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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철학으로 읽기 - 예술의 형이상학적 해명
조중걸 지음 / 한권의책 / 2013년 3월
평점 :
미술은 당대의 이념과 사상, 세계관을 반영한다. 이 책은 유사 이래 미술과 철학의 교호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 한 시기에 새롭게 출현한 미술 사조가 함의하는 당대의 인식 지형의 변화가 어떤 것이었는지 통시적으로 훑고 있다. 저자는 구석기 벽화의 자연주의 양식에서 구석기인들의 과학적(=주술적) 신념과 자신감을 읽어내고, 신석기시대의 기하학적 양식으로부터 기존의 구석기적 세계관의 붕괴로 인해 신석기 인류가 겪었을 실존적 고통을 가늠하기도 하며, 피로한 표정의 로마황제 두상을 주목하면서 로마 제국의 스토아주의적 극기와 현대의 실존주의를 유비 관계에 놓기도 한다. 섬세하고 날카로운 통찰의 힘으로 책 곳곳이 눈부시다.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저자가 고딕 양식을 중세철학의 유명론 이념의 예술적 대응으로 보고 있는 대목이다. 거칠게 요약하면, 중세 말에 대두한 유명론이 실재론이 지배적이었던 기존의 중세 세계관을 뒤흔들었고 이것의 건축적 반영이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고딕 양식으로의 변화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유명론의 대두를 실재론에서의 유명론으로의 ‘위대한 형이상학적 전환’이라는 과감한 표현으로 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전환’이라기보다는, 자칫 도전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소수의 어떤 의문들이 생겨났고 거기서 촉발된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면, 중세 말의 고딕 양식은 유명론의 반영이라기보다는 유명론이라고 하는 사유에 맞서 실재론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한 일종의 ‘과잉면역반응’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고딕 양식은, 유명론이 자기도 모르게 말실수처럼 무의식적으로 제기하고 말았던 신 존재에 대한 회의와 의문 속에서, 중세적 세계관이 점차로 자기 붕괴되어가는 와중에 나타난, 한 세계가 몰락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극단적 화려함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내 요지는, 고딕 양식이 ‘이념의 반영’이 아니라, 차라리 어떤 애처로운 ‘강박적 심리 증상’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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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진보한다기보다는 변전 혹은 변화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그러나 또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진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런 눈부신 도약의 순간이 역사의 마디마디에 분명 찬란히 빛나고 있기도 한 것이다. 그러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는 인간의 자질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으로 '미적 감수성'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나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법과 제도 및 풍습은 견고한 대신 가장 후속적이다. 윤리와 도덕은 법과 제도보다는 좀 더 빠르게 나아가지만, 윤리 도덕보다 더욱 빠르게 나아가는 것은 흔히 센스와 감각이라고 일컬어지는 미의식, 즉 '미적 감수성'이다. 이것은 상상력이라는 엔진을 달고 정말이지 급진적으로 나아간다.
미술사를 돌아볼 때마다 매번 감격하게 되는 까닭은, 그것이 미적 감수성이라고 하는, 한 시대의 정신이 개화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가장 선봉에 섰던 것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살짝 바꿔보는 편이 어쩐지 좀 더 예뻐보이는 것 같다.'라고 하는, 감각적 당위에 근거한 새로운 미학적 시도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러한 시도를 감행하기 위해서는 단지 창초적 발상만이 아니라 때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기에 미술사는 곧 인류가 보여준 위대한 용기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 책과 함께 서양미술사를 돌아보면서 실로 오랜만에 그 감격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