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시대의 논리 창비신서 4
리영희 지음 / 창비 / 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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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읽고 궁금증이 생겨 구해 읽게 되었다. 그러나 70년대 미국, 중국, 일본의 정치적 상황이나 국가 관계에 대한 배경지식이 희박한 상태로는 책을 읽기가 다소 버거웠다. 그 시절 주요 쟁점 사안이었을 베트남 전쟁, 중국 외교, 한미 안보 체제의 전망 등을 다룬 굵직한 논문들은 대충 읽거나 건너 뛰었다. 정작 중요한 글은 못 읽었지만, 그래도 몇 편의 짧은 에세이들을 통해서 선생의 언론인으로서의 자세와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짐작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책에서 선생은 미국 정부와 언론이 베트남전쟁에 관련된 분쟁을 민주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주목하면서 국내 정권을 우회적으로 강도높게 비판하기도 하고,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의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중국 사회에 대한 보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대중을 감각적이고 말초적인 쾌락에 지속적으로 노출시킴으로써 사고능력과 사회비판능력을 감퇴시키는 미디어의 폐해에 대해 지적하는가 하면, 과거 소련 정권의 극심했던 사상탄압과 반지성주의를 회고하며 당시 국내 독재정권의 반민주성을 꼬집기도 한다.       
    
리영희 선생을 일컬어 사상의 은사라고 하지만, 내게 선생은 은사들의 은사라고 하는 편이 더 맞는 표현일 것 같다. 그 때문인지 나는 평소에도 늘 선생이 현실에 실재하지 않고 오로지 역사 속에서만 빛나고 있는 전설의 인물처럼 생각되었던 것인데, 그래서 막상 이 책을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는 기분이 퍽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개인적인 심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정말로 역사 속의 인물이 된 선생의 책을 다시 꺼내본다. 70년대 쓰인 글들이 여전히 새파랗게 눈뜨고 살아있다. 이 새파란 글들이 저마다의 책장에 오롯이 꽂혀 있을 것을 상상하면 기분이 묘해진다. 떠난 자의 글이 도처에 꽃씨처럼 흩어져 남은 자들의 정신을 구성해 나가는 이 진기한 풍경의 한 자락에 나도 서 있다고, 이 책을 덮으며 감히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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