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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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신앙의 지혜는 온 인류의 것"이므로 우리가 꼭 신을 믿지 않더라도 기존의 종교 문화로부터 얼마든지 삶에 유용한 아이디어를 얻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종교를 믿지 않은 사람이 여러 개의 신앙들에서 이런저런 요소를 차용하는 것이야말로, 예를 들면 문학 애호가가 수많은 고전들 중에서 자기가 특히 좋아하는 작가 몇 명을 골라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코 범죄가 아니다." 

 

무신론자 용으로 개발된 '보통'식 종교는 어떤 모습일까? 이 종교는 인류의 정신 문명과 과학 기술을 낙관하는 인문주의자 모두를 위한 종교라 해도 무방하겠다. 우선, 이 종교의 신도(?)들을 진리의 빛으로 이끄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역사, 문학, 철학, 예술을 망라한 인문학이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이들 역시 나름의 계율 속에서 평생에 걸쳐 인문학을 탐구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들이 일생 동안 공부하게 될 경전은 프로이트, 마르크스, 무질, 오에 겐자부로 기타 등이 써낸 일체의 저작들이다.

 

한편 이 가상의 종교에서는 성 베네딕트나 성 세바스챤 대신에 구텐베르크, 셰익스피어, 데카르트 등 문명의 역사가 한 걸음씩 도약하는 데 공헌을 세운 인물들을 세속 성인으로 추앙한다. 이 세속 성인들은 '자비의 신전이'라든가 '고요함의 신전'이라든가 하는 이름을 가진 신전들 안에 각각 성화로 제작되어 모셔져 있다. 가정집 거실에서도 역시 세속 성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나 휘트먼, 링컨, 처칠, 스탕달 등이 미니어처로 제작되어 여기저기에 장식품으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딱히 섬기는 신이 없는 이 종교에서는 봄이면 아내와 어머니를 기념하는 축하 행사가 열리고, 여름에는 "철강 산업이 인류의 진보에 미친 중대한 기여"를 기념하는 축제가 열리며, 겨울에는 개와 돼지와 닭 같은 가축에게 감사하는 잔치를 벌인다. 또 이 종교에서는 "산업용 면방적기를 발명한 아크라이트 경을 기념하는 날"이라든지 "무려 16년이나 허탕을 친 끝에 중국산 도기의 유약을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인내의 모범이 된 베르나르 팔리시를 기리는 날" 따위가 석가탄신일이나 부활절을 대신한다.

 

그런데 왜

 

보통이 말하면 재밌는데 내가 말하면 재미없을까. 머리가 안 벗겨져서 그런가. (역시 보통과 비교되는 나의 유머 드립은 여기까지) 아무리 써도 맛보기에 불과한 데다가 쓰면 쓸수록 보통의 매력을 깎아먹기만 하는 장광설이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기 전에 얼른 그만 써버리는 게 낫겠다. 다정하고도 위트 넘치는 보통의 포교 연설을 경청하다 보면 누구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 귀의하지 않고서는 배겨날 도리가 없겠다. 그래, 딱 이 한 문장이면 족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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