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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결혼이야기 1 ㅣ 또하나의 문화 11
또하나의문화 편집부 / 또하나의문화 / 1996년 4월
평점 :
품절
사실 나는 결혼하면서 동시에 이혼할 준비를 하였다. (...) 이런 이야기가 '편안해야 할' 결혼 생활을 살벌한 것으로 들리게 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오히려 이혼이라는 거점이 결혼 생활을 신선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또한 언제나 '혼자 살 준비'를 하는 것을 의미함으로써, 나를 보다 독립적인 사람으로 그리고 자원이 있는 사람으로 키우는 노력으로 연결되었다. 결혼은 둘이 사는 것이지만 또 자신이 살아 내는 것임을 두고두고 일깨워 주었으므로. -신해순, <결혼 안에서 페미니스트로 살기> 中에서
'이혼을 준비하며 사는 것'은 '죽었다 생각하고 사는 것'과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효용을 낳는 태도일지도. 삶의 강밀도가 높아진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죽음을 염두하며 사는 것과 삶 자체를 매순간 의식하며 사는 것이 결국은 똑같은 강박증인 것처럼.
(...) 결혼 생활은 둘이, 아니 여럿이 사는 것이지만 결국 자신이 사는 것임을 강조하고 싶다. 독신과는 다른 방식의 '혼자 살기'라고 말하고 싶다. (...) 결혼에도 역시 외로움과 공포가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독립되어 있는 것이 결혼의 준비라는 것을 말한다. 사실 남자에게서 결혼할 수 있는 조건이란 곧장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능력으로 생각되는데, 여자의 경우에도 그것이 준비되지 않는다면 남성 및 그의 가족에의 종속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 마지막으로 자기 지원 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한국의 사회 조직 성격상 가족 역시 중요한 사적 지원의 네트워크가 될 수 있겠지만, 가족 바깥으로 눈을 돌려서, 여성들의 다른 네트워크를 키우고 보살펴야 한다. 친구, 이웃, 직장 관심사 등으로 연결된 여성의 네트워크는 여성에게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지원을 주는 일종의 대항 네트워크가 되어 줄 수 있다. 가족은 이때 많은 의무와 부담의 판을 여성에게 제시하고 있는데, 이들 네트워크는 다른 종류의 판을 만드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려면 여성들은 거기에 자신의 시간과 노력과 돈을 투자해야 한다. '먼저' 자신의 일과 시간과 관심의 판을 만들어 놓을 때 저쪽의 판은 이 판과 협상할 수밖에 없어질 것이다. -같은 곳
남편은 나와 대화하지 않고 나의 감정을 이해하지 않는다. 그런데 남편이 나의 감정을 이해하느냐, 아니냐가 나의 삶의 방향과 목표에 궁극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대답은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족이 좀더 서로 이해한다면 내 삶의 색깔이 더 다양해지고 따뜻해지겠지만, 내가 지향하고 책임져야 하는 부분을 덜어 주거나 대신해 주는 것은 아니다. 내가 혼자 져야 하는 책임의 몫은 여전히 나의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 스스로 행복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누군가의 이해와 몰이해가 더 이상 나의 행복 여부를 좌우하지 않는다.
(...)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사랑을 원한다. 사람들과의 따뜻한 관계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것이 내 가정에서 주어지지 않는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래도 나는 여전히 사랑을, 그리고 관계를 원한다. 나는 내가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내가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먼저 남을 받아주고 이해해주고 사랑을 나누어가는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남편과의 밀착된 관계가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더 큰 공동체를 향한 사랑과 관계를 만들어 가는 일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 나도 비슷한 편안한 느낌을 가진다. 그러므로 이는 (...) 자신이 삶의 주인이고자 노력하면서 중년에 이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이라고 생각한다. (...) 나이를 먹었다는 것과 마음에 여유를 얻은 것, 또 직업상 정진이 있었던 것 등은 행복하게 사십대를 맞이할 수 있게 해준 중요한 요소들이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원 중 하나는 항상 주위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지원과 신뢰가 내게 있어 왔다는 사실이다.
(...) 나의 삶의 과정에서 결혼이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각본이 무엇인지를 찾아 나서는 길목을 열어준 것이었다. (...) 돌이켜 보면 자신의 삶의 각본을 완성해 가는 길목에서 결혼하느냐 마느냐, 어떻게 하느냐가 그렇게 중요한 갈림길은 아니다. 어떻게 삶의 주체(주인공)가 되어서 자신 안에 있는 여성적인 힘을 키워 내느냐 하는 선택이 중요하다. 그 여성적인 힘이란 우선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을 돌보는 힘이다. -장하은, <삶의 각본을 찾아가는 과정>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