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예찬 -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예찬 시리즈
다비드 르브르통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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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걷기가 있다. 비 맞으며 걷기, 밤중에 걷기, 뙤약볕 아래 걷기, 냄새 맡으며 걷기, 혼자서 걷기, 여럿이서 걷기, 지칠 때가지 걷기, 관찰하며 걷기, 침묵하며 걷기, 노숙하며 걷기, 노래 부르며 걷기, 오솔길 걷기, 도시 이곳저곳을 걷기, 방안에서 걷기, 도중에 멈춰 상념을 기록하며 걷기 등. 헉헉. 저자는 이 모든 걷기에 각각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섬세하게 음미한다. 가장 나중에 언급되는 걷기는 순례길 걷기다. 신성한 종교적 행위로서의 걷기야말로 궁극의 걷기라는 얘기인가 보다.

 

천천히 산책하듯 이 책을 읽었다. 저자에 따르면 산책은 “친숙한 것의 낯설음을 고안해낸다. 산책은 디테일들의 변화와 변주를 민감하게 느끼도록 함으로써 시선에 낯섦의 새로움을 가져다준다.” 낯섦의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읽다 지쳐 도중에 잠깐 잠들어버렸다는 고백을 해야겠다. 하지만 “여러 시간 걷고 난 다음에 허락되는 낮잠이나 밤잠은 가히 축복이라 할 만 하다. (...) 잠자는 것은 미적 관조가 겹쳐진 하나의 육체적 쾌락이기도 하다. 한 밤 지붕 없는 곳에서의 잠은 또한 철학으로의 초대이며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한 한가한 성찰에의 초대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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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 덕분에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갈고 호기심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걷는다는 것은 대개 자신을 한곳에 집중하기 위하여 에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9쪽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 걷기는 시간과 공간을 새로운 환희로 바꾸어놓는 고즈넉한 방법이다. 그것은 오직 순간의 떨림 속에만 있는 내면의 광맥에 닿음으로써 잠정적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포기하는 행위다. -21쪽

 

보행자가 공간을 끝없이 돌아다닐 때 그는 자신의 몸을 통해서 그만큼의 대항해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몸은 언제나 인식을 위한 탐사가 진행 중인 어떤 대륙과 비길 만한 것이 된다. 보행자는 전신의 모든 살로써 세계의 두근거리는 박동에 참가한다. -41쪽

 

걷기는 언제나 미완상태에 있는 실존의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걷는다는 것은 끊임없는 불균형의 놀이이기 때문이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보행자는 규칙적 리듬으로 바로 앞서의 운동에 그와 상반되는 또 하나의 운동을 즉시 연속시켜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겨놓을 때마다 항상 불안정한 상태가 출현하면서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발한다. 요컨대 너무 빨리 걷거나 너무 천천히 걸으면 단절이 생길 수도 있으므로 우리는 먼저 발걸음에 다음 발걸음이 적절히 따르도록 조화를 기해야만 비로소 잘 걸을 수 있게 된다. 보행은 세상을 향한 자기개방이므로 겸손과 순간의 철저한 파악을 요구한다. 한가로운 소요와 호기심이라는 그것 특유의 윤리는 개인의 인격형성과 몸을 통한 실존수행의 이상적 수단이 된다. -88쪽

 

한밤중에 달빛을 받으며 숲속이나 들판을 걷게 되면 그때의 기억은 마음속에 남아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별빛 속이나 캄캄한 어둠 속에 서면 인간은 무한하고 진동하는 어떤 우주 속에 던져진 피조물로 되돌아간 자신의 존재를 느낀다.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 앞에 서게 되고 그 순간의 어렴풋하지만 강력한 우주론 혹은 개인적 종교성에 빠져든다. 밤은 인간을 경이와 두려움이라는 성스러운 두 가지 얼굴과 대면시킨다. 그것은 일상적인 지각의 세계에서 뿌리가 뽑혀 나와서 자아를 초월하는 피안의 세계와 접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111쪽

 

세상의 모든 길은 땅바닥에 새겨진 기억이며 오랜 세월을 두고 그 장소들을 드나들었던 무수한 보행자들이 땅 위에 남긴 잎맥 같은 것, 여러 세대의 인간들이 풍경 속에 찍어 놓은 어떤 연대감의 자취 같은 것이다. -119쪽

 

걷기는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고 단순하게 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을 털어낸다. 걷기는 세계를 사물들의 충일함 속에서 생각하도록 인도해주고 인간에게 그가 처한 조건의 비참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상기시킨다. 오늘날 걷는 사람은 개인적 영성의 순례자이며 그는 걷기를 통해서 경건함과 겸허함, 인내를 배운다. 길을 걷는 것은 장소의 정령에게, 자신의 주위에 펼쳐진 세계의 무한함에 바치는 끝없는 기도의 한 형식이다. -237쪽

 

걷기는 시선을 그 본래의 조건에서 해방시켜 공간 속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 속으로 난 길을 찾아가게 한다. 걷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모든 것과 다 손잡을 수 있는 마음으로 세상의 구불구불한 길을,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내면의 길을 더듬어 간다. 외면의 지리학이 내면의 지리학과 하나가 되면서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을 평범한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해방시킨다. -251쪽

 

수많은 발걸음들에 점철되어 있는 고통은 세계와의 느린 화해로 가는 과정이다. 걷는 사람은 낭패감 속에서도 자신의 삶과 계속 한몸을 이루고 사물들과 육체적 접촉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행복하다. 온몸이 피로에 취하고,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저곳으로 간다는 보잘것없지만 명백한 목표를 간직한 채 그는 여전히 세계와의 관계를 통제, 조절하고 있다. 물론 그는 방향감각을 잃기도 하지만 아직은 알지 못할 어떤 해법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걷기는 하나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 되어 불행을 기회로 탈바꿈시킨다. 인간을 바꾼다는 영원한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길의 연금술이 인간을 삶의 길 위에 세워놓는다. -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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