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맑스 - 미셸 푸코, 둣치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디알로고스총서 1
미셸 푸코.둣치오 뜨롬바도리 지음, 이승철 옮김 / 갈무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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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와의 대담에서 둣치오는 맑스주의자가 푸코에게 가질 수 있을 법한 여러 가지 비판적인 의문들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그는 푸코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분석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은 근대세계의 모든 사회에서 유사하게 작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당신의 이런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전체주의나 민주주의체제 간의 차이가 무의미해져버리지 않나. 물론 당신은 이를 부인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담론이 가져올 결과와 그것의 정치적인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면, 당신의 연구는 결과적으로는 정치적 회의주의, 무관심주의를 야기하지 않겠는가.   

사유의 토대나 방식이 워낙 다르다 보니 어떤 답변은 종종 질문과 단절된 채 흘러가는 면이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맑스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푸코의 답변을 읽고 나서도 뭔가 여전히 미진한 구석이 남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푸코와 맑스라고 하는, 여간해선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질적인 만남은, 푸코가 끝부분에서 자신의 모든 연구가 (회의주의가 아니라 무려) ‘절대적 낙관주의’에 기반하고 있다고 밝히는 순간 오묘한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이 속한 권력관계를 인식하고 그것에 저항하여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고자 결심한 사람들 자신에 의해 고안되고, 계획될 수 있는 수많은 할 일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내 모든 연구는 절대적 낙관주의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이요. 당신이 어떻게 갇혀 있는지 보시오.’라고 말하기 위해 분석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사물들이 변형될 수 있다고 믿는 한에서만 그것에 대해 말해 왔습니다.”(165)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서 섣불리 말을 하지 않는 거라는 푸코의 말이 다소 수사적으로 들린다면, 이 책에서 푸코가 자신의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다음의 대목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겠다.

“스스로의 역사 속에서 인간은 결코 자신들을 구축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지속적으로 그들의 주체성의 수준을 전환하고, 그 자신을 상이한 주체성들의 무한하고 다양한 계열들로서 구성하였습니다. 그러한 과정은 결코 종결되지 않으며, 우리를 ‘인간’이라고 가정되는 그 무엇과 마주치도록 만들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경험의 동물이며, 그는 대상의 영역을 결정하는 동시에 그 자신을 바꾸고, 해체하고, 변환하고, 주체로서 탈바꿈하는 무한한 과정 속에 놓여있습니다.”(120)

푸코는 “인간이 인간을 생산한다”는 맑스의 경구를 돌아보면서, 이 경구에서 생산되어야 하는 인간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어떻게 될지 그리고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생산”이라는 문제가 곧 “현재의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고, 완전히 다른 어떤 것, 즉 전체적인 혁신을 창조하는 문제”(119)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곧 “주체가 자신을 구성하던 관계들과 더 이상 자기-동일성 속에 있을 수 없는, 그런 경험, 그리고 그 결과, 주체가 그 자체와 결별하고, 그 자신과의 관계를 깨뜨리며, 동일성을 상실하도록 만드는 그러한 경험”(53)을 수반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 대담에서도 여전히 푸코는 ‘현재의 우리를 파괴하고,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생산해내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그 실천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지식인의 역할은 해결책을 처방하거나 규칙을 설립하거나 도덕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163) “문제를 전체적인 복잡함 속에서 드러내어 의심과 불확실함을 유발”(154)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푸코에게는 개별적인 주체의 실천적 측면을 다루는 것이 곧 사상적 자기모순을 자초하는 일이므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그 자신이 일생에 걸쳐 지난하게 밀고 나갔던 지적 탐구의 여정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자유를 꿈꾸는 실천적 주체의 한 모습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한편, 이 책에서는 맑스주의 뿐만 아니라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푸코의 생각도 들여다 볼 수 있다. 푸코는 근대 이성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을 시도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로부터 큰 매력을 느꼈다고 거듭 밝히면서도,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의해 채택된 ‘주체’에 대한 생각이 대단히 전통적인데다가 맑스주의적 형태의 휴머니즘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자신의 사유와 분명히 선을 긋는다. “확실히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우리의 동일성을 회복하는 것 혹은 구속되어 있는 우리의 본성이나 인간의 근본적인 진리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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