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영웅의 탄생 - 융 심리학으로 읽는 강한 여자의 자기 발견 드라마
모린 머독 지음, 고연수 옮김 / 교양인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신화 속 여성 영웅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그 여정은 여성성의 분리가 일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①자기 안의 여성성을 억압하고 배제시킨 여성 영웅이 ②남성성과의 동일시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 나가고 ③이내 성공이라는 허황된 열매를 얻게 되지만 ④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적 메마름을 느끼고 ⑤까마득한 하강의 시간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⑥영적 각성의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여성성과 남성성의 통합을 이룬다는, 그리고 이러한 자기 확장→내적 침잠→양성 통합의 과정이 반복된다고 하는, 기나긴 환상(環狀)의 여로를 이 책은 제시하고 있지만

 

정반합의 여로 자체가 진부한 것은 둘째 치고, 이를 '여성 영웅의 탄생' 과정으로 일반화하기에도 섣부르게 느껴진다. 남성적 시각에 의한 서사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왜 자신의 여성성을 내면의 깊숙한 지층에서 뒤늦게 발굴해야 하지. 나는 고유의 여성성을 처음부터 적극 계발하여 저돌적이고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여성 영웅들을 많이 보았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 자신의 여성성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과정이 왜 여성 영웅 신화의 초기 필수코스가 되어야 하는 지도 잘 모르겠다. 상징 질서에의 편입을 강하게 욕망한다는 점에서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시나리오는 차라리 여성의 탈을 쓴 남성 영웅의 그것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생의 역사 속에서 영웅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이 공감가지 않았던 데는 저자가 설정한 여성 영웅의 캐릭터, 즉 자신의 여성성을 자진하여 거세하고 어머니와는 불편한 관계를 이루는 가운데 아버지의 인정을 얻기 위해 분투하는 ‘아버지의 딸’이라는 캐릭터가 나와 공유하는 지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리라. 돌이켜보면 나는 살아온 평생을 미끄덩거리는 물고기처럼 아버지로부터 포획되지 않기 위해 가히 신경증적으로 날뛰었으면 날뛰었지 한번도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분투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 그렇다면 나는 여성 영웅이 아니었던 모양인가. 착각이었나. 그, 그럴 리가.

 

여성성이란 무엇인가. 영웅이란 무엇인가. 당초에 여기서부터 나와 이 책은 그 견해가 엇갈린다. 여성성과 영웅에 대한 저자의 인식에서 느껴지는 남성중심적이고 보수적인 태도가 이 책을 몹시 지루하게 만든 큰 요인이 되었다. (덧붙임: 그야말로 성취지향적인 아메리칸 스타일 페미니즘인 듯. 유럽식 페미니즘에 대한 책은 없을까. 만약 그런 하위장르가 있다면 어쩐지 그쪽이야말로 심오한 고단수 여성학의 색다른 진경을 보여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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