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동아리 사람들끼리 암실을 빌려 사진 작업을 했던 적이 있다. 자궁 같던 암실에서 흑백 필름을 현상하며 느꼈던 흥분과 설렘을, 아직도 나는 두근대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산다. 현상액에 인화지를 띄우고 가만가만 흔들면 낮에 찍었던 풍경들이 아스라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인데, 그때의 벅차오름을 어떻게 필설로 형언할 수 있을까. 상(像)이 꽃처럼 피어나던 그 마법 같은 현현의 순간을.

 

시도 그렇게 오는 시가 있다. 처음엔 아무 것도 안 보이지만 곰곰이 있으면 문득 꽃처럼 피어나는 시. 그래서 어쩔 줄 놀라 두 눈 비비고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시. 쉬운 시가 재미없는 까닭은 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꽃도 사진도 시도 피어나는 순간이 가장 눈부시다. 피어나는 순간의 시가 가장 아름답지만, 필듯 말듯 하는 순간의 시도 애틋하다. 잡힐 듯하다 놓칠 때마다 정수리가 자꾸만 간지럽다. 난해한 시가 꼭 싫지만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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