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라지는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말했던 것과 놀라울 만큼 흡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만 사용하는 개념어와 전달하는 방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스피노자가 기하학적이고 논리적이라면, 마하라지는 은유적이고 시적이다. 글이라는 것이 본래 전달의 목적으로 쓰여지는 거라면, 각각의 방식 모두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볼 때 저마다의 장점이 있는 것 같다.  

스피노자가 정의한 ‘실체’라든가 마하라지가 말하는 ‘절대’에 대해 단지 그들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없는 경이와 기쁨을 얻는다. 그러나 독서를 통해 일시적이고 간접적으로 우주의 본성을 가늠해보는 이런 경험은, 그것이 아무리 내 수준에서는 강렬한 독서 체험이었다 할지라도 결코 본질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저 일시적으로 도취된, 잠시 고양된 마음 상태일 뿐이다. 너무나 사소한, 개체의 한 현상이다. 

독서라는 활동은 어디까지나 대상을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일인데, 과연 그런 것이 개념으로 이해될 만한 영역인가. 진정한 인식은 오로지 지난한 명상 수행을 통한 직관적 체험을 통해서만, 굉장히 내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이런 정신적이고 영적인 부분 만큼은 글을 읽고 머리를 굴려서 이해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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