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범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표범은 번식기에만 암수가 짝을 지어 다니고 이후로는 헤어져 단독 생활을 하는데, 홀로 초원을 배회하던 수컷이 어린 표범을 발견하면 냄새를 맡아 자기 새끼가 아닐 경우 가차 없이 물어 죽인다고 한다. 다큐 초반부에서는 암컷의 생활 공간 근처에 두 마리의 수컷이 서로 영역 다툼을 벌이며 포진해 있자 암컷이 양쪽 수컷을 번갈아 오가며 둘 모두와 교미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새끼를 낳더라도 두 마리 수컷 모두 새로 태어난 새끼가 자기 핏줄인 줄 알고 더 이상 물어 죽이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마치 암컷 표범이 오로지 미래의 자식을 건사하고자 어미 된 자로서의 대의에 입각해 일말의 양심이나 수치심도 미련 없이 폐기해버린 듯이 느껴져서 이 대목이 잠시 감격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실상 암컷에게 있어서 신의니 도덕이니 양심이니 수치심이니 하는 따위는 눈물을 삼키며 포기해야 할 필요도 없는,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 덕목일 것이다. 그런 것들의 부재가, 생존과 번식만이 곧 삶의 유일한 의미이며 오로지 본능만이 숭고한 세계에서는 하등의 문제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생한 아프리카 대자연의 영상이 보여주고 있었다. 다큐가 마치 인간 사회의 심연을 대변하는 우화 같아서 보는 내내 망연한 전율을 느꼈다.

 

표범의 새끼들은 두 살이 넘으면 어미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 그때까지 어미는 밤이고 낮이고 열심히 사냥을 하며 최선을 다해 새끼들을 보살핀다. 사냥은 쉽지 않다. 먹이를 탐색하다가도 사자가 나타나면 즉각 나뭇가지 위로 올라가 피신해야 한다. 사자도 나무를 탈 수는 있지만 몸무게 때문에 표범이 올라간 가늘고 높은 가지까지는 따라 오를 수 없다. 나뭇가지가 견딜 수 있는 하중을 각자 치밀하게 가늠하면서 사자와 표범은 불과 일 미터 남짓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먹느냐 먹히느냐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표범을 위협하는 이는 비단 사자만이 아니다. 때로는 개코원숭이 무리를 만나 줄행랑치기도 하고 다잡은 먹이를 하이에나 무리에게 속절없이 내주어야 할 때도 있다.

 

우여곡절 끝에 먹이를 잡으면 어미는 근처 수풀에 숨어있던 자식들에게 어서 오라고 소리를 낸다. 어느 날은 사냥을 떠났다가 한참 만에 토끼를 물어온 어미 표범이 평소 때처럼 새끼들을 부르지만 두 마리 중 한 마리만 나타난다. 다른 한 마리는 아무리 불러도 나타나지 않는다. 어미는 위험을 감수하고 넓은 초원으로 나아가 계속해서 잃어버린 자식을 불러보지만 소식이 없다. 그때 새끼들을 숨겨둔 은신처 옆에서 배가 단단히 부른 채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비단뱀이 보인다. 비단뱀과 사투를 벌이는 어미. 비단뱀이 결국 새끼를 토해내고 도망가자 어미는 더 이상 비단뱀을 응징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 그리고는 죽은 새끼를 물고 그늘진 곳으로 가서 새끼의 살점을 뜯어 먹는다. 다큐에서는 이것이 일종의 의식이라고 했다.

 

한동안 축 늘어진 채로 있던 어미가 살아남은 나머지 다른 한 자식이라도 굶어죽이지 않으려는 듯 수척한 몸을 이끌고 다시 사냥에 나선다. 그러나 가까스로 잡은 임팔라는 너무 무거워 안전한 나무 위로 들어 옮길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남은 한 마리 새끼를 불러내어 나무 밑에서 임팔라를 뜯어먹도록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피 냄새를 맡고 하이에나가 몰려온다. 새끼 딸린 표범은 하이에나 무리를 이길 수 없으므로 도망칠 밖에. 힘들게 사냥한 먹이가 다른 놈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다가 어미 표범은 다시 사냥을 떠난다.

 

다큐 속 표범의 생애는 인간의 삶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기구하고 고단해 보인다. 흔히들 사회를 정글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아프리카 정글의 어느 한 암표범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더 이상 정글은 사회의 냉혹함을 표현하기 위해 은유로서 도용되는 그 무엇이 아니었다. 둘은 비유의 간격을 허락할 것도 없이 본질적인 면에서 전혀 다르지 않았고 표범의 삶은 내가 요근래 본 가장 뜨겁고 가슴 먹먹한 리얼리티였다. 자식을 잃었으나 살기 위해 다시 사냥을 떠나는 어미 표범의 야윈 뒷모습을 기리기 위해 나는 지금 이 긴 글을 적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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