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약국 임직원 일동은 오로지 89.1 MHz만 듣는다. 적어도 약국 내에서는 단군 이래 단 한 번도 변경된 적 없는 영원불멸의 라디오 채널이다. 약국에서 가장 오래 근무하신 최 부장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6. 25 때에도 남들은 보따리 이고 부산으로 피난 갈 때 홀로 약국을 지키며 융단폭격 속에서 89.1 MHz를 청취하셨다는 소문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  

혹시라도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신 초인 약사님 한 분이 미처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89.1 MHz를 돌연 91.5 MHz로 돌려놓으신다거나 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만약 그날이 오면 나는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릴 것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분의 발에 입을 맞추며 엑스칼리버를 뽑은 아더왕으로 추대할 의향이 있는 것이다. 

물론 89.1 MHz가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최종 결정된 채널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나는 대남 방송을 듣고 싶고, 정 약사님은 클래식 방송을 듣고 싶고, 한 대리님은 극동 방송을 듣고 싶고, 또 약품 급송 배달 담당 직원은 교통 방송을 듣고 싶은데- 우리의 취향을 동시에 충족시켜줄 수 있는 기막힌 채널이 대체 어디에 있겠느냔 말이다. 클래식 선율이 배경음으로 깔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교통의 평화를 지향하는 대남 방송의 출현이 현실적으로 요원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오늘도 민주적인 합의 끝에 89.1 MHz를 듣는다.

한 해 동안 89.1 MHz를 분석해 본 결과 나는 이 채널이 얼마나 전체주의적인가에 대해 절절하게 체감했다. 봄에는 그나마 조금은 다양했던 노래 종목들이(그래도 대체로 봄맞이 곡들이다), 여름이 오면 일괄적으로 바캉스 댄스곡으로 수렴한다. 찬바람이 불 때 쯤에 바캉스에서 돌아온 우리는 이제 돌연 발라드를 부르며 청승을 떨어야 한다. 청승떨다 지치면 겨울이 온다. 겨울 하면 또 캐럴송이다. 하루 종일 타악기(종, 북, 탬버린)의 무한 세례가 펼쳐진다. 그리고 한 해 끝! 이것이야말로 89.1 MHz의 한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채널이 89.1 MHz에 고정되어 있는 한, 내년에도 우리 약국 임직원 일동은 전원 흰가운을 걸쳐입고 봄노래로 사기충전한 뒤 일렬종대로 바캉스를 떠날 것이다. 그리하여 낙엽이 지면 실연을 당하고 눈이 오면 캐럴을 듣다가 또 한 해를 마감할 것이다. 융단폭격이 다시 한 번 서울을 강타한다 해도 소용없다. 아, 오늘처럼 하루종일 캐럴송만 들어서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 날에는 대남방송이 너무나 그립다. 대체 백마 탄 초인 약사님은 언제쯤 나타날지. 뒷산 올라가서 정화수라도 떠놓고 빌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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