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 까치글방 138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 / 까치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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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의 설명

1절 존재에 대한 물음을 분명히 다시 제기해야 할 필연성
존재에 대한 물음은 오늘날 망각 속에 묻혀버렸다. (1)존재라는 개념이 너무나 보편적이고 공허하다는 편견 때문에. (2)정의가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3)정의를 필요로 하지도 않을 만큼 자명한 개념이라고 여기는 편견 때문에. 과연 그런가? 이러한 선입견에 대해 논의해보자.

 

(1)존재란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긴 하다. 그러나 존재는 모든 유(類)를 포괄하는 의미에서의 그러한 유가 아니다. 존재의 보편성은 모든 유적 형태의 보편성을 넘어선다. 존재는 중세 존재론의 관점으로 보자면 ‘초월자’이다. 존재는 초월적 보편의 단일성, 유비의 단일성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가 존재 개념을 명확히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존재는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 개념이 가장 명확한 개념이고 더 이상의 어떠한 논의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라는 개념은 오히려 가장 어두운 개념이다.

 

(2)존재라는 개념이 정의될 수 없기는 하다. 존재에는 어떤 다른 본성이 덧붙어질 수 없다. 존재는 거기에 존재자가 서술되는 식으로는 규정될 수 없다. 존재는 정의상 더 고차의 개념들로부터 도출될 수도 없고 하위의 개념들에 의해서 서술될 수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귀결될 수 있는 것은 단지 ‘존재는 존재자와 같은 그런 어떤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 뿐이다. 존재의 정의불가능성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던지지 않아도 된다고 면제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물음을 던질 것을 촉구하고 있다.

 

(3)존재는 자명한 개념이지만, 존재가 눈앞에 있기에 자명하다는 그런 평균적인 이해가능성은 단지 몰이해성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존재자들끼리 맺는 모든 행동관계와 존재 그 자체 사이에 선험적으로 하나의 수수께끼가 놓여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우리는 각기 이미 하나의 존재이해 속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존재의 의미는 어두움에 싸여있다는 이 사실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다시 제기해야 할 근본적인 필연성을 입증한다.

 

이상의 고찰은 존재에 대한 물음에는 대답만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그 물음 자체가 어둡고 갈피를 못 찾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기 전에 우선 물음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지 충분히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2절 존재에 대한 물음의 형식적 구조
존재물음은 세 가지 구조계기를 갖는다. (1)물음의 대상이 되는 것=존재. (2)궁극적으로 밝혀져야 할 것=존재의 의미. (3)물음이 걸리는 것=우리 인간인 현존재(물음이 여러 존재자들 중 특별히 우리 현존재에게 걸리는 이유는 4절에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2)존재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3)우리 자신 현존재에게 (1)존재에 대하여 물을 때, 이러한 물음은 이미 우리가 선험적으로 갖고 있는 어떤 존재이해에 입각해서 행해진다. 완벽한 백지상태라면 물음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가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히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존재가 무엇인지 묻고 있을 때, 이미 우리는 “이다(있다)”에 대한 이해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 “이다(있다)”가 무엇을 뜻하는지 개념적으로 확정할 수 없으면서도 말이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분명하고 투명하게 제기하기 위해서는 존재이해를 갖는 존재자인 현존재의 존재구조를 구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분석을 실마리로 하여 존재의 의미를 묻는 것은 일종의 순환논법이 아닐까. 현존재의 존재도 하나의 ‘존재’인 이상, 현존재의 존재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미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 선정한 실마리인 현존재 역시 존재를 전제로 해야만 탐구 가능한 그런 것이 아닌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존재’는 분명히 지금까지의 그 모든 존재론에서 ‘전제되었다’. 그렇지만 정확한 개념으로서가 아니다. 즉 찾고 있는 그것으로서가 아니다. 존재를 ‘전제함’은 존재에 대한 앞선 관점취득의 성격을 띤다. 잠정적인 선이해, 막연한 선이해. 이러한 이해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존재물음은 막연한 이해를 투명하게 하고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뿐 어떤 명확하게 확정된 원칙에서 연역적으로 논증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

 

3절 존재물음의 존재론적 우위
역사, 자연, 공간, 삶, 현존재, 언어 등 다양한 사태분야들은 저마다 하나의 학문적 대상으로서 그에 상응하는 학문적 탐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탐구의 진보는 사태에 대해 실증적으로 탐구하고 그에 따라 증대되는 지식과 확장되는 범주체계로부터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각 사태분야의 근본 구조에 대한 물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근본개념들은 각각의 학문 분야를 구체적으로 열어 밝히는 실마리이자 모든 실증적인 탐구를 주도하는 규정들로서, 각각의 학문이 주제로 삼는 대상의 밑바탕에 놓여있는 사태영역 자체를 선행적으로 철저히 탐구할 때에만 증명될 수 있다. 근본개념들을 길어내는 선행적인 탐구란 각 사태영역의 존재 구조에 대해 분석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역존재론’적 물음은 존재 일반의 의미가 제대로 규명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소박하고 불투명한 것으로 끝나고 만다. 각각의 존재영역이 갖는 고유성을 사태 자체에 입각하여 드러내려고 하면서 그것들 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존재영역들 간의 관계를 밝히는 계보학이 필요한 까닭이다. 존재물음은, 이미 하나의 존재이해 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각 학문들의 선험적 가능조건뿐만 아니라, 개별 학문들 존재자에 선행하면서 그것들에 기초를 부여하는 영역존재론들 자체의 가능조건까지도 명확히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점에서 존재물음은 실증적인 학문들이나 영역존재론에 대해서 우위를 갖는다. 

 

4절 존재물음의 존재적 우위
현존재는 어떠한 방식과 명확성에서건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있다. 이 존재자에게 고유한 점은 자신의 존재와 더불어 자신의 존재에 의해서 그 자신에게 그의 존재가 열어 밝혀져 있다는 사실이다. 존재이해는 그 자체가 곧 현존재를 규정하는 성질 중 하나이다. 현존재의 존재적인 뛰어남은 ‘현존재가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는 데 있다. ‘존재론적으로-존재한다’는 말은 아직 명확한 존재론을 형성한 건 아니지만 존재론의 맹아랄 만한 어떤 것을 갖고 있다는 얘기. 단순히 ‘존재적으로-존재하는’ 정도는 넘어선, 그 이상의 어떤 이해를 갖고 있다는 뜻.

 

현존재가 다른 존재자들과 갖가지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 이미 관계를 맺고 있는 그러한 존재 방식 자체를 우리는 실존이라 말한다. 현존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그의 실존에서부터, 즉 그 자신으로 존재하거나 그 자신이 아닌 것으로 존재하거나 할 수 있는 그 자신의 한 가능성에서부터 이해한다. 현존재는 이러한 가능성들을 그 스스로 선택했든가, 아니면 그 가능성들 안으로 빠져들게 되었든가, 아니면 각기 이미 그 안에서 성장해왔다. 이렇게 주도적인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우리는 ‘실존적 이해’라고 한다.

 

(‘실존적 이해’와 구분하여 생각해야 할 것이 ‘실존론적 이해’다. ‘실존론적 이해’는 실존의 존재론적인 구조에 대한 이론적 통찰이다. 인간존재가 갖는 존재론적인 구조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작업. 각자적인 실존을 구성하는 근본구조들에 대한 분석.)

 

실존적 이해를 갖는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이다. 즉 현존재에 속하는 존재이해는 세계와 세계 내부의 존재자들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들을 주제로 하는 모든 영역존재론은 존재이해를 갖는 존재자인 현존재 자신의 존재적 구조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영역존재론을 기초 짓는 기초존재론은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5절 현존재의 존재론적 분석론은 존재 일반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한 지평을 파헤쳐 드러냄이다
시간성은 현존재의 존재 의미를 탐구하기 위한 지반이다. 현존재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지평으로서의 시간. 시간이야말로 모든 존재이해 및 모든 존재해석의 지평으로서 밝혀져야 하며 진정으로 그 개념이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 현존재의 존재의미인 시간성은 통속적 시간 이해(=‘지금’이라는 시점들의 연속으로서의 시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시간이 ‘지금이라는 시점들의 연속’이 아니라면, 현존재의 존재의미로서의 시간이란 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가? 무엇을 뜻하는가?)

 

6절 존재론의 역사를 해체해야 하는 과제
시간성은 현존재 자신의 시간적 존재양식인 역사성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역사성을 갖는 현존재는 과거로부터 전승되어온 현존재 해석 속에서 성장한다. 대부분의 경우 현존재는 전승된 현존재 해석에 의거해서 자신을 이해하며, 이러한 이해는 현존재의 존재가능성을 개시하고 규제한다. 따라서 현존재의 과거는 현존재의 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를 앞서서 인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존재가 역사성에 의해서 규정된다면, ‘존재물음’ 그 자체도 역사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존재물음 이전에 존재물음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선행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의 근거에 있어서 역사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 현존재는 자각적으로 전통을 발견하면서 그것과 대결하기도 하는데, 앞으로 내가 서술하려는 존재물음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고찰 역시 그러한 의도로 수행하는 것이다. (이후로 칸트, 데카르트, 고대 그리스 철학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존재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서 존재론의 역사를 소급적으로 해체해 나가는 내용이 이어진다.)

 

7절 탐구의 현상학적 방법
현상학은 존재물음을 수행하는 방법론이다. 현상학의 몇 가지 예비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현상’이란 스스로를 그 자신에 입각해서 드러내는 것이다. 어떤 것이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을 경우에만, 즉 현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경우에만 그것은 그 자신이 아닌 어떤 것으로서, 즉 ‘가상’으로서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다. 이때 가상이란 현상의 결여적 변양이라고 할 수 있다. 사태 그 자체를 드러내는 현상이 있고, 현상의 결여적 변양으로서 가상이 있다면, ‘나타남’은 현상이나 가상과는 또 다른 종류의 개념이다. 나타남이란 징후, 상징, 지시, 알림이다. 드러나지 않는 것, 은닉되어 있는 것, 본질적으로 결코 드러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방사되어 나오는, 끄집어져 나오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나타남 역시 가상과 마찬가지로 현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현상, 가상, 나타남과 더불어 검토해 봐야 할 것으로 ‘로고스’가 있다. 로고스란 말을 통한 드러남이다. 음성으로 발설함으로서 밝혀지는 어떤 것. 어떤 것을 지시하면서 비로소 보이게 되는 그 무엇, 언어로서 발견되는 그 무엇. 로고스는 드러냄이기 때문에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

 

현상학의 기초개념들이 위와 같다면, 현상학이 보이게 해주어야 할 그것은 무엇인가? '현상'이라고 지칭되어야 할 그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 본질상 필연적으로 명시적 제시의 주제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내보이지 않고 있는 것, 자기 자신을 내보이고 있는 그것에 비추어볼 때 은폐되어 있는 것, 그럼에도 동시에 자기 자신을 내보이고 있는 그것에 본질적으로 속하여 있는 것이다. 은폐된 채 남아있거나, 전에 한 번 발견되었으나 다시 은닉 속에 빠져버렸거나, 위장되어서만 자신을 내보이는 그것은 이 존재자 또는 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이다. 존재자의 존재는 아주 심하게 은닉되어 그것이 망각되고 그것 또는 그것의 의미에 대한 물음조차 제기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바로 이것이 현상학이 손아귀에 넣어야 할 학문적 대상이다.    

 

현상학은 존재론의 주제가 되어야 할 그것(존재)으로 나가는 접근양식이며 그것을 증명하며 규정하는 양식이다. 존재론은 오직 현상학으로서만 가능하다. 존재론이 철학의 대상을 가리키는 용어라면, 현상학은 철학의 방법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8절 논구의 개요

존재의 기본개념을 획득하고 그 기본개념에 의해 요구되는 존재론적 개념성 및 이 개념성의 필연적 변양들을 소묘하기 위해서는 어떤 구체적인 실마리가 필요하다. 현존재라는 특정한 존재자에 대한 해석을 발판으로 하여 존재 개념으로 전진해 나가는 탐구의 특수성은 존재 개념의 보편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도리어 존재의 이해와 해석을 위한 지평은 현존재에게서 획득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존재는 그 자체로 시간성을 가지며 역사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 존재자를 존재론적으로 철저하게 조명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역사적인 해석이 된다. 따라서 존재물음의 수행은 먼저 현존재를 시간성을 겨냥해서 해석하고 시간을 존재에 대한 물음의 초월론적 지평으로서 제시하는 1부, 그리고 존재론의 역사를 현상학적으로 해체하는 2부로 나뉜다. 2부에서는 6절에서 간단히 살폈던 칸트와 데카르트 아리스토텔레스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제1부 현존재를 시간성으로 해석하고 시간을 존재에 대한 물음의 초월론적 지평으로 설명함
제1편 현존재에 대한 예비적 기초분석

제1장(9절~11절)의 주요내용: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은 유사한 여느 다른 분석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어떤 점이 무엇 때문에 구별되는가?
제2장(12~13절)의 주요내용: 현존재의 기초적 구조는 ‘세계-내-존재’이다. ‘세계-내-존재’란 무엇인가?
제3장~제5장(14절~38절)의 주요내용: 2장에서 더 심화되는 논의 전개.
제6장(39~44절)의 주요내용: 현존재의 실존론적 의미는 ‘염려’이다.

 

9절 현존재분석론의 주제(앞으로 내 생각은 []로 묶어 구분)
현존재분석론의 주제는 당연히 현존재, 즉 나 자신이다.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있다. 현존재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그 존재는 각기 나의 존재다. 현존재마다 그의 고유한 존재가 그에게는 떠맡겨져 있다. 현존재에게 떠맡겨져있는 그의 고유한 존재, 이것을 실존이라 지칭한다. 현존재가 관계 맺고 있는 자기의 존재는 곧 실존이고, 실존이 바로 현존재의 본질이다. 실존이라는 말은 현존재한테만 쓴다. 현존재 외의 다른 존재자들의 존재에는 실존이라는 말을 안 쓰고 ‘눈앞에 있음’이라고 해두자.

 

현존재의 본질은 그의 실존에 있다. 실존이란 존재자의 눈앞에 보이는, 현존재에게 이미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런 저런 고정된 속성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실존이란 ‘그때마다 각기 현존재에게 가능한 존재함의 방식들’이다. 실존이란 구체적으로 처해있는 삶의 국면들 속에서 매 순간마다 또 매 상황마다 현존재에게 주어지는 가능성이다. 이미 완성된 무언가가 아니라, 완성해야 할 하나의 과제로서 주어져 있는, 구현해야 할 하나의 가능성. 이렇게 현존재는 그의 존재에 대해서 그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 관계한다. 현존재는 각기 그의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현존재는 그의 존재에서 자기 자신을 선택할 수도 있고 획득할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겉보기로만 획득할 수도 있고 반대로 자기 자신을 상실할 수도 있다.

 

[인간은 돌이 아니다. 개, 돼지도 아니다. 인간은 강물이 범람하면 뗏목을 만들고 추우면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운다. 사랑하고 투쟁하고 노동하고 춤추고 지배하고 매매하고 배신하고 속이고 헌신한다. 세계와 매순간 뜨겁게 상호작용하면서,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자기 앞에 주어진 무수한 가능성들을 펼쳐내면서,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구현하며 산다. 이것이 바로 현존재의 존재의 본질이다. 따라서 현존재의 실존은 항구적이거나 고정된 게 아니다. 정적인 게 아니라 동적인 것. 미래적이고 변화하는 것. 능동적인 것, 주도적인 것, 참여적인 것, 끊임없이 형성되어져 가는 도래하는 어떤 것이다.]

 

자기 자신을 획득한다는 건 무엇이고 상실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본래성과 비본래성이라는, 현존재를 규정하는 두 가지 존재양태로서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적인 실존이라 함은 현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구현하면서 사는 존재방식을 말한다. 현존재가 비본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존재양태가 도피의 양태일 수도 있고 망각의 양태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존재의 존재양태가 비본래성을 띤다고 해서 그것이 모자라거나 낮은 차원의 존재등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본래성을 띠는 현존재는 그 누구보다도 세상일로 분주하고 각종 사건에 흥분하고 다방면에 관심 많고 곳곳에서 향락을 누리는 존재자다. 어쨌든, 도피든 망각이든 현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존재와 평균적인 일상성의 양태에서 관계를 맺고 있다. 현존재는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태도'를 취하고 있다.

 

현존재분석론의 주제인 현존재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로 마치고, 이제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이 여느 유사한 다른 분석들과 구별된다는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범주와 실존범주의 차이를 설명해보자. 먼저 범주라는 것은 눈앞의 사물들의 존재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특성들을 말한다. 반면에 실존범주라는 것은 현존재가 자신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방식, 즉 현존재의 존재를 구성하는 구조계기들을 말한다. 왜 이렇게 구분하느냐면, 앞서도 말했지만 현존재의 존재는 존재자가 갖는 눈앞에 존재하는 특성들을 단순히 기술하고 분류하면서 그것에서 공통된 특성들을 끌어들이는 (기존의 서양철학이 존재자를 이해하는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로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현존재가 자신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방식들, 즉 현존재가 실존하는 방식들과 관련하여 기술되어야만 한다. 사물이 존재하는 것과 현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눈앞의 사물들의 존재를 파악하는 범주와 현존재의 존재를 파악하는 실존범주는 전적으로 달라야 하고 또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현존재는 현존재 아닌 것과 구별되어야 하고(실존범주 vs 범주, 실존 vs 눈앞에 있음, 현존재 vs 존재자), 현존재분석론 또한 인간학, 심리학, 생물학과 구별되어야 한다. 후자에 대한 내용은 다음 절에서 한다.

 

10절 현존재분석론을 인간학, 심리학, 생물학과 구별지어서 한정함
데카르트는 ‘나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지만 그는 사유에 대해서만 논의할 뿐 존재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지 않다. 사실 사유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실존적인 삶이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유한다’가 옳다. 의식작용은 현존재의 존재방식에 의해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또한 데카르트의 생각처럼 자아나 주관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화되거나 실체화할 수 있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현존재는 그렇게 여느 사물적인 존재방식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재는 그때마다의 역사적인 세계 안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든지 아니면 실현하지 못하는 식으로 살고 있다. 현존재가 갖는 이러한 실존방식에 대한 분석은 의식작용에 대한 내적인 반성이 아니라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삶 전체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수행되어야 한다. (이후 딜타이, 후설, 셸러까지 차례차례 까대는데 이는 생략) 이처럼 근대철학이 현존재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까닭은, 전통적 인간학의 두 원천인 고대그리스와 그리스도교의 인간학이 인간을 여느 다른 존재자와 똑같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를 ‘실존’이 아니라 그저 다른 사물들의 경우와 같이 ‘눈앞의 존재’로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듯이 보이지만 기실 현존재의 존재가 그 어떤 물음 아래에도 놓이지 않고 있기로는 인간학(철학)뿐만이 아니다. 심리학, 생물학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인간과학들은 인간에 대한 선이해를 전제로 하여 인간을 연구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 모두 선이해 자체는 문제 삼지 않고 있다.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은 모든 인간과학에 선행하여 그것들에 기초를 마련하는 작업이다.

 

11절 실존론적 분석론과 원시적 현존재의 해석. “자연적 세계개념” 획득의 어려움
내가 현존재를 그의 일상성에서 해석한다고 말할 때의 그 일상성이란, 현존재가 고도로 발달되고 세분화된 문화 속에서 움직이고 있을 때의 현존재의 한 존재양태이다. 그러나 원시적인 현존재도 그들 나름의 일상성을 가지고 있을 테고, 때로 원시적 현존재는 현상들에 근원적으로 몰입하여 더 직접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우리 측에서 볼 때 서툴고 거친 개념성이 현상들의 존재론적 구조를 순수하게 끄집어내오는 데 더 유익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원시인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온 민속학 역시 인간 현존재에 대한 특정한 개념과 해석 안에서 움직이고 있고, 이 학문이 가지고 있는 맹점도 앞서 비판한 여느 인간과학의 경우와 다를 바 없다.

 

인간을 주제로 한 여러 방면의 지식이 풍부해진다고 해서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존재자에 대한 지식 획득을 넘어서 존재에 대해서 묻는 것이 모든 학문적 추구의 궁극점이라면, 존재론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독자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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