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거대서사가 붕괴했다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선언에 새로운 담론을 하나 더 추가한다. 포스트모던의 사회에서는 거대서사가 붕괴하고 작은 이야기들의 다원화가 이루어지지만,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 다원화라는 것은 결코 방만함이나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의 범위를 설정하고 각각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데이터베이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작은 이야기들은 하나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로부터 추출된 요소들이 다양한 조합을 거쳐 만들어진 일종의 유닛 같은 것이다. 작은 이야기들을 질서지우는 비-설화적 데이터베이스가 존재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확실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그의 말대로라면 포스트모던이 말하는 권위로부터 해방된 자유라는 것은 대단히 한정된 공간과 범위 속에서만 영위되는 자유이며, 그것은 결국 자유를 가장한 속박에 불과한 게 아닌가. 데이터베이스는 비-설화적이기는 하지만, 이 역시 또 다른 메타적 권위, 어떻게 보면 ‘한층 진화된’ 새로운 메타적 권위가 아닐까. 저자가 일본의 오타쿠 문화를 통해 탐색하고 있는 포스트모던의 성격은 애초에 포스트모던이 처음 철학적 담론으로 부상했을 때의 뉘앙스와는 약간 다른 것 같고 어떤 면에서는 리오타르의 주장을 전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저자가 주목한 것처럼 오타쿠를 소비사회의 새로운 포스트모던적 인간 유형으로 볼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 또한 하나의 거대서사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