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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남미풍 코믹 환타지 대하 고전 소설이라는 엉터리 이름마저도 붙일 수 없는 이 희한하고 독특한 소설이 겨우 사백 페이지 남짓에서 끝나버린 것은 순전히 인내심 부족한 독자를 위한 작가의 배려가 아니었을는지.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이 작가는 셰헤라자드처럼 영원히 이야기를 계속해 나갈 기세다. 가히 '이야기'에 대한 도착증적 열정마저 느껴지는 이 작가는 <고래> 한 권으로 이미 이야기꾼으로서의 저력, 아니 괴력을 충분히 보여주고도 남은 것 같다. 그러나 끝없이 이어지는 서사의 유장함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유할 만한 내용이 빈곤하다는 사실은 다소 맥빠지고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 <고래>는 마치 놀라운 괴력을 지녔으되 지나치게 '무구'했던 소설 속 주인공 '춘희'와도 닮아있다. 소설에서 의미를 구하는 일의 의미 없음을 지적하며 소설의 가장 큰 덕목이란 무릇 재미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나는 철학이 빠진 소설은 결정적으로 재미가 없다는 데 한 표를 던진다.
철학이 반드시 작품 속에서 어떤 메시지로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철학은 그저 모나리자 같은 표정으로 소설 전반에 스며들어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독자를 끝까지 붙잡아 둘 수 있는 결정적 요소는 유장한 서사의 힘이 아니라, 바로 그 미묘하고도 알 수 없는 '표정'에 있는 것일 테니. 그리고 '꾼'과 '대가'의 차이 역시 거기서 비롯되는 것일 테니. 재미난 이야기를 일껏 경청해 놓고서는 이제와서 표정을 만들어내라고 주문하는 이 괴팍한 트집쟁이 독자는, 이 작가가 앞으로 좀 더 깊은 사유로 무장하여 '무구함'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욕심을 내자면, 이 작가가 단지 소설이라는 장르에 갇혀있지 않고(사실 <고래>와 같은 이야기를 소설이라는 활자 매체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다소 비효율적인 일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고래>는 마치 시나리오집이나 줄거리 요약본 같기도 해서, 반드시 소설이어야 할 어떤 형식적 당위성을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더 너른 장소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펼치는 모습을 보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