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는 사회의 후진성을 절감한 인텔리겐차들이 등장하여 브나로드운동을 벌인다. 그들은 자본주의 진입의 문턱에 서있던 러시아가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회주의로 이행되어가길 바랬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러시아가 어떤 면에선 이미 사회주의 국가 상태였다는 점이다. 이 나라에는 오래 전부터 '미르'라는 촌락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어떤 면에선 사회주의자들이 그토록 열망했던 이상사회의 모습과 유사해 보인다.  

볼셰비키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후 국가가 점진적으로 소멸하리라고 보았지만, 제정 러시아에서 국가의 지위라는 것이 과연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그것처럼 막강한 권력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의 국가의 권능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제정 러시아에서 황제의 지위란 것은 이미 '소멸' 단계에 가까운 상태가 아니었을까. 물론, 이것은 내멋대로의 추측이지만, 전제왕권체제에서 황제의 존재라는 것은, 광대한 영토에서 구속감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어떤 질서와 통일의 필요성을 느껴서 스스로 구심점을 만들어낸 결과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는, 제정러시아가 꼭 자유주의 이념에 위배되는 전근대적 사회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는데 합리적인 정치체제를 갖추고, 세부적으로는 촌락자치공동체들로 이루어진, 어떤 면에선 이미 '선진적 사회주의 국가'였던 러시아는, 전세계적 자본주의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하면서 심각하게 불안한 사회가 되어버렸다. 자본주의 및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유입이 사회를 계몽시킨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를 뒤틀리게 만들고, 혼란을 부르고, 그 결과 반동적으로 일어난 것이 혁명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러시아 역사는 맑스가 얘기한 사회주의이행론이랑은 그닥 상관없이 펼쳐진 셈이다. 비약인지 모르겠지만, 맑스의 사회주의이행론이 역사가 진보한다는 근거 없는 믿음에 따른 가상적인 시나리오였다는 것을 (사회주의 이행론을 그토록 체현하려 했던)이 나라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