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책세상 니체전집 7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미기 옮김 / 책세상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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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다윈의 자연도태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꼭 그것만이 생태계의 변화를 설명하는 유일한 관점은 아니라고 본다. “퇴화, 불구, 나아가서는 악덕 그리고 신체적 또는 도덕적 결손까지도 다른 한편으로는 때때로 하나의 장점이 되기도”(226) 하는 까닭이다. “예를 들어 더 심하게 병든 인간들은 아마 호전적이고 침착하지 못한 종족 속에서 혼자 있을 계기를 더 많이 가지게 됨으로써 더욱 침착하고 현명해지며, 외눈을 가진 사람은 더욱 강한 한쪽 눈을 가지게 될 것이고, 눈먼 사람은 한층 더 깊이 내부를 보고 어쨌든 더욱 날카롭게 듣게 될 것이다.”

 

약한 것들이라고 해서 마냥 속수무책으로 도태되지는 않는다. 약한 것들은 약한 것 나름으로 변화하고 적응한다. 변화하고 적응하는 개체가 생존하는 데 있어서 전제가 되는 것은 “새로운 것의 감염을 받아들여 장점으로 동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병원균을 접종받은 후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항체를 생산해낼 줄 아는 능력. “운명이 그에게 입힌 상처를 이용”하는 능력. 상처를 통해 “고상”해질 수 있는 능력. 그러고 보면 약하다는 것은 관점주의적이고 일면적인 개념일 뿐, 지금 이 순간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 이런 능력을 생존의 기본 조건으로 갖추고 있는 셈이 아닌가. 그러니까 살아있음이 곧 강함의 명백한 실증적 증거가 아니겠는가. 심장이 뛰고 있는 한, 강하지 못한 생명이란 없는 것이다.

 

진화론과 관련해서 니체는 자연도태설보다는 차라리 용불용설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강자’의 의미를 유추해볼 수 있겠다. 아마도 니체가 말하는 강한 개체라는 것은, 예컨대 백악기 시대의 티라노사우르스 같은 종류는 결코 아닐 것이다. 니체는 아마도, 좀 더 포괄적으로, 자생자활능력을 가지고 제 고유의 개성과 활기와 기쁨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모든 개체를 강한 개체로 여기는 듯하다. 니체가 말하는 천재란, 이러한 표현이 극도로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개체의 경우를 일컫는 것이리라.

 

“만약 (...) 완전한 국가[사회주의 국가]가 실제로 달성되면, 위대한 지성과 대체로 강한 개체가 성장하던 땅은 유복한 삶에 의하여 파괴될 것이다. 나는 위대한 지성과 강한 개체를 강한 활력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러한 완전한 국가가 이루어지면, 인류는 너무나 힘이 빠져 천재를 더 이상 산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삶이 그 강제적인 특성을 유지하고 항상 새로운 것에 의하여 격렬한 힘과 활력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따뜻하고 동정적인 마음은 삶의 강제적이고 격렬한 성격을 제거하고자 한다. (...) 가장 따뜻한 마음은 자기 기초가 제거되기를, 자기 자신이 파멸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 마음은 비논리적인 그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현명하지 못하다.” -p.236

 

니체는 사회주의자들을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했지만, 시장자유주의자를 비난하는 데도 위와 동일한 논리를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근본적으로 수치화할 수 없는 가치들이 자본의 강압적 폭력에 의해 물질적 척도로 환산되어 갈수록, 자유경쟁 속에서 독점시장이 비대해져 갈수록, 비교불가한 고유의 개성을 자랑하던 개체들은 점차 그 활력이 감소할 것이며, 소수성과 다양성은 위축되고, 그 결과 ‘위대한 지성과 강한 개체들이 성장하던 땅’은 자본의 수탈구조 속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황폐화될 것이다. 니체는 사회주의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는 “따뜻하고 동정적인 마음”이 삶의 격렬한 성격을 제거해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의 파멸을 자초하고 있다고 일갈하지만, 자본주의의 미덕인 자유경쟁 역시 공동체의 다채로운 존재방식을 파괴함으로써 '삶의 격렬한 성격'을 고갈시키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파멸을 자초하는 화근이 될 요소이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니체가 비난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사회주의라기보다는 국가체제가 되었든 시장질서가 되었든 개체를 통제하고 표준화시키고 순응화, 획일화시키는 모든 구조적 강제력 그 자체라고 봐야 하겠다. “국가란 개인을 서로서로 보호하게 하려는 현명한 실행이다. 만약 국가가 지나치게 고상해진다면, 개인은 결국 국가에 의해 약화되고 해체된다. 즉 국가의 근본적인 목적이 가장 철저하게 무효화된다.”(237) 여기서 말하는 국가 역시 꼭 사회주의국가로 국한하여 생각하기보다는 모든 사회적 질서와 체제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이는 편이 옳겠다. 어떤 사회 체제든 그것이 지나치게 고도화되고 정교해질수록 개체의 자유정신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모순과 모호함으로 점철된 니체를 관통함으로써 우리는 니체를 이해하게 되기보다 도리어 우리 자신의 내적 지향과 마주하게 된다. 언젠가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뉴라이트식 독법으로 니체를 해석해놓은 글을 읽고 식겁한 적이 있다. 아무리 니체가 우리의 내적 풍경을 정치하게 보여준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해석은 해석의 마지노선을 넘어선 오독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자연도태설을 불완전한 이론으로 보는 니체의 견해가 그 명쾌한 반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정치적으로는 차라리 좌우를 초월한 아나키스트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는 민주주의를 비롯한 모든 '정의로운' 근대 정치개념 자체에 회의적이며, 정치적 주장들의 올바름을 논하기보다 그것들 저마다를 하나의 힘으로서 가치평가하고 그 힘을 어떻게 활용할 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국가체제 자체의 붕괴를 전망하는, 어찌 보면 정치적 염세주의자, 견유주의자에 가까워 보인다. <반시대적 고찰>에서 니체가 전망한 이상 국가는 "천재공화국"이었다. 천재공화국이란 아마도 거리에의 파토스를 지닌 강자들로 이루어진, 에고이스트들의 느슨한 연합체 같은 형태가 아닐까 싶다. 그런 니체를 뉴라이트식으로 이해한다면, 그건 니체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도용한 것이리라. 이 또한 내가 니체를 통해 바라본 내 얼굴에 불과한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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