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날짜가 자꾸만 미루어져 요 근래 몹시 짜증이 났었다. 후임 약사를 구할지 말지 애매한 지경이 되어버린 약국의 상황을 모르는 바 아니나 나 또한 나름의 개인 일정을 침해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약국을 그만두고 딱히 뚜렷한 계획이 잡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나의 휴가가 사악한 외부 세력의 공작에 의해 느닷없이 박살 난 것 같아 억울하기조차 하였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국장님과 퇴직 문제로 의견을 나눌 때마다 놀랍게도 내 입에서는 억울한 속사정과는 전혀 관계없는 말들이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아, 그건 조금, 저는, 음, 그렇기도 하지만... 예... 어쩔 수 없지요, 뭐... 끄덕끄덕. 퇴직 날짜가 미루어질 때마다 나의 졸렬한 협상 능력이 얼마나 저주스러웠는지 모른다.

나는 왜 부탁을 냉정하게 거절하지 못할까 하는 자책감에서부터 혹시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나를 만만하게 보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억지로 근무를 하는 동안 무수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내 머릿속에서 이미 국장님은 제 잇속만 챙기는데 급급한 자본가의 전형으로 낙인 찍혀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헤매고 계신지 오래였다.

그런데 약국에서 일하는 마지막 날이었던 어제, 국장님이 나를 부르더니 원래 금액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월급을 주시면서 그동안 고마웠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또 예의 그 졸렬한 협상 능력을 발휘하여- 아, 이건 조금, 저는, 음, 그렇기도 하지만... 예... 어쩔 수 없지요, 뭐 끄덕끄덕 하고는 흰 봉투를 넙죽 받아들었는데, 그 순간 국장님의 머리 뒤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나 볼 수 있는 광휘의 오로라가 잠시 번뜩였던 것 같기도 하고.

격려와 감사 말씀이 오가고 난 후 국장님과 마지막으로 뜻깊은 악수를 나누었다. 골고다 언덕을 헤매던 국장님은 어느새 이기적인 속물 자본가의 누명을 벗고 사회에 귀감이 되는 약업계의 원로 유지로 거듭나 계셨다. 꼭 두둑한 흰 봉투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만(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그동안 내가 속이 너무 좁았구나 싶어 멋쩍었다. 졸렬한 건 협상 능력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던 걸까. 흰 봉투가 인간의 정신을 이렇게나 고양시키다니 웃어야 할 일인지 울어야 할 일인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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