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시절의 일이다. 동네를 하릴없이 배회하다 길을 잃고 헤매던 중 우연히 토끼굴처럼 생긴 헌책방을 알게 되었다. 고개를 숙이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니 지하에 가공할 만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아니, 펼쳐져 있었다기보다 책들로 인하여 세계가 바야흐로 함몰되어가는 중이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책장과 책장 사이의 폭이 갓 30센티나 되었을까. 책을 구경하려면 책장 사이로 뚫린, 가히 땅굴이나 다름없는 좁다랗고 구불구불한 통로를 따라 과일 속을 파고든 애벌레처럼 꼬물대면서 나아가야 했다. 경망스럽게 처신했다가는 자칫 쌓여있는 헌책들을 건드려 매몰, 그리고 압사할 위험이 있었다. 책방 한구석에는 손님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이를테면 헌책방 내부 구조도 같은 게 그려져 있었는데 상형문자 같은 그것을 나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고구마헌책방은 그런 곳이었다. 통장 잔고가 춘궁기를 구가할 때마다 그곳에 책을 팔아 연명을 했으니 내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구황작물의 이름에 값하는 책방이기도 했다. 한참 쪼들릴 무렵에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비롯해 좋은 책을 죄다 팔아버렸지만 후회는 없다. 명성에 취해 덥석 구입했으나 정작 읽다보면 성질만 솟구치는 책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아, 그러나 통탄할 일이다. 내게는 은혜로운 구휼의 기관이었던 그곳이, 신당동이 떡볶이로 인하여 비로소 신당동이 되듯 금호동을 진정 금호동답게 만들었던 바로 그 고구마헌책방이, 돌연 경기도로 이사를 가버린 것이다. 오랜만에 놀러갔다 허탕치고 돌아오는 길은 알 수 없는 배신감으로 씁쓸한데, 길가 저편으로는 벌써 완공을 앞둔 브랜드 아파트들이 위용을 자랑하며 카프카의 성처럼 우뚝우뚝 서있다. 이제는 헌책방도 서울을 뜨는구나. 아쉽고, 또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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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크 2012-09-14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읽었던 '고구마'기사가 있어서 주소 남겨봅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3/02/2012030201370.html?news_Head1

수양 2012-09-15 00:43   좋아요 0 | URL
와우 놀라운 기사인걸요! 조만간 집들이 선물 들고 구경가봐야겠군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