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과 감응의 면에 있어서 모든 예술 형식 가운데 가장 위력적인 분야는 아무래도 평면조형미술 장르가 아닐까. 이미지로서의 예술 작품은 소설이나 음악과 달리 시간성마저 응축되어 있다. 문학작품이나 음악이 세계를 시간성 속에서 점진적으로 펼쳐내어 보여준다면, 이미지는 그것이 가지는 무시간성 내지는 초시간성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우리에게 강렬한 세계를 현시한다. 은폐된 진리가 드러나는 하이데거적 순간을 체험하는 데 있어서는 평면조형만큼 적합한 매체가 또 없을 것이다.
한때 이미지가 담아낼 수 있는 세계의 극한을 표현해보고픈 허황된 열망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이카루스가 태양을 꿈꾸고 산악인이 에베레스트를 꿈꾸듯이 나도 회화가 표현해낼 수 있는 궁극의 정점을 꿈꾸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너무나 허황되었기에 차라리 순진한 야망이었지만, 세계를 관통하는 응축된 이미지를 단 한 점이라도 내가 창조해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나의 생의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때는 얼마나 확신했었는지.
궁극의 이미지를 꿈꾸었던 내게는 바넷 뉴먼의 작품들이 무척이나 각별하게 느껴진다. 오로지 붉고 거대한 그의 작품은 여타 예술작품이 불러일으키는 감상 그 이상을 불러일으킨다. 딱히 신앙 생활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자들이 종교 의식을 통해 느끼게 되는 환희와 열락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바넷 뉴먼의 작품에서 최초로 종교적 감정에 견줄 수 있을 만한 형이상학적 감흥을 느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