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철학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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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여러 가지 가치들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 사실로서,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서 여겨왔지만 니체는 그러한 가치들 자체의 가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가치란 결코 선험적으로 주어진 절대적인 그런 게 아니라, 평가를 통해 만들어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미(美)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때, 니체는 사람들이 미(美)에 대해 질문하는 징후의 이면에서 그러한 미(美)라는 가치를 형성케 하는 메커니즘과 기원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무엇이, 누가, 우리로 하여금 미(美)라는 현상을 가치롭게 여기도록 하는가? 대체 어떤 힘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이러한 것에 미적 가치를 부여하는가?

 

니체는 진리를 포괄적으로 정의할 것을 요구하는 소크라테스의 질문과는 달리,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현상의 의미와 가치를 분석하기 위한 질문을 던진다. 가치롭다고 하는 것들이 대체 어떤 토양에서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그 토양은 어떤 가치가 있는지, 하는 가치들 자체에 대한 가치 평가. 가치들을 발생케 하고 전개시키고 변화시켜 온 조건과 환경, 그 기원에 대한 계보학적 추적. 니체의 계보학은 현상과 의미, 그리고 힘(권력)의 관계를 문제 삼는 철학이다. 이렇게 니체는 현상의 의미를 힘의 지배 속에서 포착함으로써 외관과 본질이라는 형이상학적 이원성을 대체하며, 또한 원인과 결과라는 과학적 관계도 대체한다. 그에게 철학은 '징후학'이자 '기호학'이다.

 

니체는 능동성과 반동성으로 나타나는, 두 가지 힘의 존재방식의 차이가 가치를 파생한다고 본다.

 

<가치를 발생하게 하는, 즉 가치의 원리 구실을 하는 두 가지 힘의 종류 및 그들의 특성>

 능동적인 힘(=작용하는 힘=지배하는 힘)  반동적인 힘(=반응하는 힘=복종하는 힘)

 *생의 고통과 즐거움 그리고 다양성을 긍정하는 힘에의 의지에서 비롯됨. 니체에 의해 우아하고 고귀하고 건강하고 진정한 것으로 평가됨.
*'작용하는 힘'에의 의지의 특성- 춤, 경쾌함, 웃음 등으로 표상됨. 생의 발랄한 생성과 흐드러진 다양성을 긍정함. 긍정하는 권력의지 속에서 생성과 존재, 다수성과 일자, 시간과 영원, 우연과 필연은 더 이상 대립하지 않고 서로 화해한다. 복수성, 다원론적 경쾌함을 지향.

 

 

 

 *생의 고통과 즐거움 그리고 다양성을 부정하는 힘에의 의지에서 비롯됨. 니체에 의해 저속하고 비루하고 병약하고 왜곡된 것으로 평가됨.
*'반응하는 힘'에의 의지의 특성- 기존의 가치가 명령하는 바에 다라서 묵묵히 노동하는 성격. 춤이 아니라 노동, 경쾌함이 아니라 무거움, 웃음이 아니라 우울함을 자신의 본질적인 성격으로 갖는다. 기존의 가치에 순종하면서, 시간적인 생성과 다수성을 영원한 일자로서의 존재와 대립되는 것으로 보면서 덧없고 무의미한 것으로 비하한다. 단일성, 일원론적 무거움을 지향.

① 생과 세계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이 두 가지 힘은 질적으로, 유형론적으로, 존재방식 상의, 현존 양태 상의 차이가 있다.

② 어떤 현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단순히 둘 중 하나의 힘을 가정해서는 곤란하다. 이면의 힘이 표면의 현상을 제압하는 과정에는 늘 저항과 반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니체의 철학은 이렇게 '복수의 힘'(힘의 다원성)을 고려하는 것이고, 거기서 의미의 경합을 추출해 내는 것이다. 현상에 대한 '유일한 원인'이 없다는 점에서 '신은 죽었다'. 의미는 철저히 힘들의 다원성 속에서 결정된다.(복수주의)

③ 니체는 ‘힘’과 ‘힘에의 의지(권력의지)’를 구별한다. 힘보다도 힘에의 의지(권력의지)가 더 심원한 것임. 권력의지는 힘을 발생시키는 요소이며, 힘의 미분적 요소이다. 권력의지로부터 힘이 비롯된다. 권력의지는 사물이나 주체에 개별 대응하지 않고 그것들의 보다 기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사물이나 주체, 현상, 그런 대상들은 그 자체가 뒤엉킨 여러가지 권력의지들의 표현, 힘들의 출현이다.

④ 처음에 어떤 새로운 힘이 한 대상을 이미 점령한 앞선 힘들의 가면을 쓸 때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그 대상을 제 것으로 삼을 수 있다. 만약 어떤 힘이 그가 반대해서 투쟁하는 앞선 힘들의 얼굴을 우선 빌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위와 같이 상반된 힘의 존재방식에 따라 어떤 것이 가치 있느냐에 대한 감정과 생각이 다르게 발생한다. 능동적인 힘을 발휘하는 ‘고귀한 자’들이 가치롭다고 평가하는 가치와 반동적인 힘을 발휘하는 ‘저속한 자’들이 가치롭다고 평가하는 가치는 각각 다르다. 전자, 귀족들은 이기/이타의 대립 자체를 모르고 따라서 거기에 어떤 선악의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 반면, 후자, 노예들은 비이기적인 행위에 선이라는 가치를 부여한다.

 

힘은 상대적으로 약할 수 있지만 그와 관련된 권력의지는 상대적으로 강할 수도 있는 법이다. 가령, 약자들의 교묘한 지배전술(무리형성)은 비록 박탈된 힘이기는 하지만 그런 힘들의 연합을 통해 권력의 확보와 지배의지의 달성을 이루기도 한다. 기독교 사제들이 대중들에게 원죄의식을 전파하고 천국이라는 금욕주의적 이상을 꿈꾸게 하고 현실을 무가치한 것으로 세뇌시킴으로써 대중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방식, 이것은 일종의 노예적 사상을 감염시키고 전염시키는 일과도 같은데, 역사상 이러한 교묘한 방식으로 약자가 지배 권력을 찬탈하는 경우가 상당했다. 이같이 미약한 힘이라도 그 힘이 갖는 권력의지의 끈질김은 무시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힘과 권력의지는 비례관계에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단일한 의지 대신 복합적인 의지, 복수의 의지들이 만들어내는 힘의 관계들, 현상의 이면에서 꿈틀대는 복수의 의지들의 경합이다. 사물의 역사는 그것을 탈취하고, 점령하고, 독점하고, 소유하고, 이용하는 힘들의 연속이며 그것을 점령하기 위해서 서로 투쟁하는 힘들의 공존이다. 동일한 대상, 동일한 현상이라도 그것을 소유하는 힘에 따라서 의미가 변화한다. 새로운 힘이 사물(대상)을 지배하면 그에 따라 그 사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지게 된다. 사물의 의미는 그것과 그것을 독점하는 힘의 관계이고, 어떤 것의 가치는 복합적인 현상인 한에서, 사물 속에 표현되어있는 힘들의 서열이다.

 

그러나 어떤 힘이 다른 힘을 대상으로 취한다고 해서, 힘들이 서로 경합하고 투쟁한다고 해서, 한 힘이 다른 힘을 부정하고 변증법적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다른 힘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복종하는 힘은 다른 힘이나 자신이 아닌 바를 부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고유한 차이를 긍정하고 이 차이를 향유한다.”(30) 니체는 부정과 대립 또는 모순의 변증법적 요소 대신에 차이라는 실천적 요소, 긍정과 즐김을 내세운다. 니체는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 차이를 긍정하고 즐긴다. 변증법이 노동이라면 니체의 방식은 기쁨과 향유이다.

 

그렇다면, 대립과 모순 그리고 부정을 사유전개의 필수요소로 하는 변증법적 가치평가를 살펴보자. ‘너는 악하다’라고 말하는 어린 양은 이 타자에 대한 부정적 규정을 통해 ‘나는 선하다’라는 자신에 대한 긍정적 규정을 확보한다. 부정의 부정, 이 이중의 부정 속에서 자기 긍정이 탄생한다. 부정해야 할 타자나 외부세계를 먼저 요청한다는 점에서 변증법은 철저히 노예적인 운동이다. 그러나 강자는 어떤가? 그는 자신의 고귀함에서 솟아나는 자기 긍정에서 출발한다. 만약 나와 같다면 너도 고귀하다. 그러나 나와 같지 않다면 너는 불쌍하고 비천한 존재이다. 이렇게 강자에게서는 "부정적인 것이 항상 자신의 현존에서 파생하는 부차적인 산물"이다.

 

변증법이 모든 운동의 절대적 원리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과연 어떤 권력의지가 변증법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걸까. 변증법을 진리로서 가치 매기는 바로 그 의지의 실체는 어떤 것일까. “차이를 긍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 고갈된 힘, 더 이상 스스로 움직이진 않지만 자신을 지배하는 힘에 대해 반응은 하는 힘”만이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 부정을 자신의 고유한 본질과 현존의 원리로 삼는다. 힘을 쓸 수 없는 무력한 어린 양은 맹금이 맹금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책임을 지우는 권리”를 노예적 가치평가를 통해 고안해낸다. 맹금은 ‘힘을 쓰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나쁜 의도를 갖고 고의적으로 힘을 발휘했다’는 비난을 받고 자신의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능력을 박탈당한다. 변증법은 이렇게 병들고 약한 자들의 사유이자 “노예의 사고방식”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는 헤겔적 운동은 실상 노예적 운동이다. 모든 차이의 관계를 대립과 부정과 모순으로 만드는 자는 노예이며, 노예만이 변증법적으로 사유한다. ‘권력의지의 차이’가 어린 양에게는 저 맹금이 사악한 의도로 행사하는 나쁜 ‘권력’으로 표상된다. 차이를 향유하는 의지, 차이 속에서 긍정을 발견하려는 의지, 차이를 낳고자 하는 의지로서의 권력이 아니라, 빼앗아 와야 하고 약탈해야 하는 권력, 탈취하여 똑같이 재현하고자 하는 권력, 그저 우월성의 표상으로서의 권력, '어떤 이'에 의한 '다른 이'의 우월성에 대한 재인식으로서 이해되는 권력, 경쟁의 목표로서의 권력,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인 주인-노예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권력의 표상이다.

 

그럼에도 니체의 비극론에서는 변증법의 냄새가 난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적 예술충동의 대립 그리고 비극으로의 종합이라는 점에서. 자세히 보자. 아폴론은 개체의 고통을 아름답고 영원한 가상, 꿈 또는 조형적 이미지로 승화하면서 극복한다. 아폴론적인 예술을 관조하면서 우리는 경험적인 세계의 무상성에서 벗어나 이데아 세계의 영원과 부동성을 경험하게 되고, 또한 우리가 사는 세계와 인간의 본능적인 충동들을 신성한 것으로서 긍정하게 된다. 반면,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인 음악은 우리를 세계의지 자체와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현상세계의 덧없음에서 벗어나게 한다. 디오니소스적 음악이 경험적인 세계의 근저에 있는 심연을 표현함으로써 인간을 원초적 통일로 되돌아가게 하고 원초적 존재 속으로 흡수한다면, 아폴론적인 예술은 경험적인 세계를 넘어선 이데아 세계의 광명을 표현한다. 음악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을 망각하고 음악이 표현하는 세계의지와 혼융일체가 되어 버리는 반면에, 아폴론적인 예술에서 인간은 개별적인 사물에 나타나 있는 이데아를 관조하면서 이것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음악 속에서 우리는 슬퍼하고 기뻐하는 방식으로 ‘도취’하지만 아폴론적인 예술에서 우리는 조용한 ‘관조’ 상태를 유지한다.

 

이 두 가지 예술충동은 “모순을 해소하는 반테제적인 두 방식으로서 서로 대립한다.”(37) 그리고 이내 이들은 비극이라는 통일로 나아간다. 비극은 “디오니소스에 의해 지배되는 경탄할 만한 일시적인 동맹”이다. 왜냐하면 비극의 유일한 인물이 디오니소스이고, 비극의 유일한 주제도 디오니소스의 고통과 파멸, 원초적인 존재의 쾌락 속에서 소멸되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극의 유일한 관객도 디오니소스를 주인으로 모시는 합창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들을 드라마적인 방식으로 형태화하는 게 아폴론적인 활동이다. 비극은 아폴론적인 요소, 즉 아름답고 명료한 서사적 줄거리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사람들의 심금을 파고드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제공한다. 결국, 비극은 ‘모든 개체성의 근원이면서 그러한 개체성이 몰락하면서 되돌아가는 영원한 근원적인 세계의지’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지혜를 아폴론적 예술수단에 의해서 형상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변증법적인 비극론이 전개된 데 대하여 니체 역시 <이 사람을 보라>에서 스스로 “위험스럽게 헤겔주의 냄새가 풍긴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니체는 더 중요한 것이 분명 <비극의 탄생>에 담겨있다고 주장하면서, 아폴론 대 디오니소스라는 변증법적 대립을 대신하여 디오니소스에 대립하는 항으로서 소크라테스를 데려온다. 소크라테스는 디오니소스적이지도 아폴론적이지도 않다. 비극이 도취와 열정과 충동 속에서 존재의 심연을 파고드는 데 반해, 소크라테스는 모든 도취와 충동을 비판하고 오로지 관념적인 의식만을 창조적인 반열에 올린다. 그는 "관념과 삶을 대립시키고, 삶을 관념에 의해서 판단되고 정당화되고 대속되는 것으로 놓는다."(41)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인간을 분리시키고, 삶을 그 자체로 체험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려 했던 형이상학의 정초자, 오로지 근거율과 인과율에 의해 삶을 판단하고 정당화하는 주지주의적인 낙천주의자, 관념의 견지에서 삶을 판단하는 퇴폐의 천재, 소크라테스. 그가 바로 “비극적 인간의 단 하나의 참된 대립자”이다.

 

니체 사유의 흐름 속에서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의 대립은 더 나아가 디오니소스와 기독교의 대립으로 대체된다. 디오니소스와 기독교는 ‘삶 속에 존재하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따른 상반된 두 방식을 보여준다. 디오니소스가 고통을 그 자체로 정당한 것으로,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가장 모진 고통조차도 긍정하고, 가혹한 고통의 삶 그 자체를 전폭적으로 긍정한다면(극단적 평가 절상), 기독교의 고통은 삶을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 근거이면서 동시에 삶의 부당함을 극복하고 우리가 삶에서 구원받기 위한 수단이 된다(극단적 평가 절하). 기독교에서의 삶은 징벌이며, 구원되어져야 하는 무엇이다. “이상이 제조되는” 그 “어두컴컴한 공장 내부”를 들여다보라. 그것은 어린양의 논법이다. “보복하지 않는 무력감”은 ‘선’이 되고, 공격하지 못하는 비겁함은 ‘인내’와 ‘용서’가 되고, 심지어 “적에 대한 사랑”이 된다.

 

‘구원자’라는 생각 속에 기독교의 모든 비밀이 숨어있다. 삶으로부터의 구원? 그렇다면 이 삶이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닌가. 구원자의 관점에서 “삶은 성스러움으로 인도하는 길이어야 한다.” 반면 디오니소스의 관점에서 “현존은 더욱이 엄청난 고통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할 만큼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45) 니체의 ‘구원’은 이 삶으로부터 신성함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는 게 아니라 이 삶 자체를 사랑하고 긍정하는 방법에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모든 화해보다 더 고귀한 어떤 것” 즉 긍정을 얘기한다. 부정의 운동, 대립하고 지양되고 해소되어야 하는 모순보다 더 고귀한 것은 “가치전환”이다. 이제 우리는 니체의 비극론을 변증법적으로만 볼 게 아니라, 하나의 가치전환으로 볼 필요가 있겠다. 디오니소스와 예수의 대립은 변증법적 대립이 아니라, “변증법 그 자체와의 대립”(46)이다. 즉 “변증법적 부정에 반대하고, 모든 허무주의에 반대하며, 또 허무주의의 그 특별한 형태에 반대하는 미분적인 긍정인 것이다.”(46) 마치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라 선악 자체에 대한 대립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이데올로기(이는 곧 변증법적 사유)와 니체의 비극적 사유 사이에는 공통적인 인식이 있다. 둘 다 현존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죄를 범한 결과로(기독교에서는 원죄설, 그리스신화에서는 프로메테우스 이야기),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되어야 할 부정적인 그 무엇으로 본다는 점. 현존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본다는 점은 같지만 그리스인들의 해석과 기독교적 해석에는 차이가 있다. 그리스인들 역시 기독교도들처럼 현존을 죄로 만들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기독교적인 죄악을 모른다. “거인족들조차 유태인과 기독교인의 놀랄 만한 발명인 가책, 잘못 그리고 책임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53) 영웅적인 행위에 따른 죄일 뿐 내면을 공격하는 죄악은 아니다. “기독교에 비할 때 그리스인들은 어린아이들이다.”(55) 그리고 그리스인들의 죄는 대개 인간을 고통에 빠지게 한 신들에게 그 책임이 돌아갔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신을 이용했다. 반면 기독교는 “원한(그것은 네 잘못이다) 속에서, 가책(그것은 내 잘못이다) 속에서, 그리고 공통의 결실(책임) 속에서”(55) 현존을 저주한다. “이것이 바로 죄의 그리스적 해석과 죄악의 기독교적 해석 사이의 큰 차이”(55)인 것.

 

그러나 “책임 없음은 니체의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비밀이다.”(55) 이런 니체의 새로운 해석에서 볼 때 그리스와 기독교의 커다란 차이조차 그렇게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어쨌든 두 해석은 현존을 죄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가. “신이 인간에게 불러일으킨 광기의 책임을 자신(신)에게 전가하는 것, 혹은 십자가에 자신을 매달게 했던 신의 광기에 대한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 이 두 가지 해결책은 아직까지는 충분히 차이가 없다. 비록 전자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진정한 문제는 “유죄인 현존”에 누가 책임이 있느냐가 아니라, “현존이 유죄냐 무죄냐이다.”(56) 그리고 여기서 디오니소스는 거인족도, 기독교신도 아닌 생성의 무구함과 존재하는 모든 것의 무구함을 상징하는 전혀 새로운 신이다.

 

모든 것은 자신의 능력만큼만 뭔가를 할 수 있다. 활동은 능력만큼의 활동이고, 활동한 만큼만 능력을 갖는다. 힘과 능력은 분리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의 행위도 비난받을 수 없다. 그런데 어린양의 논법대로 자신의 능력을 표현하는 맹금의 존재 자체가 비난받아야 할 때, 힘을 발휘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자유의지의 주체를 날조해낼 때 힘은 그 능력으로부터 분리되고 만다. 이것이 유대적 가치 전도다. 존재의 능력 자체를 박탈해버리는 가치의 전도. 무력하고 고통 받고 궁핍하고 병든 자가 신의 축복을 받는 착한 존재가 되는 가치의 전도 속에서 고귀하고 강력한 자들, 능력만큼의 활동을 하는 자들은 모두 저주받을 자가 되고 만다. 차이가 모순과 적대로 돌변하는 사태가 생겨난다. “무구함은 현존, 힘, 의지의 놀이이다. 긍정되고 높이 평가된 실존, 분리되지 않은 힘, 둘로 나뉘지 않은 의지가 바로 무구함의 최초의 근사치이다.”(58)

 

현존은 죄가 없다. 현존은 결백하고 무구하다. 삶은 본질적으로 정의롭다. 우리가 흔히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이 모든 현존의 모습들- 존재들 간의 셀 수 없는 투쟁은 결코 도덕적으로 논할 수 없는 하나의 ‘미적 현상’일 뿐이며, 현존하는 세계가 보여주는 무구한 주사위 놀이에 다름 아니다. 모든 놀이는 그때그때 주어지는 사건을 우연적인 것으로 보는 것과 동시에 예측할 수 없고 소망조차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숙명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보면서 긍정하고 사랑할 때 진정으로 행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주사위 놀이는 반복되는 우연을 긍정하는 놀이이다. 그리고 반복되는 우연의 조합, 바로 그것이 운명이다. “니체가 필연(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 그 자체의 조합이다. 필연은 우연이 그 자체로 긍정되는 한에서 우연에 의해서 긍정된다.”(63) 필연이 우연에 의해서 긍정되듯이, 존재는 생성에 의해서 긍정되고 일자는 다수에 의해 긍정된다.

 

매 순간이 새로운 창조의 순간일 수 있는 것은 단 한 번에 모든 우연을 충분히 긍정할 때만 가능하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의 운동이란 “주사위 던지기의 (창조적인) 반복”이며, “우연 자체의 재생산이자 재긍정”이다. 이는 곧 목적론을 배제한 즐거운 혼돈이며 매순간 창조적인 순환이다.

 

현존은 끊임없고 무구한, 목적 없이 즐거운, 우연적인 생성의 연속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수의 충동(복수심)은 수세기 동안 너무나 인간을 사로잡고 있어서 모든 형이상학, 심리학, 역사 그리고 특히 도덕이 그 흔적을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복수심은 “우리 정신의 계보학적 요소”이고, “사유 방식의 초월적 원리”다. 따라서 허무주의와 복수심에 반대하는 니체의 투쟁은 “형이상학의 전복, 인간사로서의 역사의 끝, 과학들의 변화”를 의미하게 된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원한과 가책의 입장에서 사유해왔고, 금욕주의적 이상에 지배당해 왔다. 살아간다는 것 혹은 삶의 의지 자체가 부정되고 비판당했다. 그러나 니체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의지를 긍정하고, 모든 부정적인 것을 추방할 것을 요구한다. 기존의 사유방식의 계보학적 원리 자체를 재건하는 근본적인 전환, 전적으로 새로운 사유방식의 요구-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즐거운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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