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 까치글방 138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 / 까치 / 199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장 현존재의 근본구성틀로서의 세계-내-존재 일반
12절 안에-있음 그 자체에 방향을 잡아 세계-내-존재를 대강 그려봄

현존재는 선험적으로 우리가 ‘세계-내-존재’라고 이름하고 있는 존재구성틀에 근거하여 고찰되어야 한다. 세계-내-존재란 무엇인가. 먼저 내-존재,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머무르다, 거주하다, 체류하다, 습관이 되었다, 친숙하다, 보호하다, 사랑하다, 돌봐주다, 몰입해 있다 등등의 의미. 즉 현존재가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현존재가 ‘친숙한 세계 안에서 존재자들에 몰입해 있는 채로 거주한다’는 것. 세계-내-존재는 하나의 통일적인 현상이다. 현존재가 하나의 존재자로서의 세계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적인 현상이 문제되고 있는 것. 세계는 존재자가 아니라, 오직 현존재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가 세계로서 개시되는 것은 현존재가 ‘세계를 개시하는 존재자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현존재의 이해 안에서만 비로소 세계로서 드러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세계라는 개념 역시 내-존재와 마찬가지로 현존재의 존재에 속하는 실존주임.

 

‘<세계>-곁에 있음’은 세계-내-존재에 기초한 하나의 실존주이다. <세계>-곁에 있음이란 현존재가 세계 내의 존재자들에 몰입하면서 그것들과 관계한다는 것, 건드린다는 것, 만난다는 것, 접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자가 세계 내부에 있는 존재자를 건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존재자가 본성상 ‘안에-있음’의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을 때뿐이다. 즉 그의 거기-있음과 더불어 이미 세계와 같은 어떤 것이 그에게 함께 발견되어 있고(세계-내-존재라는 것은 앞서 말했듯 통일된 현상이므로), 그 세계로부터 존재자가 접촉 속에 드러날 수 있을 때에만, 그 존재자가 그것의 눈앞에 있음에서 접근 가능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세계 내부에 존재하나 무세계적인 그런 두 존재자는 결코 서로를 건드릴 수 없으며 어떤 것도 다른 것 곁에 있을 수 없다.

 

‘안에-있음’은 ‘배려함(=고려함)’의 존재양식을 가진다. 세계-내-존재의 존재양식으로서 배려함 또는 고려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수행하다, 처리하다, 공급하다, 마음 쓰다 등의 의미. 배려함이란 곧 현존재가 현존재 이외의 존재자들과 실천적으로 관계하는 방식들 일반을 가리키는 존재론적 용어 즉 이또한 실존주.

 

13절 어떤 한 기초지어진 양태에서의 안에-있음의 범례화: 세계인식
인식함 자체는 선행적으로 ‘이미-세계-곁에-있음’ 안에 근거해 있고, 현존재의 존재는 그 사실에 의해서 본질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세계-곁에-있음’으로서의 현존재가 가지는 인식이란 눈앞의 것을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그런 게 아니다. 세계-내-존재는 배려함으로서 배려되고 있는 세계에 의해서 이미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인식작용은 선행적으로 세계와 배려하는 긴밀한 연관 속에서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가 존재자 자체를 이러저러한 것으로서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현존재는 그러한 인식작용에 의해서 그때마다 이미 개시되어있는 세계에 대해 새로운 존재관계를 역동적으로 형성하게 된다. 인식작용은 결코 폐쇄된 자신의 내부에서 고립적이고 정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식은 그 자체로 세계-내-존재가 취하는 하나의 실존론적 양상일 뿐이다. 인식 자체가 현존재의 한 양태인 것. 따라서 인식작용에 앞서 그러한 인식작용의 근거가 되는 세계-내-존재에 대한 선행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 대체 이 책에서 하이데거가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존재'라는 게 뭔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그것.
-어떤 하나의 존재자에 대해 '그것이 있다' 혹은 '그것은 ~이다'라고 말하기 이전에 나와 존재자와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선(先)술어적 조건.
-존재는 존재자가 비로소 존재자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해의 기반'이다.
-존재는 선술어적 조건이자 이해의 기반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존재 이해를 갖느냐에 따라 존재자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그 내용을 달리 한다.
(인식의 가능 조건?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존재란 푸코의 에피스테메 같은 것인가? 후설의 이념적 본질 같은 것인가?)
-형이상학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됨. 하나님 이런 게 아니야. 하나님 같은 것도 존재자에 불과.

 

3장 세계의 세계성
14절 세계 일반의 세계성이라는 이념

모든 현존재는 각기 우선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란 결국 주관적인 종류가 되는데, 그 안에 우리가 존재하는 하나의 공동의 세계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는가? 이런 의문 속에서 이 세계도 저 세계도 아닌 세계 자체의 ‘세계성’이 문제가 된다. 세계성은 일종의 존재론적 개념이며 세계-내-존재의 한 구성적 계기의 구조를 의미한다.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세계에 대해서 물을 때, 우리는 결코 현존재분석론의 주제적 장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현존재 자체의 한 성격이다.

 

세계라는 용어가 내포하는 다양한 의미 중에서 이 책에서는 세계를 현존재가 ‘현존재로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곳’으로 이해한다. 이때의 세계는 공적인 우리-세계이기도 하고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고유한 가정적 주위 세계이기도 하다. 둘의 경우 모두 세계는 실존적 의미를 가진다.

 

데카르트 이후 지금까지의 철학과는 다르게, 세계는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존재양식으로서의 평균적인 일상성의 지평에서 분석론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일상적인 세계-내-존재를 뒤밟아야 하며, 그것을 현상적인 발판으로 삼아 세계와 같은 것이 시야에 들어와야 한다. 일상적인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세계는 우리가 태어나서 살고 죽는 친숙한 생활세계이다. 이 생활세계, 주위세계의 세계성 분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가. 주위세계성 및 세계성 자체의 분석

15절 주위세계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자의 존재

가장 가까이서 만나게 되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현상학적 제시는 일상적인 세계-내-존재를 실마리로 삼아 달성될 것이다. 일상적인 세계-내-존재는 ‘세계 안에서의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와의 왕래(교섭)’를 부단히 수행하고 있다. 왕래(교섭)는 배려함의 방식이다. 만지고 다루고 사용하는 적극적인 실천. 이때의 존재자는 어떤 이론적인 세계-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칸트의 사물(Ding) 같은 게 아님. 사물이 아니라 도구라고 칭해야 한다. 도구의 존재양식을 살펴야 한다. 존재자들은 일차적으로 도구를 사용하는 고려에 의해서 드러난다.

 

도구란 본질적으로 무엇을 하기 위한 어떤 것이다. 유용성, 기여성, 사용성, 편의성 등과 같은 여러 방식들이 하나의 도구전체성을 구성한다. 가령 망치를 가지고 얘기해보자. 망치를 들고 망치질을 할 때 우리는 대개 이 망치라는 존재자를 주제적으로 눈앞에 놓여있는 사물로서 파악하지는 않는다. 존재자의 외양을 아무리 날카롭게 바라본다고 해도 그저 바라보기만 해서는 손안의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손안에 있음의 이해’를 결여한다. 우리가 존재자를 눈앞의 대상으로 놓고 날카롭게 관찰할수록 도구는 오히려 자신의 진정한 성격을 은폐할 뿐이다.

 

우리는 망치라는 물건을 그저 멀거니 바라보는 게 아니라, 손에 잡고 활기차게 사용한다. 그렇게 망치를 능란하게 사용하면 할수록 우리와 망치의 관계는 보다 더 근원적이 될 것이고, 망치는 보다 더 가려지지 않은 채로 우리 앞에 드러날 것이다. 망치는 망치 그 자체로서, 도구 그 자체로서 우리와 비로소 만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물들이 고유하고 자명하게 ‘그 자체로 있음’을 그 사물들을 사용하면서 ‘명확하게 주목하지 않는 배려함’ 속에서 만나게 된다. 내가 지금 도구를 사용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능숙하게, 제 손발과 같이 능숙하게 도구를 다루면서 비로소 그 도구의 존재를 만나게 되는 것. 그런데 우리가 망치를 능숙하게 사용하면 할수록 정작 우리는 망치라는 존재자에 대해서 잊는다. 오히려 우리가 관심 두는 것은 망치로 박는 못이다. 도구가 사용되는 존재자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렇게 도구들이 도구로서 제대로 기능할 경우 우리의 주목을 끌지 않고 자신을 부각시키지 않는 도구의 존재성격을 ‘그 자체에 즉해 있음’이라고 한다.

 

하나의 도구는 그 도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을 내포한다(지시한다). 우리는 하나의 도구를 보면서 도구가 가지는 목적(무엇에 사용될  도구인가), 도구의 유래와 재료, 도구를 이용하는 사람 혹은 도구를 착용하는 사람 기타 등등 여러 가지를 가늠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물품과 함께 손안에 있는 존재자만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 도구의 착용자 또는 이용자 아울러 그들과 더불어 있는 공공의 세계, 주위세계 자연까지도 만나게 된다.

 

16절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에게서 알려지는 주위세계의 세계적합성(세계연관성)
존재자를 배려하는 세계-내-존재에게 세계와 같은 어떤 것이 문득 스스로를 내보이는 현상, 다시 말해 현존재가 손안에 든 도구에 배려/고려/몰입되는 가운데 현존재에게 배려된 세계내부적 존재자와 함께 일정한 방식으로 그것의 세계성이 빛나게 되는 그런 사태는 어떻게 가능한가. 가령 손안의 도구가 파손되었을 경우 혹은 도구가 아예 부재한 경우 혹은 도구의 사용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를 떠올려보자. 여러 가지 이유로 도구가 사용불가능해질 때 비로소 도구는 우리 눈에 띄게 된다. 변양된 도구와의 만남. 바로 이때 앞서 말한 바의 사태가 드러난다.

 

도구가 작동불가능하게 되어 눈에 띄거나, 도구가 아예 없어져서 절실해지고, 도구가 사용이 원활하지가 않아서 억지로 버티면서 사용해야 할 때, 어떤 의미에서 도구는 손안에 있음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자기 자신(‘그 자체로 있음’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결별하는 것이다. 손안에 있음이 다시 한 번 자신을 내보이기는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또한 손안의 것의 세계적합성도 드러난다.   

 

즉, 도구가 제 기능을 못할 때, 그 도구의 구성적 지시가 방해를 받는데, [여기서 도구의 구성적 지시란, 도구의 존재를 구성하는, 도구와 연관된 모든 내용들: 도구의 목적, 도구의 유래, 도구의 이용자, 도구의 이용으로 인해 수혜를 입는 자, 도구가 세상에 쓰이는 그러한 과정 속에서 도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온갖 세계 양상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도구가 지시하는 것들임] 지시의 방해 속에서 역설적으로 지시가 명백해지는 것이다. 결여와 부재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존재감.

 

도구에 문제가 생길 때에야 비로소 그 도구가 지시하는 것, 그 도구와 연관된 것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제야 비로소 대체 무엇을 하기 위해서 그 도구를 손안에 가지고 있었던 지를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된다. 다시금 주위세계가 스스로를 알려온다. 세계가 열어 밝혀진다. 세계가 훤히 열어 보인다. ‘손안의 것의 탈세계화’와 동시에 ‘세계의 빛남’이 이루어진다.

 

반면, 주위 세계의 일상적 배려 속에서 손안에 있는 도구를 그것의 ‘존재 자체’로 만나려면 도구를 도구의 존재마저 잊을 정도로 능란하고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는 경우여야 한다. 도구의 작동에 아무런 이상이 없고 나도 그 도구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그런 때는 세계가 전혀 자신을 알려오지 않는다. 오로지 그러한 때라야만 그 도구 안에 도구의 자체 존재의 현상적 구조가 구성되어 있다.

 

눈에 안 띔, 강요하지 않음, 버티지 않음- 다시 말해 도구가 원활하게 잘 작동하는 성질, 유용성, 편리성, 편의성. 도구의 이런 성질들은 곧 ‘손안에 있는 것의 존재의 긍정적인 현상적 성격’을 의미한다. 손안의 것이 자체 안에 머물러 있는 성격. ‘그 자체로 있음’, ‘자체 존재’로서의 성격. 요약하면,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자체 존재는 오직 세계현상을 근거로 해서만 존재론적으로 파악가능하다. [가령,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반원을 떠올려보자. 반원의 부단한 회전 속에서 비로소 홀로그램처럼 현상하는 ‘구’는, 회전하는 반원을 근거로 해서만 존재론적으로 파악가능하다.]

 

17절 지시와 기호
앞서 살펴보았듯이 세계는 도구를 사용하는 고려에서 도구의 도구적 성격과 함께 개시된다. 다시 말해 도구의 지시연관 속에서 세계성이 구성된다. 도구의 지시연관성, 지시전체성이 세계성을 구성하는 바, 지시들이 발견될 수 있는 도구의 하나로서 기호를 분석해봄으로써 도구의 성격(지시적 성격)을 보다 명확히 규명해보자. (이후로 무슨 말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음)

 

18절 사용사태(용도)와 유의미성(유의의성), 세계의 세계성
도구는 지시적 성격을 갖는다. 즉 도구는 어떤 것으로 지시되고 있으며(가령 망치란 못 박는 것이고 옷걸이란 옷을 거는 것이다) 이것(=용도)을 기반으로 해서 하나의 특정한 도구로서 발견된다. 그런데 어떤 도구가 사용되는 용도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용도를 지시한다. 가령, 어떤 도구가 A를 하기 위한 도구인데, 그 A는 B를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이러한 연쇄가 계속되면 결국 필연적으로 어떤 용도도 더 이상 갖지 않는 궁극의 용도로 귀착된다. 이렇게 더 이상 다른 용도들을 위한 용도가 될 수 없는 것이 궁극목적이다. 궁극목적은 세계 내부에서 도구의 존재양식을 갖는 존재자가 아니라 그 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규정되고 있으며 그 존재구조에는 세계성이 속하는 존재자인 현존재의 존재에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현존재만이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현존재가 어떤 도구를 특정한 용도에 사용하기 위해서 현존재는 모든 존재자들을 이미 어떤 용도를 갖는 도구로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그것의 도구적 성격에서 발견하면서 그것을 이러한 도구적 성격을 갖는 존재자로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쓰일 용도에 따라서 존재하게 함’은 모든 도구를 도구로서 개현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곧 현존재가 존재자들 사이의 용도 연관의 전체, 즉 용도 전체성을 이미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용도전체성=지시연관의 전체성. 현존재의 궁극목적에서 시작되는 목적연관의 전체성이야말로 세계의 본질 즉 세계성이다.

 

앞서 말했듯 현존재는 다른 용도를 위한 용도가 될 수 없고 그 자체가 궁극목적이다. 가령, 현존재가 A하기 위함이 궁극목적이라면, A를 위해 B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고, B를 만들기 위해 C가 필요하고 C를 얻기 위해 D가 요청된다고 하자. 이렇게 궁극목적에서 시작하여 우리가 직접 다루고 있는 도구에까지 이르는 목적연관의 전체를 유의미성이라 한다. 목적연관의 전체성=세계성=유의미성. [하나의 도구를 단어라고 치면, 유의미성이란 문법이나 글 전체의 맥락을 의미하는 것인가?] 현존재가 현존재로서 항상 친숙하게 이해하면서 살고 있는 곳인 세계의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유의미성이다. 유의미성을 친숙하게 이해하고 있을 때 이러한 이해 안에서만 존재자가 용도라는 존재양식을 가지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현존재가 항상 이미 친숙하게 이해하고 있는 이러한 유의미성 자체는, 현존재가 의미와 같은 것을 개시할 수 있기 위한 존재론적 조건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러한 의미가 낱말과 언어를 기초 짓는다.

 

나. 데카르트의 세계해석과 대조하여 세계성을 분석함

19절 연장적 사물로서의 "세계"에 대한 규정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자아와 물체적인 사물을 구별한다. 이 구별이 나중에 정신과 자연의 구별이 되고, 자연은 공간이며 세계가 된다. 데카르트는 물체적인 사물로 이루어진 세계의 존재론적인 근본규정을 연장에서 본다. 즉, 데카르트는 길이, 폭, 깊이와 같은 연장이 물질적 실체의 본래적 존재를 형성한다고 보면서 이것을 세계라고 부르고 있음. 분할가능성, 형태, 운동, 촉감, 색깔의 변화와 같은 물성 변화는 연장의 양상(양태)일 뿐 연장의 본질은 아니다. 연장은 어떠한 양태 변화 속에서도 자신을 견지하며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이다. 물체사물에서 그러한 지속적인 머무름을 만족시키고 있는 바로 그것이 그 물체사물에서의 본래적인 존재자이며, 이것이 곧 물질적인 실체의 실체성을 형성한다.

 

20절 “세계”의 존재론적 규정의 기초들

물체적 사물(존재자)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데카르트의 두드러진 특징은 데카르트가 존재의 의미를 눈앞의 존재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실체성을 눈앞의 자명한 존재로 보는 존재이해를 전제하고 있는 것. 데카르트 뿐만 아니라 고대 존재론과 중세 존재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 존재를 눈앞의 자명한 존재로 간주했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는 이제껏 제대로 구명되지 않았던 것이다.

 

존재를 눈앞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만 간주하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실체성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을 회피할 뿐 아니라, 실체 자체, 즉 실체의 실체성은 그 자체로는 드러날 수 없음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실체는 그것이 있다는 것만으로 곧바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존재 자체는 우리의 감각을 촉발하지 않는다. 따라서 존재는 인식되지 않는다. 결국 존재를 물을 수 있는 가능성은 단념되고 데카르는 일종의 도피로를 찾게 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존재론적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존재자를 눈앞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도구적 존재로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실체성으로서의 눈앞의 존재는 도구적인 존재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눈앞의 존재자들인 실체들이 갖는 ‘존재적 속성’을 실체의 ‘존재론적 성격’과 혼동하고 있을 뿐이다.

 

21절 데카르트의 “세계”존재론에 대한 해석학적 논의
데카르트는 세계의 존재를 연장으로 보면서, 지성을 통해서 수학적 물리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연장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는 길이, 폭, 깊이라고 하는 수학적 물리학적으로 인식되는 항존적인 것을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생각으로는 눈앞에 존재하고 수학적으로 인식되는 항존적인 것만을 본래적 존재로 보는 것은,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존재를 극단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존재자를 세계 자체와 동일시하게 하는 동기가 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음. 이후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 주위세계성의 주위성과 현존재의 “공간성”
현존재가 갖는 공간성은 내부성이라고 불릴 수 있는 ‘공간 안의 존재’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내부성이란 연장을 갖는 어떤 존재자가 보다 큰 연장을 갖는 다른 존재자 안에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현존재가 공간이라는 커다란 그릇 안에 있다는 식의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 현존재가 공간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원칙적으로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내부성과는 구별되는 현존재의 공간성이란 무엇인가.

 

22절 세계 내부적인 도구적 존재자의 공간성
모든 도구적 존재자는 각각의 방역을 갖는다. 방역이란 우리가 어떤 도구를 어디에 놓을 것인지를 물을 때의 그 ‘어디로’에 해당. 도구가 갖는 자리. 방역=도구의 자리=도구가 놓이는 공간=어디. 도구의 방역 즉 공간은 일상적인 고려를 통해서 발견되고 둘러봄에 의해서 해석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둘러봄에 의한 해석 속에서, 공간은 유의미성에 따라 발견되고 분절된다. 공간은 발견되고 구획되고 조정되고 만들어지는 것.

 

23절 세계-내-존재의 공간성
현존재는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자와 배려하며 친숙하게 왕래한다는 의미로 세계 “안에” 존재한다. 따라서 현존재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공간성이 귀속된다면, 그것은 오직 이러한 안에-있음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 안에-있음(=세계-내-존재)의 공간성은 ‘거리 제거’와 ‘방향을 잡는다’는 두 성격을 갖는다. 먼저 현존재의 존재양식으로서의 거리제거는 어떤 것을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두는 것을 의미한다. 둘러보는 고려에 의해서 조달하고 마련하며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두는 것. 편리한 곳에 두는 것. 현존재는 거리를 제거하면서, 둘러봄에 의해서 발견된 방역 안에서 각각의 도구들에게 적합한 자리를 부여하면서, 자신의 일상적 주위세계를 확대해 나간다.

 

현존재는 거리를 제거하는 내-존재인 동시에 방향을 잡는다는 성격을 지닌다. 둘러보는 고려는 방향을 잡으면서 거리를 제거한다. 방향을 잡는 것은 거리 제거와 마찬가지로 세계-내-존재의 존재양상으로서 고려의 둘러봄에 의해 선행적으로 인도되고 있다. 방향의 결정은 순전히 주관적으로 현존재의 신체를 중심으로 해서만 행해지는 게 아니라, 도구들의 용도전체성으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세계를 토대로 하여 성립한다. 다시 말해 방향 결정은 세계-내-존재에 근거한다는 것. 우리는 그때마다 이미 숙지되어있는 세계를 통해서 방향을 잡는다는 것. 따라서 방향을 제대로 취하려면 우리가 어떤 세계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세계를 숙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체를 기준으로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하는 느낌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와 같이 거리 제거와 방향 잡음은 세계-내-존재의 본질적인 성격으로서, 발견된 세계 내부적 공간 안에서 둘러봄에 의해서 고려하면서 존재하는 현존재의 공간성을 규정한다.

 

24절 현존재의 공간성과 공간

도구가 귀속되어야 할 방역은 고려의 궁극목적을 정점으로 하는 용도들의 전체를 통해서 그 윤곽이 그려진다. 즉, 현존재가 도구를 사용하기 이전에 용도전체성이 개시되어 있고, 이러한 용도전체성과 함께 공간도 개시되는 것. 용도전체성에 대한 개시는 유의미성에 대한 이해에 근거한다. 따라서 현존재는 유의미성에 대한 선행적인 이해에 근거하여 용도전체성을 개시하고, 용도전체성에 입각하여 거리를 제거하고 방향을 잡으면서 어떠한 것이 어떠한 방역에서 적합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도록 존재케 한다.

 

이렇게 세계의 세계성과 함께 개시되는 공간은 수학적으로 계산되는 3차원적 공간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공간이 주관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아울러 세계는 공간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공간이 세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공간이 현존재의 고려에 의해 세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규명을 통해서 공간을 해명해야지 데카르트처럼 공간 내지 공간적 연장을 통해서 세계를 파악하려 해서는 안 됨.

 

방역으로서의 공간은 용도전체성으로서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항상 주제적으로 의식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구의 공간성이 둘러봄에 의해서 주제화되면 비로소 공간은 그 자체로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둘러봄에 의해 주제화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공간을 우리는 순수한 주시에 의해 계산하고 측정할 수 있다. 순수한 주시에 의해서 공간을 보게 될 경우, 주위세계적 방역들은 순수한 기하학적 공간으로 변하게 된다. 이와 함께 세계 내부적 도구들이 자리하는 공간은 용도라는 성격을 상실한다. 세계 역시 특수한 주위세계적인 성격을 상실하며 그 자체로 무세계적인 주체가 인식하는 자연세계로서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동질적 자연공간은 도구들의 세계연관성을 탈세계화하는 발견양식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데카르트는 이런 공간(동질적 자연공간)을 하나의 실체적인 것으로 보았고, 칸트는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져있는 직관형식으로 보았지만, 하이데거는 이런 공간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생활세계적인 공간에서 추상된 것으로 봄.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동질적인 공간이라는 것은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생활세계적인 공간에서 생활세계적인 의미를 사상해버린 추상물인 것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