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 이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신, 진리, 진보, 도덕, 휴머니즘, 이데올로기 등 지금까지 추앙되어온 모든 근대적 가치들을 부정하는 사유의 작업이 과연 니체 이후로 우리에게 얼마나 더 큰 지적 충격을 안겨줄 수 있을까. 존 그레이는 요란하게 뒷북을 쳐대는 니체의 아류 같고, 그래서 이 책은 다소 진부하고 식상하게 읽힌다. 사실 오늘날의 지적인 유행 속에서 심오한 근대적 가치들의 우스움과 벌거벗은 인간의 앙상한 본질 따위에 대하여 가차 없이 펜을 휘두르기란 몹시도 쉬운 일이 아닐까. 쉬운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칫 사유의 경박성을 드러내는 일이 되어버릴 가능성마저 있는 게 아닌지.     

어찌되었든 이 책에서 저자는 근대적 가치의 허구성을 조목조목 파헤치고 나서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패닉 상태에 빠져있을 독자들을 염려하여 플라톤식 해결책을 제안한다. 삶의 목적을 (세상을 바꾸기 위한) ‘행동’에 두지 말 것. 행동은 어디까지나 ‘위안’일 뿐이니 그저 관상(觀想)할 것. 아울러 저자는 좋은 삶이란 진보를 꿈꾸는데 있지 않고 비극적인 우연성을 헤쳐 나가는 데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무수한 사건의 마주침들 속에서 삶을 구성해 나가는 존재이며, 도래하는 모든 사건들은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결단과 선택과 행동을 촉구하지 않던가. 심지어는 행동하지 않고 그저 관상하는 일 조차도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결단과 선택에 따른 행동이 아니겠는가. '비극적인 우연성을 헤쳐 나가는' 인간의 지극히 실존적인 행동이야말로 저자 자신이 부정하는 휴머니즘적 가치에 다름 아니며, 바로 이 비극성으로부터 인간은 불가피하게도 철학적인 사유를 시작하게 된다는 점 역시 저자는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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