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백승욱 옮김 / 창비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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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시대가 자본주의 세계경제체계에서 미지의 새로운 체계로 옮겨가는 이행기가 될 것이라는 월러스틴의 분석을 접하고 나면, 맑스의 이론이 여전히 유효할 수 있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윤리적인 당위가 아니라 인식론적 당위에서 그런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월러스틴은 세계체계가 이행기에 접어들면서 국가가 더 이상 예전만큼 세계체계의 조정기제로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고, 국가의 기능이 무력해짐에 따라 개인들은 자신들의 지역적 안전을 스스로 구축하는 '고대적 해결책'을 강구하게 될 것이며, 그 결과 폐쇄적인 소규모 지역 공동체가 발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맑스 역시 최종적으로는 계급과 국가의 소멸, 그리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를 전망하지 않았나. 물론, 진보사관에 따라 선형적인 발전도식을 적용해서 생산양식이 점진적으로 다음 단계로 이행해 나갈 것이라고 본 점이나 소수 권력집단의 독재를 필연적이고 정당한 절차로 파악한 점 등 맑스의 이론에서 세부적으로 비판이 끼어들 만한 여지는 많다. 그럼에도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후 도래할 사회에 대한 맑스의 최종적 전망은 이 책을 읽을수록 의미가 있어 보인다.

과연 인류 역사의 흐름에서 사회주의 공산국가의 성립과 몰락은 하나의 에피소드(혁명의 동력이었던 반체계적인 민주주의에의 열망이 냉전시대 발전논리에 따라 결국 점진적 자유주의로 수렴됨으로써, 냉전시대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단일한 세계체계가 유지되었던 현실)였는가, 아니면 거대한 이행을 예고하는 맹아적 증후였는가. 현재의 우리로서는 가늠할 길이 없다. 그것은 사후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평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가의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만일에 도래할지 모르는 사건, 즉 우리가 아는 세계가 종언할 경우를 위해 우리는 후자의 경우 또한 진지하게 고찰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모든 사상이 그렇겠지만, 맑스 역시 언제든 미래적인 사상으로 재조명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맑스 뿐만 아니라, 맑스와 불화했던 아나키스트 푸르동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맑스와 달리 필연적인 이행기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반혁명세력으로부터 혁명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국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긴 맑스주의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그는 인간과 생명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국가는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혁명이 이루어지는 즉시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력한 국가가 혁명의 목적을 위해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혁명의 목적을 배신할 것”이라던 푸르동의 날카로운 예언은 러시아의 역사가 증명해 주었다.

러시아 혁명은 왜 실패하고 말았을까. 월러스틴은 볼셰비키들이 '이중의 속박'이라는 딜레마를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즉, 볼셰비키들이 근대적 국가간체계를 전복하고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일단 기존 체계의 권력을 탈취해야만 한다. 정치 조직인 그들로서 이것은 곧 ‘국가조직 내에서의 권력 장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들은 기존 체계를 전복한 게 아니라, 외려 부르주아나 군주를 대신하는 국가조직의 새로운 수장으로 등극하는 격이 되어 결국 세계의 변혁은 불가능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결국 소비에트 연방은 실질적으로 국가자본주의로 전락함으로써 자신들이 그토록 부숴뜨리고자 했던 체계와 똑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러시아 혁명 정권은 결국 똑같은 괴물이 되어 근대적 세계체계인 국가간체계에 완벽하게 통합되었다.  

볼셰비키의 딜레마와 한계가 그런 것이었다면, 아나키스트들에게는 이런 난점이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뜻과 이념을 사회에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루어낼 수 있는 힘, 즉 실질적인 정치권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민중에게 강제력을 발휘해서 혁명을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하고 조정해 나아가려는 권력조차 거부했다. 모든 강압적 권력 행사를 거부하는 것 자체가 그들이 내세우는 그들 자신의 정체성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에게는 뜻은 있었지만 힘은 (그들이 스스로가 거부했기 때문에) 없었다. 이들의 딜레마, 즉 아나키스트들은 어떻게 정치화될 수 있는가, 어떻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나키즘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오늘날의 여러 사회운동집단에게도 여전히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는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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