던 것. 그러나 삶이 긍정되고 적극적인 것으로 변하는 것은 거짓의 고귀한 힘, 바로 긍정으로서의 권력의지이다. 긍정도 물론 평가다. 그러나 이 평가는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의 차이를 향유하는 의지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긍정은 존재의 짐을 떠맡거나 현실에 책임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해방시키고 짐을 더는 것이다. 삶의 가치들인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긍정은 삶을 가볍고 경쾌하고 적극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이 인간에게는 부재하다. 인간은 자신이 갈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지점에서 부정을 긍정의 힘으로 고양시킨다. 한마디로 인간은 극적인 전환까지만 가능하다. 그러나 긍정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중의 긍정=디오니소스의 긍정)은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니체의 긍정은 ①진리나 현실이 아니고 평가(관점주의적 해석)이며, ②수락으로서의 긍정이 아니라 창조로서의 긍정이며, ③인간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형태로서의 초인이다. 

 

12 긍정의 본질은 차이이다. 부정이 대립의 고통이자 노동이라면, 긍정은 차이와 향유의 놀이이다. 긍정은 처음에 다수, 생성, 우연으로 상정된다. 다수는 어떤 것과 다른 것의 차이이고, 생성은 자신과의 차이이며, 우연은 모두의 사이에서의 차이 혹은 분배적 차이이다.

 

13 영원회귀는 부정의 회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영원회귀는 존재가 ‘선별’임을 의미한다. 긍정하거나 긍정되는 것만이 되돌아온다. 영원회귀는 ‘생성의 재생산’이면서 ‘적극적 생성의 생산’이다. 어떤 것도 부정을 포함하지 않는 생성. 차이야말로 순수긍정이다. 니체는 차이를 부정하고 차이를 의식의 불행으로 만들며 우연을 제거하려는 모든 철학적 신비화를 비판한다. 차이는 행복이며, 우연은 기쁨의 대상이고, 그 기쁨은 ‘되돌아온다는 것’에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기존에 통용되던 모든 가치들의 파괴자라는 점에서 반응적 인간을 넘어선다. 그는 최후의 인간(=반응적 생성의 최후의 산물, 반응적 인간이 의욕하기에 지쳐서 자신을 보존하는 최후의 방식) 또한 넘어선다. 그는 멸망하길 원하는 인간이며 몰락하길 원하는 인간이며 극복되길 원하는 인간이다. 그는 긍정이며, 인간을 멸망하고 몰락하기를 원하는 적극적 존재로 만드는 힘으로서 긍정의 정신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영원회귀와 초인과 관련해서는 아직 열등한 위치를 갖는다. 영원회귀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그는 그 소식을 전달하길 주저하는 선지자다. 초인의 아버지이며, 최후의 변신이 부족한 사자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긍정은 아직 가장 심오한 긍정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를 ‘결심’하는 반면에 디오니소스의 결심은 다른 본성에 속한다. 차라투스트라와 디오니소스의 계보는 일치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의 춤은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웃음은 고통을 기쁨으로, 주사위놀이는 저속함을 고귀함으로 전환시킨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의 춤은 생성과 존재의 생성을 긍정하고, 웃음과 폭소는 다수와 다수의 하나를 긍정하며, 놀이는 우연과 우연의 필연을 긍정한다. 존재론으로서의 디오니소스와 윤리론으로서의 차라투스트라. 전환의 지점에 있는 차라투스트라와 긍정을 긍정하는 이중의 긍정 속에 있는 디오니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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