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철학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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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수과학을 포함하는 근대 이후 모든 인간과학에서 과학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행동과 적극적인 모든 것에 대해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행동을 실리에 의해서 판단한다. 저러한 행동은 (사회 전체를 위해) 유용한가 유해한가. 행동의 동기는 무엇이고 결과는 무엇인가. 그런데 이렇게 제3자적 입장에서 (마치 객관적인 파악이 가능하다는 듯이) 실리를 따지는 태도 자체가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것. 그는 자신이 시도하지 않는 바로 그 이유에서 그가 시도하지 않는 행동을 주시한다. 행동하지 않는 그는 그 행동에 대한 자연권을 소유하고 있고, 그는 그것의 이득이나 이익을 이용하거나 거둬들일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떤 힘과 힘의 의지를 파악하려면 언제나 그 힘이 발휘되고 있는 당사자, 즉 행위자, 화자, 독점한 자, 명명한 자 등등의 입장에서 살펴야지 제3자의 관점으로 보면 안 된다. 제3자의 관점으로 보니까 왜곡이 생기는 것임. 반응적이고 수동적인 기존의 과학을 비판하며 니체가 주창하는 적극적인 과학(=미래의 철학)의 3과지 분과는 징후학, 유형학, 계보학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징후들을 해석하는 의사이자 새로운 유형을 창조하는 예술가이자 새로운 계보를 정립하는 입법자가 되어야 한다.

 

2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형이상학자들은 가령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그것은 무식한 질문이다. 그렇게 묻는 대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묻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누가’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어떤 사물이 고려되었을 때, ‘그것을 탈취하는 힘들이 무엇이고, 그것을 소유하는 의지는 무엇인가’를 묻는 것. ‘누가 그 속에서 표현되고, 표명되고, 자신을 숨기기조차 하는지’를 묻는 것. 우리는 ‘누가?’라는 의문에 의해서만 비로소 본질로 인도된다. 왜냐하면 본질은 단지 사물의 의미와 가치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누가'에 초점을 맞추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물을 때,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그 사물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지를 묻는 것이다. 무엇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들은 무엇이고, 그 힘들에 복종하는 힘들은 무엇인가. 혹은 그와 반대로 누가 그것에 저항하는가. 현상 파악에 있어서 이것은 관점주의적이고 복수주의적인 기술이다. 한 사물의 본질은 그것을 소유하고 그 속에서 표현되는 힘 속에서 발견되고, 그 힘과 유사한 힘들 속에서 발전되며, 그것에 대립하고 우월할 수 있는 힘들에 의해서 위태롭게 되거나 파괴된다.

 

3 우리가 질문의 방식을 전환하여 현상의 이면에서 현상을 만들어내는 의지에 초점을 맞춘다고 할 때, 여기서 의지들이 원하는 것은 특정 대상이나 목표, 목적이 아니다. 대상, 목표, 목적, 동기 이런 것들 역시 모두 징후적인 어떤 것들일 뿐. 그렇다면 하나의 의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차이를 긍정하거나 혹은 반대로 자신과 차이 나는 것을 부인하는, 바로 그 의지 자체의 성질이다. 의지가 원하는 것은 항상 자기 자신의 고유한 성질, 상응하는 힘들의 성질이다. 자기가 지닌 힘의 성질의 심화, 자기로부터 비롯하는 힘의 성질의 지속과 강화, 힘의 어떤 성질, 유형, 경향성의 심화. 이것이 바로 의지가 원하는 것.

 

반응성과 수동성은 인간과학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러한 성질 자체가 곧 인간이 보여주는 힘의 유형이다. 반응적 힘들의 승리가 인간을 구성한다. 인간 자체가 반응적임. 계보학, 유형학, 징후학의 방법으로 우리가 힘의 성질에 주목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목적은 인간을 구성하는 기존의 힘의 유형 외에 또 다른 새로운 힘의 유형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힘들의 유형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비인간적이며 초인간적인 것이다. 대지를 긍정할 수 있는 의지이며, 그 자체로 대지의 성질인 그것은 바로 ‘가벼움’이다.

 

4 니체 이전에 권력의지나 유사한 것에 대해서 언급한 철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니체 이전의 의지철학은 몇 가지 오해를 함축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니체 이전의 철학자들은 권력을 그저 하나의 표상의 대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홉스, 헤겔, 아들러의 철학에서 보여지는 권력은 항상 실질적으로 의식들의 비교를 가정하는 표상의 대상, 재인식의 대상이다. 투쟁해서 빼앗고 탈취하고 과시하고 인정받고 비교하는 대상으로서의 권력. 우월감이나 열등감, 허영심을 자아내는 권력.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을 전제해야 하는 이런 종류의 권력은 노예가 자기 자신에게 만들어주는 권력의 표상일 따름이다. 노예만이 이러한 권력 개념을 상상할 수 있다. 왜냐면 노예만이 항상 타인(주인)을 의식하기 때문에.

 

권력을 표상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면, 권력의지라는 건 기존의 사회 내에서 현행하는 가치들, 이미 인정된 가치들(돈, 명예, 권력, 명성)에 자신을 결부시키는 의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거야말로 순응주의다.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권력의지에 대한 완벽한 몰이해를 보여주는. 

 

표상의 대상으로서의 권력 개념은 필연적으로 기존의 가치를 서로 탈취하기 위한 투쟁을 상정한다. 그러나 기존의 가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투쟁, 전쟁, 경쟁 이런 것들은 니체의 의지철학에서는 낯선 개념일 뿐이다. 이런 식의 투쟁과 전쟁과 경쟁은 결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않는다. 이때의 투쟁은 그저 약자들이 강자들을 이기는 수단에 불과하며, 그것이 창조하는 유일한 가치들은 승리하는 노예들의 가치들일 뿐이다. 니체는 투쟁을 배제한 권력의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5 권력의지를 표상의 대상으로서 바라보게 되면 그것은 필히 전쟁과 투쟁을 상정하게 되고 그 결과 권력의지를 탐구하면 할수록 비통해진다. 의지라는 것은 점점 더 참기 어렵고 견디기 힘든 무엇이 된다. 또한 권력의지 자체가 굉장히 가상적이고 비현실적인 허상으로 여겨지게 된다. 결국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에게 의지는 부인하고 제거되어야 할 어떤 것이 되고 만다. 허무주의, 염세 철학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6 권력의지는 완전히 다르게 해석되어야만 한다. 권력은 의지 속에서 원하는 것이다. 권력은 의지 속에서 기원적이고 미분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권력의지는 본질적으로 창조적이다. (허무주의적 해석술을 고안해내는 약자들의 권력의지조차도 얼마나 창조적 작업인가) 그것은 결코 표상되지 않고, 결코 해석되거나 평가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해석하는 것이고, 평가하는 것이며,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소위 기원적 요소에서 파생된 것을 원한다. 기원적 요소(권력)는 힘과 힘의 관계를 결정하고 관계 속에서 힘들에게 성질을 부여한다. 조형적 요소인 그것은 그가 결정함과 동시에 자신을 결정하고 그가 성질을 부여함과 동시에 자신의 성질을 부여한다.

 

권력의지가 원하는 것은 그 같은 힘의 관계이고, 그 같은 힘들의 성질이다. 그리고 또 그 같은 권력의 성질이다. 즉 긍정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매 경우에 있어 변화하는 그 복합체는 주어진 현상들이 상응하는 하나의 유형이다. 모든 현상은 힘들의 관계들, 힘들과 권력의 성질들, 그 성질들의 뉘앙스들, 요컨대 힘들과 의욕의 어떤 유형이다.

 

권력은 의지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움직이고 변화하며 조형적인) 어떤 것이며, 권력은 뭔가를 욕망하는 게 아니라 주는 것, 부여하는 것이다. 의미와 가치를 제공하는 것. 이것이 권력의지다. 권력의지는 조형적이고 그것이 자신을 결정하는 매 경우에서 분리될 수 없다. 영원회귀가 존재이지만 생성으로 자신을 긍정하는 존재인 것처럼, 권력의지도 하나이지만, 다수에서 긍정되는 하나이다. 그것의 통일은 다수의 통일이고, 다수에 의해서만 언급된다. 권력의지의 일원론은 복수적 유형론과 분리될 수 없다.

 

고귀하고 우아한 힘의 유형이 있고, 저속하고 비루한 힘의 유형이 있다. 사람들은 왜 전자가 후자보다 더 가치로운지 물을 것이다. 긍정은 왜 부정보다 가치로운가. 해답은 영원회귀의 시련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즉 되돌아오는 것, 되돌아옴을 견디는 것, 되돌아오길 원하는 것이 보다 더 가치롭고, 절대적으로 가치롭다. 영원회귀의 시련은 부정적이고 반응적인 힘들이 살아남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2장 말미에서 했던 얘기. 영원회귀의 지속적인 운동 속에서 어떤 원심력이 작용하여 부정적인 것들은 죄다 떨어져 나가고 필연적으로 긍정적인 것만 잔존함. 이것이 긍정의 긍정, 이중의 긍정이라는 영원회귀의 원리) 

 

7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은 첫 번째로 원한, 두 번째로는 가책, 마지막으로 금욕적 이상을 다룬다. 원한, 가책, 금욕적 이상 모두 반응적 힘들의 승리의 모습이고, 또 허무주의적 형태들이다. 니체는 원한을 가상적 복수, 본질적으로는 정신적인 제재로서 제시한다. 또한 원한의 구성은 오류 추리를 함축한다. 즉, 못한 것을 가지고 '할 수 있었는데 안 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 혹은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가지고 '안 할 수도 있었는데 해버린 것'이라고 여기는 것. 원한이 있기 때문에 그 짝패로서 가책이 생긴다. 그리고 이 삼단논법은 금욕적 이상으로 완결된다. 금욕적 이상이야말로 가장 심오한 신비화를 이루는 관념이다. 영혼의 오류추리 속에서 원한이 생겨나고, 원한 속에서 세계는 전도되어 도덕과 삶이 대립을 이루게 되고, 그러한 이율배반의 사태 속에서 가책이 생겨나고, 이 모든 부정적 허구들을 수용하는 방식으로서 금욕적 이상이 도출된다.

 

8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종래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에 비판을 가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공손한 비판이었다. 그는 자신이 비판하는 것들을 믿으면서 그것들을 비판한다. 인식과 도덕과 종교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참된 인식과 참된 도덕과 참된 종교라는 성역을 남겨둔다. 칸트의 비판은 그런 가치들을 변호하고 정당화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반면에 니체가 덕을 고발할 때, 그가 고발하는 것은 허위의 덕도 아니고, 덕을 가면으로 이용하는 것도 아니다. 니체는 바로 본래적인 덕 그 자체에 대해 고발한다. 참된 덕의 빈약함, 참된 도덕의 믿기 어려운 편협함, 참된 가치들의 저속함에 대한 비판. 우리가 상정하는 모든 참된 가치들이란 관점주의에 따른 것일 뿐이다. 사실이나 도덕적 현상은 없고, 현상들의 도덕적 해석만이 존재한다. 인식 자체는 하나의 환상이며, 인식은 오류이고, 설상가상으로 왜곡이다. 저 진리의 참된 세계에 비할 때 이 삶은 가상과 오류투성이의 세계가 되겠지만, 사실 저 진리의 세계야말로 이 ‘가상세계’에 덧붙여 날조된 것에 불과하다.

 

9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비판이 이성 자체에 의한 이성 비판이어야만 한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이는 모순이다. 이성을 재판관이자 동시에 피고로 만드는 것이므로. 그가 말한 인간의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그런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초험철학은 우리가 인식한 것들의 내적 기원의 원리가 아니라 단순히 인식 조건의 원리일 뿐이다. 이성이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따라야 할 여러 범주들과 절차들에 불과한 것이다. 이성 자체의 기원은 따로 있다. 이성 속에 숨겨진 것, 이성 뒤에 버티고 선 것은 이성이 아니라 어떤 의지다. 권력의지라는 니체의 원리는 칸트적인 초험적 원리가 아니다. 기원적이고 계보학적인 원리, 입법적 원리로서 권력의지만이 진정한 내재적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오성)의 올바른 사용법을 깨달으면 참된 가치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가능하단 식으로 말하지만 그것은 결국 기존의 가치들에 대한 복종에 불과하다. 이성을 벗어난 영역에 대해서는 마음의 필요, 도덕, 의무를 끌어들이며 역시 복종을 강요한다. 그의 비판철학은 부활한 신학, 프로테스탄트적 취향을 가진 신학 이외의 다른 그 무엇도 아니다. 칸트의 철학은 현행 가치들을 내재화하도록 만들 따름이다. 칸트에게서 능력들의 올바른 사용이란 이상하게도 그 기존의 가치들, 즉 참된 인식, 참된 도덕, 참된 종교 등에 맞물린다.

 

10 칸트와 대비되는 니체의 비판철학은 다섯 가지 점에서 근거한다. ①니체의 비판철학은 사실들을 위한 단순한 조건인 초험적 원리들이 아니라 믿음∙해석∙평가들의 의미와 가치를 설명하는 기원적이고 조형적인 원리들이다. ②니체의 비판철학은 이성에 복종하는 사유가 아니라 이성에 반대해서 사유하는 사유이다. ③칸트가 기존의 가치들의 재분배를 감시하는 재판정의 법관, 평화의 법관이라면, 니체는 전쟁을 예고하는 계보학자이다. ④니체의 비판철학은 정신이나 이성, 자의식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니체가 취하는 비판적 심급은 권력의지다. 니체의 비판적 관점은 권력의지의 그것이다. ⑤니체의 비판의 최종목적은 초인, 극복되고 추월된 인간에 있다. 비판에서는 (기존의 가치를) 정당화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르게 느끼는 것, 즉 다른 감성이 문제이다.

 

11 진리를 추구하는 의지의 기원을 추적해보자. 진리의 개념은 어떤 세계를 참된 것으로 규정한다. 참된 세계를 지시하는 참된 인간, 그는 속임 당하길 원치 않는다. 속임 당하길 원치 않는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삶이란 곧 길을 잃게 하고 속이고 감추고 현혹시키고 눈멀게 하는 어떤 것임을 전제한다. 그렇다, 이것은 삶이 가진 고귀한 거짓의 힘이다. 그런데 진리를 원하는 자는 이 고귀한 거짓의 힘을 비하하길 원한다. 그는 삶을 하나의 오류로, 세계를 하나의 외관으로 만들어서 삶에 인식을 대립시킨다. 현 세계를 피안의 세계와 대립시킨다. 그는 이제 도덕가가 되어서 현세와 내세를 선악으로 나누고 이 세상의 삶을 비난하고 심판하며 이 세계의 허구성을 고발한다. 소위 참된 세계, 그것은 삶에 반대하는 삶이다. 그는 삶이 그 자신을 수정하고 외관을 수정하길, 고결하게 되길, 그것이 참된 세계로 이행의 구실을 하길 바란다. 삶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로부터 등 돌리길 원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을 파헤쳤을 때 드러나는 것은 이 같은 도덕적 금욕주의자의 모습이다. 금욕적 이상의 인간에게서 니체는 허무주의, 즉 무의 의지를 발견한다. 무의 의지에서 비롯한 반응적 힘들이 인식, 과학, 종교 등 모든 영역에 걸쳐서 끊임없이 금욕적 이상을 만들어내는 것.

 

12 도처에 금욕적 이상이 있지만, 그것은 시류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고 끊임없이 새롭게 출현한다. 처음엔 종교의 옷을 입었다가, 종교에서 도덕의 옷으로 갈아입고, 또 그 다음엔 도덕에서 과학으로. 끊임없이 출현하는 금욕적 이상을 발본색원하려면, 비판은 진리 자체에 대한 비판이 되어야만 한다. ‘자기 자신에 반대하는 판결’은 금욕적 이상이 진리의지 너머에는 더 이상 은신처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그를 대신해서 대답할 그 누구도 데리고 있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때 금욕적 이상은 자기 지위를 상실하며 가면을 잃고 더 이상 자기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어떤 인물도 이용하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니체는 <다르게 느끼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다른 자리에서 다른 이상을, 다른 인식 방식을, 다른 진리 개념을, 다시 말하자면 진리의지 속에 전제되어 있지 않지만 완전히 다른 의지를 가정하고 있는 어떤 진리를 추구해야만 한다.

 

13 삶을 인식에 봉사하게 할 때 삶은 반응적인 것으로 바뀐다. 사유를 삶에 봉사하게 할 때도 삶과 사유의 모형이 되는 것은 반응적인 삶이다. 니체의 새로운 사유는 “삶이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갈 사유, 삶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데리고 갈 사유, 삶에 대립하는 인식 대신 삶을 긍정할 사유”이다. 여기서 삶은 사유의 적극적 힘이고, 사유는 삶을 긍정하는 능력이다. 삶을 긍정하는 사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불확실성 속으로 끊임없이 투신하도록, 낯선 체험을 하도록, 정착할 새로운 장소를 끊임없이 찾도록 강제한다. 그래서 사유하는 것은 삶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하는 것,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사유하는 자들의 삶은 위대한 항해자들의 탐험과 같다. 험난하지만 비범한 삶들. 그런 삶 속에서만 창의력, 사색, 과감성, 절망, 이상이 존재한다.

 

14 진리를 추구하는 금욕적 이상주의자의 의지와 그 성질이 전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바로 예술가의 의지다. 예술은 ‘사심 없는 활동’과는 반대이다. 예술은 사심을 없애지도 않고, 욕망과 충동과 의지를 중지시키지도 않는다. 그와 반대로 예술은 권력의지의 자극제, 의욕의 흥분제이다. 예술은 오로지 적극적인 힘들과의 관계 속에서, 적극적 삶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긍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야말로 우리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냄으로써 삶을 긍정하는 사유를 펼치는 자들이다. 삶의 활동은 원래 속이고 현혹시키고 유혹하는 거짓의 힘으로 점철되어있다. 예술은 아름다운 가상을 만들어냄으로써 오류인 한에서의 세계를 확대하고, 거짓말을 신성화하고, 속이려는 의지를 우월한 이상으로 만든다. 예술은 진리에 기초하지 않는다. 대신 예술은 거짓을 더 고귀한 긍정의 힘으로 고양시키는 허구들을 만들어낸다. ‘이 세상은 죄다 헛된 거짓이고, 살 가치가 없고, 천국에 갈 일만이 관건이다’라는 반응적인 생각과 ‘창조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 거짓된 세상을 더욱 아름다운 거짓으로 만들자’는 적극적인 생각의 차이. 사고관의 차이.

 

15 우리에게 익숙한 독단적인 사유의 이미지가 있다. 사유는 그 안에 진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본유관념) 정념에서 비롯한 오류를 피해서 올바른 방법으로 사유하기만 하면 추상적 보편자로서의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는 생각. 이에 반하여 니체는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니체에게 있어서 사유의 요소는 진리가 아니라, 의미와 가치이다. 사유의 범주들은 참과 거짓이 아니라, 사유 자체를 독점하고 있는 힘들의 본성에 의한 우아함과 비루함, 고귀함과 저속함이다.

 

또한 니체에게 있어서 사유의 부정적 상태는 오류가 아니라, 어리석음이고 저속함이다. 반응적 힘들에 의해서 지배된 정신상태. 노예의 승리를 표현하는 어리석고 저속한 사유들. 바로 이러한 사유의 부정적 상태를 고발함으로써 사유를 공격적이고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어떤 것으로 만드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의 임무다. 시대를 역행하는 사유, 반시대적 고찰이야말로 철학의 소명인 것.

 

그런데 모든 사유는 항상 사유를 독점하는 어떤 힘에 의존한다. 어떻게 사유하도록 훈련시키고 교육하고 강제하는 것이 바로 문화이다. 문화의 최종 목표는 삶을 긍정하며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고안해내는 예술가와 철학자를 길러내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파이데이아를 세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교회와 국가가 문화의 이러한 사유 훈련을 전담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결국, 반시대적 고찰을 통해 기존의 가치를 공격하고 체제비판적인 사유의 힘을 길러야 할 문화가 어용문화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리스적인 것에서 독일적인 것으로 변질되는 문화. 문화의 퇴락.

 

이처럼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사유는 사유를 독점하는 힘들에 의존하는 바, 사유는 언제나 그 기저에 복잡한 힘들의 관계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여러 힘들의 유형, 힘들의 다양한 위상이 실로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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