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깊이 읽기 왕실문화 기획총서 3
김동욱.유홍준 외 지음, 국립고궁박물관 엮음 / 글항아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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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여덟 번 째 꼭지 <조선의 서울 자리를 겨루다>에서 글쓴이는 조선시대의 풍수를 ‘문화적 코드’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문화적 코드란,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규약 체계라고 할 수도 있고, 인식론적 프레임 혹은 사유 체계의 토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글쓴이가 소개하고 있는 것이 조선의 지방 고을의 산세를 그려놓은 18~19세기 무렵의 고지도들이다. 모든 고을이 하나같이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잘 갖추어진 전형적인 ‘명당’풍으로 그려져 있지만, 흥미롭게도 이들의 실제 지형은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풍수학적 관점을 고려하여 살펴본다 하더라도 그다지 명당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의 지도 읽기 잣대로 평가하면 조선 시대의 지도들은 현실을 상당 부분 왜곡한 부정확한 지도라는 것이다.

 

현대인의 인식 능력으로는 도무지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은 전국의 모든 산세에서 즉각적으로 왼쪽과 같은 식의 패턴을 발견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렌즈를 착용하고 자연세계를 바라봤으며, 그들만의 인식론적 프레임 속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을 인식했다. 고지도는 바로 그 정직한 인식의 기록인 셈이다. (왼쪽은 이 책 375쪽에 실린, 1872년경의 석성현을 그린 지방도)

 

조선 건국 당시 풍수는 수도를 결정하는 데 주요한 코드로 작용한다. 글쓴이는 이때의 풍수가 “본질론적 차원의 절대적 명당을 전제하는 풍수라기보다는 장소 의미를 구성하는 담론으로 작용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볼 수 있겠다. 서울의 풍수가 ‘절대적으로 명당’이어서 수도로 확정된 게 아니라, 다양한 권력 의지들이 풍수 담론의 언표들을 둘러쓰고 수면 위로 부상하여 엎치락뒤치락한 결과 최종적으로 서울이 수도로 확정된 거라고. 무정형으로 부글대던 권력 의지들이 풍수 담론을 통해서 비로소 의미작용이 가능하게 언어화되어 풍수의 이름 아래 경합하게 되었다고. 하나의 ‘언어’로서의 풍수. 하나의 ‘게임 룰’로서의 풍수. ‘때마침’ 풍수였지, ‘반드시’ 풍수일 필요는 없었던 셈이다. 의미를 관철하기 위해 풍수는 (소통의) 수단으로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풍수는 언제부터 미신이 되었을까. '풍수학자'는 언제부터 더 이상 '지리학자'가 아니게 되었던 걸까. 우리는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풍수를 버리고 풍수 아닌 다른 인식의 프레임으로 갈아타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새로운 언어게임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그 환승의 지점은 어디쯤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 과정 속에서, 어떤 사건의 펼쳐짐 속에서 그러한 이행이 이루어지게 된 것일까. 새로운 프레임은 세계를 어떻게 재편했고, 그 구체적 동역학은 어떠했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한국인의 지리적 공간적 사유에 있어서의 역사적 단절의 지점 및 그 계면에서 발생했을 사태들에 관해서 기회가 닿으면 좀 더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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